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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하리타 Apr 27. 2023

32kg 이민가방과 한 여자

역시 이민가방은 좀 무리였나.

32킬로그램. 어지간한 힘으로 당겨서는 꿈쩍도 안 한다. 밀어도 본다. 가방은 조금 가다 비틀거리며 쓰러지려 할 뿐. 인터넷 최저가, 여자의 이민 가방 바퀴들은 자꾸 헛돈다.

패닉 하지 말자.

심호흡을 크게 몇 번 하고 자세를 이리저리 고친다. 여자는 프랑크푸르트 공항 입국장에 있다. 


지운이나 아라 언니한테 나와 달라고 할 걸 그랬나? 아니야, 괜히 번거로워. 이것도 혼자 못하면 앞으로 어떻게 해. 짐 좀 빼고 올 걸. 아니야. 이게 최선이었어.

여자에게는 마지막까지 담을까 말까 고민한 것들이 있었다. 어릴 적 사진 앨범들과 일기장 십여 권 따위. 갈무렸다 흐트렸다를 반복하다 결국 붙박이 장 가장 위 칸에 깊숙이 밀어뒀다.

여기라면 누구도 구태여 들여다보지 않을거야.


45킬로그램 나가는 여자에게 32킬로짜리 가방은 버겁다. 12시간 전, 3단짜리 가방은 3단까지 다 끌어올려진 채로, 빨간 '무게 초과' 스티커를 달고 항공사 카운터 뒷편으로 사라졌다가, 지금 그녀 곁에 다시 서 있다. 버거울 만큼 많은 담아 왔어도, 정작 제일 소중한 것들은 여기 담겨있지 않다. 

떠나는 여자에게 준, 가까운 사람들의 응원과 가불된 그리움. 일상의 다채로운 욕망들을 억눌러 모은 1400만 원. 한 달 뒤면 입학할 학교가 있다는 사실. 생존에 필요한 외국어 스킬.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어렴풋이 감지하고 발바닥에서 땀을 흘리던 누런 털 덩어리 개. 무엇도 이 가방에 있지 않다. 


이렇게 구태여 멀리 날아온 물건들은 무엇을 위해서인가. 옷과 책과 전동 워터 치아 세정기와 기타 등등.   ‘현지'에서 돈을 아낀다는 구실로 포장된, 자신의 동행이라고 여자는 생각한다. 익숙한 것들을 갑자기 한꺼번에 떠나면 악몽을 내리 꿀 것 같으니까.  배웅은 필요 없다고, 태연하게 서둘러 떠난 여자의 동행. 허전한 옆구리 옆 묵직하고 과묵한 이민 가방.


*

인터시티 트레인을 타고 프라이부르크 중앙역으로 가야 하는데.

어디로 가야 할지 여자는 방향을 좀처럼 찾지 못한다. 한 손은 가방 정수리 손잡이에, 다른 한 손은 퉁퉁한 옆구리에 받치고 끈적한 달팽이처럼 100미터를 간다. 나타난 건 주차장.

패닉 하지 말자.

뒤돌아 반대편으로 이동한다. 기내에서 먹는 둥 마는 둥 했던 퍼석한 모닝빵을 그리워한다. 피곤한 몸은 한여름 열기에도 서늘하다. 입이 마른다. 잡아타야 할 기차도 예매하지 못했으면서 여자는 자꾸 서두른다. 가방 바퀴는 한참을 더 헛돈다. 지그재그 트위스트 터무니없이 큰 진흙덩이를 굴리는 외로운 쇠똥구리


여자는 마침내 본다. 기차역으로 이어진 긴 통로. 중간에 간이 매표소가 있다. 표 값 160유로. 소요시간 2시간 6분. 슈퍼-슈파-프라이스(Super-Spare-Preis)티켓이나 반 카드 25(BahnCard 25)같은 것은 아직 알지 못한다.  시커먼 가방은 화장실이 자리 잡은 통로 칸에 끼일 듯 꽉 들어찬다. 평일 오후인데도, 기차 안엔 사람과 짐이 가득하다. 그녀는 126분동안 서 있는다. 그 두 무릎 때문에 가방의 옆구리가 지그시 압박당한다. 


창문 너머로 보이는 풍경은 빨리감기되는 자연 다큐멘터리 같다. 자극을 받은 여자의 시신경은 과거로, 그만큼 빠르게 기억을 되감기한다. 떠나오기 전 몇 달 간의 기억이다.


유학 갈 돈을 모은다고, 정말이지 마지막 보루였던 학원강사가 되고 말았던 시간. 보습학원 심야 영업 단속법을 피해 10시가 넘으면 학생들과 맥도널드 2층에 앉아있던 시간. 배고픈 애들에게 세트가 아닌 단품 버거만 사주는 자기 자신을 싫어하던 기억. ‘택시비 지원'에 생색내던 고용주를 떠올리며 귀가택시에서 뱉던 말. ‘야근수당도 줘야지 인마. ’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끝나버린 시차 12시간 장거리 연애. 독일 대학원 합격 소식에도 걱정스러워 보이기만 하던 부모님 얼굴.  Study of  Purpose를 쓴다고 밤늦도록 깨어있던 날들. 새하얗게 빛나는 LED 등 밑에서도 곤히 자던 개. 외로워서 독서모임과 철학 스터디에 나가면서도 누군가 조금이라도 다가오면 물러서던 일들.

나는 곧 떠날 사람


그 시간들에서 여자에게 떠남과 도착은 잔뜩 부푼 풍선이었다. 정착이란 단어는 경쾌한 여름 샌들이었다. 여자는 리셋할 수 있다고 믿었다. 액티비스트와 학원강사, 귀촌 꿈나무와 유학 준비생, 레즈비언 연애와 가톨릭 집안의 딸...겹겹이 분열된 정체성들을 다 리셋할 수 있을 거라고, 떠남이 여자에게 달콤하게 손짓했다. 


*

기차가 중앙역에 닿자, 여자는 택시로 곧장 걸으면서 짧게 탄식한다.

오, 독일에선 택시도 벤츠구나.

가죽 냄새가 독한 이 벤츠는 갓 뽑혀나온 차가 틀림없다. 운전 기사도 그에 걸맞게 신참내기 같다. 창백한 피부에 작은 체구, 짧은 스포츠머리에 안경 낀 여자. 앞좌석 백미러로 엿보이는 그 얼굴이 영 불안해 보인다. 여자는 자신의 얼굴도 그에 못지 않을거라고 생각한다. 여자는 오랜 습관대로 미터기 숫자가 오르는 것을  지켜보고, 13.98에서 숫자는 멈춘다. 


트렁크에서 아스팔트 바닥까지 수직 30센티, 건물 앞까지 수평 50미터, 혼자 끌고 갈 수 없겠다.

여자는 기사에게 도움을 청한다. 저기까지 좀 같이 가주실 수 있나요. 기사는 언짢은 얼굴로 몸을 움직인다. 무안한 여자는 거대한 팁을 얹어 20유로를 건네고, 밤에는 오래  잠들지 못한다. 여자의 손목은 욱신거리고 마음도 욱신거린다. 


*

여자는 그 날 이후 여러 해가 지나도록, 그 가방을 여전히 간직한다. 간직만 하지 않고 더러 사용한다. 계절이 바뀔 때마다 여름옷과 겨울옷을 바꾸어 넣는다. 3단 지퍼를 하나씩 열고 주름을 억지로 펴 가방을 세우면 패딩 롱코트까지도 전부 다 들어가고도 자리가 남는다. 끝도 없이 옷을 집어 넣으며 안심하다가, 지퍼를 주욱 닫고 똑딱 버클을 채우는 순간부터는 시름한다. 그 사이 여자는 48킬로그램이 되었지만 여전히 혼자서는 가방을 들지 못한다. 손잡이를 부여잡고 질질 끌 수 있을 뿐이다. 창고까지 계단을  오르거나 내릴 때, 가방의 금속 바퀴들은 퉁퉁퉁. 철커덕철커덕, 판결봉이나 수갑같이 엄중한 소리를 낸다.


여자는 가방을 이사할 때도 사용한다. 7년 동안 11번의 이사를 한다. 꽉 채워진 가방은 여자의 친구들 중에서도 특별히 힘이 센 이들이 나서야 옮길 수 있다. 그들은 양쪽에서 가방을 마주들고 가파른 3층이나 4층 계단을 오르면서 욕을 한다. 쉣, 이거 뒈지게 무겁네 (Shit, this is fucking heavy!)! 젠장할, 뭘 밀수하려는 거야? Damn, What are you trying to smuggle in? 웃으면서 터뜨리는 욕이다. 욕지거리를 하면서도 한사코 여자가 들지는 못하게 한다.


*

여자는 어느날 마지못해 인정한다.

저 가방 너무 싫어.

헛도는 바퀴들, 깊고 까만 PVC바닥을 여자는 싫어한다. 가방을 볼 때마다 언뜻 언뜻  인신매매나 토막살인 같은 단어를 연상한다. 싫어하는 물건을 내다 버릴 수 없는 것이 자신의 처지임을 여자는 문득 깨닫는다. 혼자 들 수 없는, 혼자 책임질 수 없는 가방을 간직하는 것이 이곳에서 자신의 삶 임을 여자는 깨닫는다.


풍선은 일찌감치 터졌고, 정착은 여름 샌들이 아니라 이민 가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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