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친구 H에 대한 기억...
나는 서울 북부 변두리 수유리에서 태어나고 그곳에서 국민학교와 중학교를 졸업했지만 고등학교는 먼 곳으로 가게 되었는데 그땐 인문계고등학교는 소위 뺑뺑이라고 은행알을 굴려 추첨하여 자기가 지원한 지역의 학교로 배정이 되는데 나는 북구지역의 우리 집 근처 학군이 아닌 소위 공동학군이라 하는 서울시내 4대 문 안에 학교들이 모여있는(지금으로 하자면 강남의 8 학군처럼 당시 명문고라 하는 학교들이 대개는 서울 중심가에 몰려 있어) 그곳에 지원을 했다. 이곳을 공동학군이라 하는데 자기 집 근처의 학교에 지원하지 않고 이곳에 지원을 했다가 떨어지면 자기 집 근처의 학교로 배정이 되었던 것으로 기억을 한다. 당시 고교평준화 이전의 명문고들이 대개 4대 문 안에 있었기 때문인데... 사실 통학거리로 보자면 자기 집 근처 학교보다는 훨씬 멀리 다녀야 했지만 그땐 부모님께서 공동학군에 지원하라 하여 아무튼 그렇게 먼.... 시내버스로 1시간가량 걸리는 거리로 만만치 않은 거리의 학교로 배정이 되었다. 그런데 나의 모교는 당시 시내 중심가에 있었지만 고교평준화로 오히려 혜택을 받은 학교였고 그전 고교시험제 일 때는 소위 똥통학교라 불리던 학교였다. 하여간... 다들 기피하는 학교였고 하필 나는 그 학교에 배정이 된 것이다. 그때 고교배정을 TV에서 중계를 했는데 '나는 그 학교로 배정이 되자 울면서 학교 안 다니겠다고 떼를 썼다'라고 식구들이 놀려댔다.(그런 기억은 없는데 그렇다고 하니...) 내가 배정된 그 학교는 야구가 유명하여 프로야구가 생기자 모교출신 야구선수들이 프로무대에서 활약을 했고 내가 야구에 빠지게 된 건 그 학교 야구부가 대회에 나가면 전국대회 출전 시 오후 수업을 빼고 단체 응원을 가곤 했던 기억 때문인데... 제법 야구 좀 하던 학교였다. 나중에 우리 학교는 내가 졸업하고 그야말로 강남의 8 학군으로 이사를 하여 신흥 명문고가 되었다.
1학년 때 같은 반 친구하나가 있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제주에서 유학온 아이로 학교 근처에서 하숙을 하고 있었는데 그 아이와 친해지고는 나는 매일 하교 후에 공부를 핑계로 그 아이 하숙집에서 음악을 들었다.
그의 하숙방엔 '야전'이라는 포터블 LP플레이어가 있어 나는 그의 방에서 주야장천 음악을 들었다. 그 때문에 '밥 딜런'을 알았고 '피터 폴 앤 매리'도 알았고 그렇게 팦송을 깊이 있게 들었다. 그는 음악에 대해 빠삭했으며 나 같은 무지한 애에게 문화적 세례를 해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에게 탁구도 배워 그 후 나는 탁구도
꽤나 친다는 소릴 들었고 아무튼 거의 매일 그의 하숙방에서 음악을 들으며 그의 음악적 해설을 듣고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렇게 그와 친해지자 그는 자기 이야길 하기 시작했고... 정말 기가 막힌 가정사를 고백했는데...
그는 일본에서 태어나 국민학교 들어갈 무렵인 7살쯤에 어쩐 이유인지 어머님이 한국으로 와 어머니는 제주에서 재혼을 했다고 한다. 한국말도 못 하고 낯선 곳에 오게 된 그는 그때부터 눈칫밥을 먹으며 자랐는데 밖에선 한국말도 모르고 하니 아이들과 어울려 놀지도 못하고 집에선 새아버지의 눈치를 봐야 했고... 국민학교
3학년 무렵에 어머니는 급기야 새아버지의 눈치를 보는 아이를 분리하고자 국민학교 근처에 하숙을 시켰고... 제주에서 국민학교를 졸업하자 어머니는 어차피 같이 못 살거니 공부를 하려면 기왕이면 서울에서 공부를
하라고 서울로 전학을 시켜 중학교를 서울로 보냈다고 한다. 어린 나이부터 부모와 떨어져 살다 급기야 사춘기 때는 서울로 혼자와 살다 보니 좋게 말하면 스스로 독립적으로 자라게 되었으며 나쁘게 말하자면 부모의 손길 없이 자라다 보니 결핍된 부분이 많이 있는 것 같았다. 어쨌든 그는 고등학교를 우리 학교로 배정이 되어 나와 같은 반이 되었고 둘이 친해지며 나는 그의 하숙방에서 하숙집 아줌마의 눈칫밥을 먹으면서도 꿋꿋하게 매일 그 집에서 밥을 축냈다. 그때 음악적 세례를 그에게 받아 포크음악에 빠지게 되었고 록음악을 들었다. 그의 불우한 가정사는 우리 집에서도 알게 되어 그는 마치 또 하나의 아들처럼 우리 집에 드나들며 우리 집에서도 친하게 되었고 우리 누나들을 잘 따르며 누나가 없는 그는 우리 집을 너무 부러워했다.
우리 어머님도 그 친구를 이뻐했다.
그리고 학년이 바뀌었고 나는 무슨 일인지 그와 뜨악한 사이가 되었고 복도에서 만나면 그냥 인사나 하고
그냥 툭 치고 지나는 무심한 사이가 되었다. 그런데 그 반 담임선생님이 나를 찾는다는 소리에 교무실로 가자
그 담임선생님이 나더러 그 친구가 지금 학교를 장기간 무단결석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집을
아는 애가 없어 수소문하다 보니 내가 친했다고 들었다고... 그러니 네가 그 애 집에 좀 가보라는 거였다. 그땐 핸드폰이 없을 때라 그렇게 직접 찾아가는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나는 그의 하숙집엘 갔으나 그 하숙집에선 그 학생이 방을 빼서 이사간지 꽤 되었다 하고 어디로 이사를 간지는 모른다는 거였다. 막막했다. 그러나 며칠이 또 지나고 어찌어찌 수소문했는지 기억은 안 나지만 그 새로 옮긴 하숙집을 찾아냈고 내가 그 하숙집엘 갔더니 문을 열어주는 하숙집 주인아주머니가 날 반기는 건지 이제 살았다 안도를 하는 건지... 왜 이제야 찾아오냐고... 역정을 내듯 나를 맞이하는데... 주인아주머니의 말을 들어 보니 학생이 얼마 전부터 빌빌 대고 앓더니 식사도 제대로 못하고 방에서 일어나질 못하는데 집에 연락을 해보자니 집에 연락을 못하게 하더라는 것이다. 그럼 누구에게라도 연락을 해야 할거 아니냐... 고 해도 고집을 부리며 방에서 혼자 앓아누워 있다는 것이다. 나를 보더니 자기 이러다 여기서 초상 치를 뻔했다며 내게 목소리를 높이며 이야길 하는 것이다. 기가 막혔고 아주머닌 이제 자기가 초상은 치르지 않아도 되었다며 큰 소리로 말을 했다. 아무튼 내게 원망과 함께
한시름 놓는다고 하며 그의 방으로 나를 안내했다. 문을 열자... 다 죽어가는 환자가 있었는데.... 마치 영화에서 보는 폐병 말기 환자처럼 햇볕을 못 봐 선지 얼굴은 허옇게 떴고 밥을 못 먹어 영양결핍인지 얼굴엔 버짐이 다 덮여 있고 눈은 다크서클이 퀭하니 깊게 파였고 머리는 부스스 떡지고 광대뼈만 튀어나온... 그야말로 시체나 다름없는 아이가 누워있었다. 하숙집 아주머니 말로는 자기가 약도 지어다 주고 했다는데... 아무튼 나를 보더니 아주머닌 한시름 놓는다는 표정이었다. 당시 가족이 아니 어머니가 곁에 있었다면 그렇게 두었을까? 너무 짠했다. 나는 학교에 와 담임선생께 그 이야길 했고 다음날 담임선생님과 내가 다시 찾아가 그 애를 병원에 입원시켰다. 무슨 병이었는지는 기억에 없지만 그 애는 그 후 다시 학교에 나왔고 나와는 다시 데면데면한 사이로 그냥 시간이 지나고 졸업을 해버렸다.
그리고 몇 년이 흘렀는지 80년대 초반인가? 서슬 퍼런 전두환시절... 설날 아침 떡국을 먹으며 조간신문을 펼치니... 사람 찾는 광고(옛날엔 신문광고란에 사람을 찾는다는 광고를 올렸었다)에 그가 올라왔다. 그의 어머니가 광고를 낸 것 같았다. 아무튼 충격이었다. 실종인지... 행방불명인지... 애타게 찾고 있다는 광고 기사였다. 그 기사를 보자 지난 시간을 생각하니 미안하기도 하고... 나라도 그 애에게 가족으로서의 정과 사랑을 주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이 몰려왔다. 그는 우리 집의 여러 형제들과 부모님이 다 계신걸 그렇게 부러워했었다. 하지만 세월은 무심히 또 흘렀고 나는 학교를 졸업했고 사회로 나왔다.
그리고 세월이 또 흘러 80년 중 후반쯤... 어느 해인가 놀러 가려고 서울역에서 기차표를 예매하러 갔다가 우연히 누군가와 눈이 마주쳤는데... 그였다. 서로 놀라서 긴가민가 하며 서로 얼굴을 보며 멍한 표정으로 다가가 서로 확인을 하고는 저녁을 먹으며였는지 차를 한잔 하며였는지... 그간의 이야기를 했다. 그간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또... 지난한 세월을 살아왔고 역시나 평탄하지 않은 날들이었다. 그는 고교를 졸업하고 서울 동대문 시장에서 장사를 배웠다고 한다. 무슨 장사였는지는 기억에 없고 그때 조금 모은 돈으로 어머님께도 부처드리고 했는데 그의 이부동생- 그의 어머니와 새아버지지 사이에서 태어난-의 고교졸업식에 가서 사진을 찍었고 그게 자신이 가족과 함께 찍은 유일한 사진이라고 했다. 그가 나중에 들은 얘기로 아버지께서는 자기 아들 졸업사진에 나온 이 젊은이(내 친구)는 누구냐고 물었다는 소릴 듣고 더 절망을 느꼈고 아무튼 세월이 흘렀어도 아버지는 그를 아들로 여기지 않아 그는 제주에는 다시는 가지 않고 어렵게 살아왔다고 한다. 그 후 다시 한번인가 만나 우리 집에 데리고 가 어머님께 인사를 시켰더니 우리 어머니는 중풍을 앓고 있던 때라 예전 기억을 잃어버려 그 친구를 알아보지 못하셨다. 그리고 사는 이야기를 들어 보니 또 기구한 날들이 계속되었고 돈을 조금 모으자 사기를 당했다고 했는지 어찌했는지 또 어려움을 겼었고 지금은 그냥저냥 어찌어찌 살아가고 있노라... 했다. 건강은 그냥 뭐 그렇다고 말하는데 그다지 좋아 보이지도 않았다. 그 후 다시 만나자는 약속은 그게 마지막이 되었고 다시 시간이 흘러 35년도 훨씬 넘게 흘렀다.
지금... 그가 잘 살고 있는지... 어쩌고 있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