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히든 아이덴티티' / ‘생상스’ 교향시 <죽음의 무도>
겨울에는 접근하기 쉽지 않은 외딴 곳의 한 정신병원, 그곳에 졸업을 위해 마지막 단계를 거쳐야 하는 옥스퍼드 의대생 에드워드가 도착한다. 이곳에서 뭔가 의심스러운 행동의 병원장 ‘램’을 대면하고 아름다운 여인 ‘일라이저’를 만나 사랑에 빠지지만 그들은 모두 병원을 점거한 정신병자들이며 실제 병원을 운영하던 간호사들과 병원장은 지하에 감금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는데…….
이야기의 전개로 보아 왠지 음산한 곡조 하나쯤은 깔려야 할 듯 한데 마침 딱 맞춤의 선율이 등장한다. 19세기를 떠나보내고 20세기를 맞이하는 축제의 날, 병원을 점령한 그들은 함께 춤추며 모든 낡은 것을 태워버리는 의식을 준비하고 그런 가운데 어지럽게 빙글빙글 돌아가는 그들의 춤에 맞춰 흐르던 곡이 있으니, 바로 프랑스 작곡가 ‘생상스’(Camille Saint-Saëns, 1835~1921)의 교향시 <죽음의 무도> (Danse macabre, Op.40)이다.
세 살이라는 믿기 어려운 나이에 작곡을 시작했다는 생상스, 그는 프랑스의 모차르트라 불릴 정도로 음악에 있어 뛰어난 재능을 보이며 <교향곡 3번 '오르간'>(Symphonie No. 3 Op. 78 ‘Organ’), <서주와 론도 카프리치오>(Introduction et Rond capriccioso Op 28), <피아노 협주곡 제2번>(Piano Concerto No. 2), <죽음의 무도>(Danse macabre), 그리고 널리 알려진 <동물의 사육제>(Le carnaval des animaux) 등의 명곡을 남긴 프랑스 낭만주의를 대표하는 작곡가다. 이 중 영화에 흐르던 <죽음의 무도>는 그의 교향시 중 가장 성공적인 작품으로, 헝가리의 작곡가 ‘리스트’(Liszt)는 이미 30 년 전 자신이 지은 같은 제목의 곡이 있음에도 불구 생상스의 것에 경도되어 피아노 솔로 곡으로 편곡, 곡의 인기에 일조하였다. 우리에게는 국민 스케이트 요정 김연아의 쇼트프로그램 곡으로 기억되어 더욱 친근한데 이는 이러한 이벤트가 하나의 곡을 알리는데 얼마나 효과적인지를 다시 한번 돌아보게 한다.
작품은 프랑스의 시인 ‘앙리 카잘 리스’(Henri Cazalis)의 시를 따라 움직인다.
지그, 지그, 지그, 죽음의 무도가 시작된다. 발을 박차 무덤을 나온 죽음은,
깊은 밤 춤을 추기 시작한다.
지그, 지그, 재그, 바이올린 선율을 따라,
겨울바람 불고 밤은 더욱 깊어 가고,
린덴나무로부터 들려오는 신음소리.
하얀 해골이 자신의 수의를 펄럭이며,
음침한 분위기를 가르며 나아간다.
지그, 지그, 지그, 해골들은 껑충이며 뛰어다니고,
들려오는 춤추는 뼈들의 부딪치며 덜걱거리는 소리.
이끼 위에 앉은 음탕한 연인은,
기다란 타락의 희열을 만끽하고,
지그, 지그, 지그, 죽음은 끊임없이
자신의 악기를 할퀴며 연주를 한다.
중략
“하지만 쉿!" 갑자기 춤이 멈춘다.
서로 떠 밀치다 날래게 도망친다. 수탉이 울었다.
아, 이 불행한 세계를 위한 아름다운 밤이여!
죽음과 평등이여 영원하라!
작곡가 생상스는 이러한 시의 흐름에 따라 깊은 밤 벌어지는 광란의 춤과 이윽고 허무하게 사라져 가는 광경을 기괴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음악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곡은 12시를 알리는 하프의 짧은 스타카토로 시작한다. 이어 해골들을 무덤으로부터 일으키는 인상적인 악마의 바이올린 선율이 들려오고, 이제 이 기괴한 해골들의 왈츠는 스페인풍의 리듬과 함께 휘몰아치며 점차 고조되어 나가다 마침내 절정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다 들려오는 수탉의 울음 소리, 이는 <동물의 사육제> 중 ‘암탉과 수탉’ 주제를 사용한 작곡가의 음악적 위트로 그렇게 오보에가 아침을 알리며 죽음의 무도는 조용히 끝을 맺는다. 이는 지난 밤 춤의 향연이 격렬하였기에 더욱 허무한 것으로 무덤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그들이 측은하여 등(뼈)이라도 두드려 주고 싶은 심정이다.
이러한 죽음의 무도는 음악에서뿐만 아니라 다양한 예술에서의 주제다. 하지만 이는 누군가에 의해 홀연히 등장한 것이 아니다. 전염병과 전쟁으로 늘 죽음을 가까이 두어야만 했던 중세 시절, 당시를 지내던 이들은 이러한 죽음에 대한 공포를 극복하고자 이를 평범한 일상이자 삶의 일부로 받아들인다. 그러다 심지어 희화화하기까지 이르러 무덤가에서 춤추는 유령과 해골에 얽힌 설화들로 전해져 내려오며 여러 예술 작품 등을 통하여 등장하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주제가 최고의 소재로 각광받던 낭만주의 시대 작곡가들이 이러한 훌륭한 소재를 가만히 내버려둘 리 없다. 하여 이에 영감을 받아 죽음을 주제를 한 작품들을 써 내려 가기 시작하였는데, 그 중심에 ‘슈베르트’(Schubert)의 <죽음과 소녀>(String Quartet No. 14 D. 810 ‘Death and the Maiden’), 리스트의 <죽음의 무도>(Totentanz), 그리고 영화에 사용된 생상스의 <죽음의 무도>가 있다.
여기서 또 하나 주목할 점은 왈츠라는 춤곡이 지닌 오묘함이다. 일반적으로 왈츠라고 한다면 오스트리아의 밝고 낙천적인 분위기와 ‘쇼팽’(Chopin)의 명랑한 타건이 연상되지만 살펴본다면 참으로 다양한 분위기를 전달하는 음악적 수단임을 알 수 있다. 러시아의 작곡가 ‘차이코프스키’(Tchaikovsky)가 남긴 3대 발레 속 왈츠는 오스트리아적인 향취를 품고 있으나 좀 더욱 우아하고 낭만적이며, 같은 러시아의 작곡가이지만 ‘하차투리안’(Khachaturian)의 ‘가면무도회’(Masquerade) 중 왈츠는 호전적이며 러시아적인 광활함이 배어 있다.
영화 <번지 점프를 하다>에 등장한 ‘쇼스타코비치’(Shostakovich)의 왈츠는 쓸쓸한 서정을 전하며, 영화 <올드보이> 속 '라스트왈츠'(Last Waltz)에서 들려오는 클라리넷 선율은 서글픈 것이다. 핀란드의 작곡가 ‘시벨리우스’(Sibelius)는 그의 작품 <슬픈 왈츠>(Valse triste)를 통해 떠난 자의 슬픔을 몽환적으로 그려내며, ‘라벨(Ravel)’의 <왈츠>(La valse)와 생상스의 <죽음의 무도>는 심지어 그로테스크한 분위기까지 표현해 내니 참으로 다양한 분위기를 선사하는 묘한 양식인 것이다.
영화의 첫 장면은 무척이나 불편하다. 치료와 연구라는 미명 아래 한 여인의 인권을 유린하는데 정신병자라는 이유이며 그 대상이 바로 일라이저인 것이다. 그러한 교수의 행동이 불쾌감을 선사했다면 그의 강의를 공책에 옮기는 학생들의 무감정한 서걱거림은 그들의 무표정과 함께 서늘한 공포를 안겨준다. 누군가는 큰소리로 그녀의 인권을 부르짖어 줄 것이라는 작은 희망이 그렇게 서걱서걱 사라져 가는 것이다.
이처럼 영화는 정상인이라고 칭해지는 자들을 향한 시선이 곱지 않다. 치료라는 이름으로 환자에게 고문에 가까운 실험을 일삼는 대학교수와 병원장 벤자민은 지금의 우리가 보기에도 더 정신병자에 가깝다. 반면 가짜 병원장이 되어 병원을 꾸려가는 ‘램’ 은 군의관 출신으로 전쟁터에서 상처를 입어 죽음보다 더한 고통에 괴로워하는 병사들을 보다 못해 권총으로 쏴 목숨을 거둬 간 인물로 자신도 그 자리에서 자살하려 하나 실패한다. 결코 잘했다 단언할 순 없다 해도 왠지 더 인간적이다.
그렇다면 정상이라 여기며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들도 미쳐 있는 것은 아닌가? 더 높은 곳에 도달하기 위하여, 더 빠르기 위해, 그런 와중에 타인을 돌아보지 않으며 아니 그럴 틈도 없이 앞만을 응시한 채 나아갈 뿐이라면 과연 정상인가?
“좀 느리면 어때”라고 한다면 정신병자 취급을 받을 것이고 “조금 못해도 돼” 하면 바보 같아 보이는 것이다. 그렇다면.
“램…… 다시 병원으로 돌아와 주세요.”
추천음반
프랑스적인 정취를 가장 잘 살린 연주로 지휘자 ‘다니엘 바렌보임’(Daniel Barenboim)의 녹음(DG, 1981)이 먼저 떠오른다. 평소에 강렬한 연주를 즐겨 하던 그는 이 곡에 있어서 만큼은 자신의 기질은 잠시 내려 놓고 모범적인 연주를 들려준다. 더불어 언급해야 할 연주로는 지휘자 ‘아서 피들러'(왼쪽 사진)의 것이다. 극적인 곡을 강렬하게 연주해 내는 데 있어 특화된 지휘자와 보스턴 팝스 오케스트라는 이 곡에 있어서도 변함없이 휘몰아치며 마치 깊은 밤 춤의 향연 한가운데 선 듯 온통 정신을 빼놓는다. 바이올린 독주를 맡은 ‘제롬 로젠’ 역시 이러한 밤의 무도를 주도하는 악마의 바이올린 소리를 제대로 할퀴어 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