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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장통 Oct 01. 2021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을 쓴다는 것

feat.우리 아빠의 장인어른

지금은 나만 기억하고 있는 사실이지만, 나는 한 때 글쓰기 신동이었다. 너무 오래전 일이라 그걸 아직도 우려먹냐고 누군가가 나를 비웃을 지도 모르지만, 어쨌든 거짓말은 아니다. 국민학교 시절의 일이니 출생 이후 그때의 나를 만들기까지의 시간보다, 그 이후에 지금의 나를 빚어낸 시간이 더 길다. 지금은 흔적조차 남지 않은 재능이지만, 뭐 그랬던 때도 있었다. 백일장에서 상도 타고, 독후감 숙제를 제출하면 국민학생이 쓴 글 같지 않다고 선생님께 칭찬도 받았다. 나의 영광의 순간이다.

그 이후 중 2병에 걸렸다. 왠지 책을 읽는 것은 간지가 안나는 일인 것 같아서 제일 좋아하던 독서와도 멀어졌다. 그러다 보니 어느샌가 ㅎ와 ㅋ를 섞지 않으면 한 문장도 쓰기 어려울 정도로 깃털처럼 가볍고 가뭄 맞은 하천같이 얕은 문장력을 뽐내게 되었는데, 어쩌다 보니 지금은 다시 작가를 꿈꾼다. 칭찬받던 그때가 그리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글을 잘 쓰면 주변 사람들은 “할아버지를 닮았구나.”라고 말했다. 우리 할아버지는 시인이다. 본업은 국어 선생님이었다. 엄마랑 이모들 말로는 뛰어난 글로 주변에서 추천을 받아 등단하셨다고 한다. 시집도 출간하셨다. 10년 전쯤 한번 읽어봤는데 유감스럽게도 나에게는 아무런 울림도 주지 못했다. 할아버지 생전에 할아버지와 내가 가까워지지 못한 이유일 수도 있겠다.

할아버지는 내가 스무 살 때 돌아가셨다. 고로 할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오래되었기도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할아버지와의 추억이 정말 단 한 개도 떠오르지 않는다는 것은 희한한 일이다. 할아버지와의 추억이 없다는 사실조차 인지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 그러다 몇 년 전쯤, 아빠가 나와 예비 남편과의 술자리에서 할 얘기가 없었는지 할아버지 이야기를 꺼냈다. 우리 아빠는 말재주가 참 없는 사람인데, 할아버지 이야기를 하니 이야기꾼처럼 재밌었다. 그날 이후 ‘나를 닮은’ 할아버지에게 관심이 생겼다.


아빠 장인어른 출간 시집



우리 엄마와 아빠는 한동네 사람으로 주민 등록 번호 뒷자리가 성별을 나타내는  번째 숫자 말고는 전부 같다. 동네가 작으니 벌어졌던 일인데 어린 마음에 그것도 모르고 엄마랑 아빠는 운명이라며 호들갑을 떨었더랬다. 할아버지는  작은 동네 제천에  없는 중학교 교사였고 아빠 친구분들 중에는 할아버지 제자가 많았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이탈리아 장인이     만든 수입산 베레모를 쓰셨고, 뿔테 안경을 쓰셨고, 파이프 담배를 피우셨다. 당시는 한국 전쟁의 여운이 가시지도 않은 1960년대였다. 지지리도 가난한 달동네 꼭대기에 살면서 본인은 저렇게 세련되셨다. 우리 할머니는  때문에  번이나 보릿고개를 넘으셨지만 아무튼 할아버지는 동네 유명인사였다고 한다. 동네에서 박지견 선생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젊은 사람들  할아버지를 동경해서 따라 하는 사람도 있었다. 우리 할아버지는 알코올 중독이었는데 할아버지를 추종하는 학생들이 교실에 놓인 주전자 안의 물을 막걸리로 바꿔치기해놓았다고 한다. 그럼 할아버지는 수업 중에  물을 마시는 척 막걸리를 마셨고, 학생들은 알면서도 모른 척하며 할아버지의 취중 수업을 들었다고 했다. 퇴직금으로는 축음기를 사셨. 아빠 말로는  돈이면 당시 아파트  채를   있는 금액이었다는데, 엄마는  정도는 아니었다고 반박했다. 때문에 정확하진 않지만 거금이었던 것만은 확실하다. 할아버지의 퇴직금과 맞바꾼 축음기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  삼촌네 집으로 옮겨졌다.   집에 사는 사촌 언니 말로는   듣지도 않는 축음기가 때때로 고장이 나서 아직도  녀석은  먹는 귀신이라 했다.


툭하면 () 찾다가 (Jesus)  뻔하는 내가 누굴 닮았나 했더니 할아버지였다. 요즘 시대에도 외제만 찾으며 분수도 모르고 명품을 사제끼는 나의 허영심은 할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이었다(물질적인 유산은  남겨 주셨다). 힙합퍼들 조차 울고  할아버지의 Flex 정신은  잔고가 일상이  나에게로 이어졌다. 알아가면 알아갈수록 할아버지는 나와 존똑이었다. 브런치 대상을 수상한 정여음 작가가 저서 ‘젊은 adhd 슬픔에서 본인의 비정상의 원인을 알고 슬펐다고 했는데, 나는 오히려 나의 광기의 근원을 찾고 나니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너는 대체 누굴 닮아 이러니?”


라는 말을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으며 집안의 천덕꾸러기로 살아온 나에게도 내 편이 생긴 것이다. 몰라 뵈어 죄송해요. 할아버지. 함께 깊은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이제는 할아버지가 곁에 계시지 않네요.


그래서 할아버지의 시집을 10년 만에 다시 집어 들었다. 여전히 난해했다. 내게 할아버지의 깊은 사유를 이해할 만큼의 지성이 없는 탓일까.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려 했는데 좀처럼 할아버지의 아들, 딸 중에도 할아버지의 글을 읽은 사람이 없었다, 겨우 찾아낸 한 사람이 우리 아빠였다. 방송 통신 대학 영문학과 만학도가 되어 요새 문학 평론이 취미다.


 “장인어른 글에는 깊이가 없어. 일제 강점기, 한국 전쟁  겪으시고 개인적으로도 불면과 정신 질환에 고통받으셨는데 왜 그럴까?


 “아빠, 힘든 일을 겪었다고 글을 잘 쓰면, 아프가니스탄 난민들은 모두 노벨 문학상을 받아야 하지 않을까요?”


 “장인어른은 엘리트였어. 연희 전문학교 출신이셔.”


연희 전문학교라 함은 대한민국 최고의 대학 SKY   번째에 위치하고 서연고  가운데 자리 잡은 명문대의 전신 아닌가. 개인적으로 학력은 문장력에 비례하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아무튼 아빠는 할아버지작품에 대해 나와 같은 의견인 듯했다. 할아버지는 불면과 숙취로 본인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신  아닐까? 할아버지를 닮은 나의 미래도 할아버지일 것만 같았다. 나의 글은 가족들에게 조차 ‘깊이가 없다 평을 듣게 되는 것일까. 지금 하는  그만두고 글쟁이를 업으로 삼으려는  타이밍에 불안하지 아니할  없다.

사람들은 왜 글을 쓰는 걸까. 돈을 벌기 위해서? 인정받기 위해서? 남들과 연결되기 위해서?

돈을 벌기 위해서라면 현업을 유지하는  낫다.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다. 어떻게든 허리띠를 졸라 매고 인생에  번쯤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열중해 보고 싶었다. 대단한 명예 욕심도 없다. 사람 일은 모른다지만 나의 남은 생애 동안 박범신 작가와 같은 문장을   있게  정도의 변화 나에게 일어나지 않을 것은 자명하다. 가능성이 없는 일에 기대를 걸지 않는다. 하지만 아무도  글을 읽어주지 않는 다면? 나는 그래도 계속해서 글을   있을까? 자신이 없다. 하지만 아무도 기다리지 않는 글을 쓰게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다. 영화 ‘엽기적인 그녀 주인공 전지현처럼 황당하거나 지루한 글을 들고 다니며 주변 사람들을 괴롭히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괜찮을지 나에게 반복해서 묻는다. 대답은 아직 No. 언젠가 Yes라고 말할  있는 , 나는 아마도  인생 마지막 사표가  사직서를 던지고 전업 작가의 길을 선택할 것이다. 할아버지는 무슨 생각을 하면서 글을 썼을까? 가족조차 읽지 않았던 할아버지의 . ‘ 유명한 명탐정 코우스케의 손자 불렸던 ‘소년 탐정 김전일 김전일처럼 ‘ 유명한 시인 박지견의 손녀라는 꼬리표가 붙을 일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팔리는 시인, 유명하지 않은 할아버지의 존재는 마음의 위안이 된다. 글이 맘에 들지 않을 , 부족한 재능을 뼈저리게 느낄 , 혼자가 아니라는 위로를 준다. 할아버지를 동지삼아 꿋꿋이 작가의 길을 걷다 보면, 언젠가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을 계속해서   있는 열반의 길에 다다르지 않을까.


할아버지의 시집 표지에 적힌, 대표적이라 추정하는 시



포털 사이트에 검색하면 나오는 할아버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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