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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녕 Jan 30. 2023

'꽃보다 남자'와 '흔한 남매'

만화책은 억울하다

흰 천과 바람만 있으면 어디든 갈 수 있어


2009년 방영된 드라마 '꽃보다 남자'의 지후 오빠가 말했다.


흰 천과 바람만 있다면 어디든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던 낭만 가득한 중학교 시절, 만화책 대여점에서 F4를 처음 만났다. 만화책 '꽃보다 남자'는 예민한 사춘기 감수성을 채워주는 영혼의 떡볶이와 같은 존재였다.


솔직히 감수성을 위로해 주기엔 내용이 좀 막장이다.

하지만 원래 막장 드라마가 시청률이 잘 나오는 법이니까. 아는 맛이 무서운 거고.

그렇게 친구의 손에 이끌려 우연히 들렀던 만화책 대여점에서 막장의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되었다. 



어릴 적 하루 벌어 하루 먹고살기 바쁜 부모님 밑에서 자랐다. 당연히 자식의 교육은 학교 보내 놓으면  알아서 하는 것이었다.

무슨 책을 읽어야 좋은 것인지, 자식이 어떤 걸 좋아하는지 대화를 하기보단 전집 판매원의 속살거리는 말 더 신뢰했다.

위인전을 읽어야 그들의 삶을 본받아 공부를 잘한다는 말에 덜컥 들여온 전집 한 질.

위인들의 삶이 재미있어 봤자지,  읽고 교훈을 얻어야 했기 때문에 내용은 딱딱하고 지루하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다른 책을 읽고 싶었지만 그 책이 얼마나 비싸게 주고 산 것인지 아느냐며 본전 찾기가 우선인 부모님 덕분에 다른 책은 구경도 할 수 없었다.


도서관은 혼자 가기 멀었고 위인전기는 재미없고 꾸역꾸역 읽고 읽다가 결국엔 책은 지루 한 것 도장 꽝, 교훈은 커녕 책만 멀리하게 된 최악의 결과만 만들어 내었다.


그러던 차에 우연히 접하게 된 '꽃보다 남자'는 자극적이기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내 뺨을 친 건 네가 처음이야' 뻔하디 뻔한 설정을 날려주며 여주를 쫓아다니는 남주. 적당한 악역과 역경을 헤쳐나가는 주인공들의 이야기는 어디서 본 듯 만 듯 흔하디 흔한 내용이었다. 하지만 클리세는 영원다는 말이 있다.

고전 신데렐라가 아직까지 많은 이야기에 영감을 주는 이유는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클리세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세상에 이렇게 말초신경을 자극하는 짜릿한 세계가 있었다니 너무 재미있어 충격이었다.



꽃보다 남자

그렇게 꽃보다 남자를 시작으로 순정만화의 세계에 빠져버렸다.

중학교시절 동네마다 혹은 학교 앞에 하나씩 만화책 대여점이 있었다. 작은 책 한 권에 300원, 큰 책은 400원에 온갖 종류의 만화책을 빌릴 수 있는 그곳은 천국과도 같았다.


"오디션 새로 나온 거 봤어?"

"그거 구했어? 나 아직 못 봤어. 볼래 볼래 나 빌려줘"

그렇게 서로 대여해 온 만화책들을 교환해 읽으며 우정을 키워나갔다. 수업시간 책상 서랍에 넣어두고 필기하는 척 읽고, 쉬는 시간 교과서 사이에 껴 예습하는 척 읽었다.


운이 나 선생님께 들키는 날엔 로 압수였다.

빼앗긴 만화책을 돌려받으려고 교무실로 찾아가 사정사정하며 빌었다. 세상 불쌍한 척. 두 번 다시 그러지 안겠다고 다짐받고 받아오던 그 자리엔  내 것이 아닌 다른 누군가가 빼앗긴 만화책들이 쌓여 있었다. 얼굴은 모르지만 은 처지가 될 친구들에게 동질감을 느끼기도 했다.


[아시아경제 조민서 기자]한때 골목마다 있던 DVD·만화 대여점(이하 대여점)들이 동네에서 자취를 감추고 있다. 남아있는 가게들도 폐업 수순을 밟는 곳이 대부분이다. DVD 대여 부문은 '인터넷 다운로드'에 밀려 수익을 포기한 지 오래고, 만화 및 소설책 대여 부문은 스마트폰, 태블릿 PC, 전자책 등에 설 자리를 잃고 있다.


시간이 흐르고 책 대여점이 하나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추억이 깃든 공간이 사라지는 것은 마음 아팠지만 삶이 바빠지면서 자연스럽게 관심은 멀어졌다.



"아니 이게 몇 번째 읽는 거야 지겹지도 않니"

"이게 얼마나 재밌는데 계속 봐도 안 질려 이번에 흔한 남매 10편 나왔다는데 그것도 사주면 안 돼?"

더 이상 만화책을 읽지 않음에도 만화책은 삶 가까이에 있었다.


"그거 그만 읽고 동화책을 봐. 집에 책이 얼마나 많은데 그것만 봐"

"싫어, 이게 더 재밌어"

복장이 터졌다. 읽으라고 사줬지만 너무 그것만 읽는 거 아니니.

여러 가지 책을 읽고 싶었지만 읽을 수 없었던 어린 시절 생각에 장르별로 책을 제공해 주어도 결국은 흔한 남매 책이었다. 


무엇이 그렇게도 재밌는지 낄낄거리면서 본다.

"엄마, 국어로 이행시 지어볼게 한번 불러봐 봐"

"국", "국물을 마시면"

"어", "어휴 시원하다"

"푸하하, 그런 건 어떻게 알았대"

"응 흔한 남매 책에 나와"

아, 그렇구나 재밌긴 재밌네

출처 : 알라딘

세월이 흘러도 만화책은 여전히 구박덩어리이다.

엄마들이 모인 곳에는 만화책만 읽는 아이에 대한 고민이 항상 나왔다.

학교 담임선생님은 만화책을 학교에 가져오는 것을 자제하게 해 달라는 알림을 보내셨다.

나 또한 항상 몰래 보았다. 어른들이 좋아하는 공부에 도움 되는 활동은 아니었으니까.

학교에서는 몰래 읽다 빼앗겨 벌도 서보았으니 만화책은 그때나 지금이나 공공의 적이었다.

이쯤 되면 만화책도 억울할 법하다. 재미있는 게 죄인가. 


"만화책 덮어. 좀 그만 봐. 넌 맨날 만화책이니" 독서를 만화책으로 하는 아이에게 울컥 짜증을 냈다.

순간 기시감이 들었다. 개구리 올챙이 적 생각 못한다더니 꼭 그 짝이었다.

재미있는 걸 읽지 못하게 한다며 입이 부루퉁 해졌다. 만화책만 봐도 똑똑해졌으면 좋겠다고 투덜거린다.

그 마음 내가 정말 잘 알지. 암, 그게 재밌긴 재밌어.

공부가 만화책처럼 재미있었음 너나 나나 삶이 행복했을 텐데.

혼자 픽 웃다 화들짝 표정을 지우고 "그거 까지만 보는 거야" 하며 짐짓 엄하게 얘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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