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의 끝에 복기하는 비공식 코로나 브리핑 기록
참 오랜만이네요. 우리가 마지막으로 교신한 게 지구 시간으로 6달 전이니까요. 시간이 참 빨라요. 아 참, 이 말을 하면 당신에게 놀림받을텐데. 이런 말을 내게 했었잖아요.
“시간이 빠르다는 말은 내 평생 지구인한테서만 들어봤어요. 지구인의 자기중심적인 성향을 여실히 드러내는 표현이에요. 미안하지만 살짝 웃음이 납니다. 아, 상대성 이론을 통째로 부정하는 건 아닙니다."
우리가 처음 만났던 '제 13회 우주 우울경험자 컨퍼런스'에서 당신이 이렇게 말 걸었을 때, 난 빛의 속도로 당신을 '재수 없는 부류'로 분류할 뻔 했어요. 하지만 인간의 미세한 감정 반응을 분석하는 시계를 찬 당신은 재빨리 받아쳤죠.
"아니, 너무 성급하신 거 아니에요? 저를 좋아할 지 싫어할 지는 좀 더 대화해보시고 결정하시면 어떨지, 정중히 제안합니다."
그 격식을 차린, 하지만 당신 모국어의 억양이 묻어나 어색하게 들리는 말에 나는 웃어버렸고, 우린 그대로 대화를 이어가게 되었죠. 참 오랫동안.
이렇게 옛날 일을 떠올릴 때 쓰는 관용표현이 있어요. '추억이 새록새록하다.' 초봄에 언 땅에서 솟아나는 새싹처럼 푸르게 마음을 밝히는 기억을 뜻하는 거예요. 다음에 나랑 대화할 때 써먹어 보세요.
그나저나, 웬일로 먼저 연락을 다 했느냐고요? 근래 인류사회는 새로운 삶의 방식, 사회 시스템을 운영해오고 있어요. 당신도 알겠지만 COVID-19 바이러스 때문이죠. 그런 낯선 시간을 보내면서 당신을 자주 떠올릴 수밖에 없었어요. 지구의 관습이나 지구인의 습성에 관심이 많다고 했잖아요. 일에 영감을 준다면서.
자, 그럼 내 얘기를 들어봐요. 당신만을 위한 비공식 코로나 브리핑. 코로나에 대처하는 인간 유형 5가지. 먼저 감염병에 본능적 공포를 크게 느끼는 이들이 눈에 띄어요. '두려워하는 자'라고 부릅시다. 호흡기 바이러스에 취약한 질병을 앓고 있거나, 허약한 노인들, 약물치료를 받을 수 없는 임산부들이 코로나를 두려워하는 건 합리적인 일이에요. 이들에게 실제 하는 위협이니까요. 하지만 고위험군이 아닌데도 유달리 걱정하고, 나아가 패닉 상태에 빠지는 사람들이 있어요. 정부가 화장지를 일주일 치 비축하라고 권고했을 때 두 달치를 구하려고 온 동네 슈퍼마켓을 순회하고, 좋아하는 통조림 소시지를 구하지 못해 1박 2일 동안 깊은 우울감에 빠지죠. 방역마스크는 물론, 면장갑에 비닐장갑을 겹쳐서 끼고도 옆 사람을 곁눈질하며 힘겹게 거리를 걸어요.
서른다섯 살 된 친구 T가 '두려워하는 자'의 행동양식을 보였을 때, 나는 내심 놀랐어요. 평소 스트릿 뮤지션으로 노상 길에서 지내는 데다, 옷에서 냄새가 나도 잘 안 빠는 사람이라 내가 괜한 편견을 가졌던 걸까요? 박테리아에도 바이러스에도 무심할 거라고. 지금 그는 질 좋은 마스크 구입에 내내 열을 올리지만 외출이나 포옹을 꺼리진 않아요. 빨래도 여전히 뒷전. 이런 걸 보면 인간은 모순 덩어리에요. 전혀 일관적이지 않죠. '공포'같은 압도적인 감정들이 사고와 행동의 동력이기 때문이겠죠. 나는 '이성적'이라는 표현이 사전에서 사라져야 한다고 늘 주장해왔어요. 인간에게 불가능한 상태를 서술한, 공허한 형용사라서요. '두려워하는 자'들에게서 주의 깊게 봐야할 것은, 이들이 어떤 계기로 어떻게 '원망하는 자'가 되느냐가 아닐까 싶어요. 공포가 분노를 일으키고, 분노는 공격성이 되고, 공격성이 탓하고 혐오할 대상을 찾아 뻗어나가는 모습, 머릿속에 그릴 수 있나요?
원망하는 자들은 굳게 믿어요. 바이러스가 자기 삶에까지 영향을 끼치게 만든 원인 제공자가 있다고. 그를 단죄할 권리가 자신에게 있다고. 단죄해야만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다고 말이에요. 자신이 가진 힘과 자원을 이용해 '원인 집단'에게 일상적인 공격을 일삼는 거예요.
무슨 말인지 잘 와 닿지 않는다고요? 원망하는 자들은 산책하는 이웃에게 유리병을 던졌어요. 발코니에 나오지 말라고, 당장 이사 가 버리라고 소리를 질렀어요. 기차에서 마주친 낯선 이를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코로나'라고 부르며 낄낄거렸어요. 한 학기 내내 옆에 앉았던 동료 학생을 지목하며 '저 사람 때문에 출석할 수 없다'며 수업을 보이콧했어요. 원망과 공격, 따돌림의 대상이 된 그 이웃과 학생, 타인들 간에는 별 공통점이 없었답니다. 나처럼, 검은 눈 검은 머리 동양인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는 것 외에는. 그래요. 원망하는 자들은 단순했던 거예요. '중국발 코로나'라는 뉴스 보도에 지나치게 깊은 감명을 받고 말았어요.
원인 제공자'가 있다고 믿는 것은 '의심하는 자'들도 마찬가지에요. 이들의 의심은 다양한 곳을 향해요. 코로나 바이러스의 첫 발생 시기는 알려진 것과 다르다. 코로나 바이러스를 일부러 퍼뜨린 자들이 있다. 코로나 백신은 이미 나왔지만 그 사실은 비밀에 부쳐져 있다. 코로나 사망자 수는 조작되었다. 사회적 거리두기 정책에는 다른 목적이 있다…기타 등등.
의심하는 자들은 부지런하고 자료수집에 능한 것 같아요. 인터넷에 희귀한 정보들로 가설을 세우고, 온라인 커뮤니티에 모여 은밀한 토론을 연일 벌여요. 시민들이 안보는 새에 닫힌 문 뒤에서 역시 은밀한 토론을 벌이는 권력자들의 짓이라고. 경기침체를 일으키기 위해서, 백신 판매를 독점하기 위해, 불안심리를 조장하기 위해서. 빌 게이츠부터 김정은까지 평생 만날 일 없는 '권력자'들이 거대한 음모를 갖고 있다는 생각은 짜릿하긴 해요. 시간순삭 헐리웃 영화를 보는 것 같잖아요? 아이러니한 것은 이들이 좋아하는 음모론은 음모론을 퍼뜨리는 사람들 역시 또 하나의 음모론 프레임으로 바라본다는 것이죠. 음모론으로 음모를 꾸민다는 음모!
'의심하는 자'는 어쩌면 쉽게 '반항하는 자'가 될지 몰라요. 아침마다 내게 코로나에 관한 새로운 음모론을 알려주는 R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드네요. R은 코로나 이후 새로 생긴 정책과 규칙의 대부분을 쓸데없는 짓이라고 부정해요. '코로나는 흔한 바이러스 중에 하나일 뿐'이라고, '사회가 이렇게 까지 할 필요는 없다'는 말을 그렇게 까지 성실하게 매일 내게 전해오지요.
그는 할 수 있는 한 열심히 반항도 하고 있어요. 손수 마스크를 만들었지만 절대 쓰고 나가지 않죠. 대신 손수건을 절반으로 접어 코에 간신히 걸치고 다녀요. 건물 안에서 누군가 '마스크를 쓰세요!'라고 주의를 주면 낮게 으르렁거리며 곧 흘러내릴 손수건을 다시 올리죠. 아무래도 마스크는, 게다가 손수 만든 마스크는 너무 체제 순응적이니까, 스스로 용납할 수 없나 봐요.
R은 생일 파티도 열더군요. 스무 명 남짓 초대했지만 '두려워하는 자'들이 규칙을 어길 수 없다며 불참을 통보해왔어요. 흥,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더욱 의욕에 불타 파티를 준비했죠. 세심하게 대피 경로도 미리 마련해 손님들에게 주지시켰어요. 이웃 중 누가 불법행위로 자신을 신고할지도 가름해 보았죠. 아마도 1층에 사는 괴팍한 남자일 것이다. 자전거 도난에 대한 강박증 때문에 창고에 자물쇠를 이중으로 달아서 매일 자신에게 불편을 안기는 바로 그 자 일거라고! 파티 참석자들은 뭔가 낌새가 이상하면 우선 발코니 밖으로 머리를 살짝 내밀어 경찰차를 확인하기로 했어요. 경찰이 정말 출동했다면, 4층에 위치한 아파트의 지리적 이점을 활용해 신속히 대피할 수 있다는 계산이 나왔죠. 다락에 있는 빨래 건조실로 숨어들어가기로 했어요. 난잡하게 늘어진 열댓 개의 마가리타 칵테일 잔들을 보고도 경찰이 순순히 돌아갈까? 의문이 들었지만 난 속으로만 생각했어요. 난 반항하는 자가 아니니까요!
의심도 반항도 깊은 관심의 반증이라는 걸, 나는 매일 아침 코로나 브리핑을 아침식사의 배경음으로 들으며 절실히 깨달았어요. 아, 난 정말 귀찮아요!
아 참! 내가 전에 알려준 '텔레그램'이라는 메신저, 깔았나요? 당신을 초대하고 싶은 채팅방이 있거든요. 바로 '농담하는 자'들이 모여 있는 'Corona Meme Only (코로나 유머짤만)'라는 이름의 방이에요. 말 그대로 코로나와 관련된 유행어와 유머사진, 동영상만을 공유하는 곳이죠. 별의 별 개 다 올라와요. 빅토리아 시대 넓게 퍼진 여성복 드레스를 보고 '사회적 거리두기' 맞춤옷이라고 하는가 하면, 물총에 성수를 담아 멀찍이 떨어진 어린이에게 세례를 주는 신부의 모습도 있었어요. 팬티를 마스크처럼 뒤집어 쓴 남자의 사진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죠. '프랑크는 마침내 그의 속옷 페티시를 사람들 앞에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심각한 상황이니 절대 안 웃을 거야! 하고 다짐했던 사람들은 이 채팅방에 들어와서 서로 내기를 하면 되겠어요.
굳이 고르자면, 나는 '농담하는 자'로 살고 싶어요. 바야흐로 코로나 장기화 시대, 이 모든 불편과 불확실함, 그리고 이 거대한 집단적 모순 속에서 너무 깊이 절망하지 않고 하루하루 살아가려면 웃어넘길 줄 알아야 해요. 농담은 인간이 외계 모임에서도 고유한 능력으로 내세울 수 있는 정말 몇 안 되는 것이에요. 예로부터 가장 힘없는 노예도 부당한 권력 앞에서 농담함으로써 자기 존엄과 자유를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죠. 비록 단두대에 목은 잘려 나갔을 지라도요. 하지만 내가 '농담하는 자'로서 자질을 충분히 갖추었는지는 모르겠네요. 이 짧은 편지를 쓰면서도 나는 진지했으니까요. 몇 번 빙긋이 웃긴 했네요. 이마가 높이 75센티미터에, 눈동자는 자수정 같은 보라빛인 RF61, 당신의 웃긴 얼굴을 떠올리면서요.
아, 물론 농담입니다. 답장은 필수.
코로나 시대 지구에 대해 더 궁금한 게 있다면 내게 물어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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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구 행성 48° N, 8° E 에서
2020년 5월 30일 당신의 농담하는 친구 하리타 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