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장도 정리했고 첫째 아이는 내년이면 초등학교에 들어갈 예정이다 보니 우리 가족은 올해 말 정도에 도시로의 이사를 계획하고 있다. 내가 비록 농장의 행복한 경험을 글로 쓰고 있지만, 애들은 도시에서 키우고 싶은 마음. 이것이 현실이다.
문제는 우리가 도시의 아파트 값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다 보니 부모님과 합가 이야기가 나왔다. 도시라고 해봐야 서울도 아니고 수도권도 아니건만, 충청북도 OO군 OO읍에 전세 살던 우리에게는 광역시의 집값도 꿈도 못 꿀만큼 어마어마하다.
일단 부모님, 그중에서도
아버지는 찬성 - 순전히 손주들 때문인 듯. 아직 은퇴를 안 하셔서 애들이 하루 종일 집에 있는다는 게 어떤지 잘 모르심. 애들이 있어도 본인은 "아무것도" 안 해도 될 거라는 생각에 빠지신 듯.
어머니는 걱정 - 근데 솔직히 본인도 본인이지만, 주변에서 그렇게들 "대신" 걱정해줌.
아내는 걱정 반 기대 반 - 아마 가장 신경 쓰일 사람이지만 가장 도시로 가고 싶은 사람인지라 감수할 생각도 가장 많음.
아이들은 모두 찬성 - 그냥 넓은 집 최고! 무서운 아빠가 할아버지, 할머니한테는 꼼짝 못 하는 것을 보았음.
그리고 나도 찬성이었다. 일단 부모님의 집은 지리적인 접근성이 여러 곳으로 매우 좋으면서도 주변은 한적한 아주 특별한 조건을 갖추고 있고 평수도 넓은 아파트이면서 내가 결혼 전에 살던 곳이라 익숙한 동네이기 때문이다.
그 소식을 들은 주변인들은 하나같이 고부사이를 걱정했다. 누구는 요즘 시대는 어머니가 더 불편할 거다, 누구는 그래도 아직은 며느리가 더 불편할 거다며 난리다. 난 그런 이야기들, 특히 부모님 주변인들의 이야기들은 모두 흘려들었는데, 그렇게 걱정해주는 이들 중 아무도 그들 자녀들과 같이 살아본 이가 없기 때문이었다. 해보지도 않았으면서.
매주 주말마다 아내의 학원문제로 본가에 가면서 느끼는 건데, 같이 살면 내가 제일 고생할 것이다 아마. 애먼 사람들 걱정 마시라.
오히려 같은 아파트 단지에서 만난 어머니의 지인은 당신도 며느리가 아이들을 맡기러 일시적인 합가를 했다가 그게 지금 몇 년째 이어지고 셋째까지 생겼다면서 강력 추천을 해주셨다. 물론 불편하고 서운하고 힘들 때도 있지만 생각보다 불편하지 않다면서, 그게 사람 사는 거 아니겠냐면서.
어머니의 지인께서 어차피 바꾸지 못할 운명이라면 참고하시라고 책을 선물해 주셨다. <이봐, - 젊은이. 리틀콜드. 2020 책끝> 저자가 학창 시절 전학을 가게 되면서부터 시작된 할머니와의 동거이야기다. 친할머니와 단둘이 13년을 살아오면서 겪은 할머니와의 에피소드를 통해 어른들과 같이 살아본 경험자로서 어른들의 행동이나 생각, 어른들을 대하는 태도, 어른들이 젊은이들을 대하는 방법 등 일상에서 느끼는 어른들과의 불편함, 그것을 극복하는 팁, 그리고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법 같은 세대 간의 소통에 주안점을 둔 책 같았다.
어머니께서 "본인"은 다 읽으셨다면서 내게 전해주셨다. (사실은 아버지가 읽어 보셔야 할 것 같은데) 너도 읽어보면 도움이 될 거라면서. 동거인이 할머니인지라 완벽한 공감은 어려웠지만, 그래도 부모님을 매주 주말마다 만나는 나로서도 크게 공감 가는 부분들이 많았고 끝에 가서는 정말 여러 가지 생각이 들었다.
책의 말미에는 각 에피소드를 정리하는 생각의 글과 함께 우리가 함께 어른들과의 관계에 대해서 생각해 볼만한 질문들이나 문장들이 적혀있는 글쓴이의 "선물"이 있었다. 그중에서 16번째 선물은 (P. 301) "연상을 웃기는 노하우" (P. 224) 편에 나오는 이야기와 묶어서 저자가 이런 질문을 던진다. "연상(어른들)을 즐겁게 만드는 당신만의 노하우는 무엇인가요?"
노하우라니.
아니, 나는 굳이 "즐겁게" 만들어 드릴 생각조차 못했는데 노하우라니. 문득 최근에 어머니 아버지가 큰소리로 언제 하하 웃으셨는지 떠올리려고 해 보았으나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아이들 재롱이나 커가는 모습에 미소를 띠시지만 내가 그렇게 만들어 드린 것도 아니고, 그리고 그런 "흐뭇함"말고, "즐거움"을 드리는 일이라.....
그냥 도시에 나가서 좋은 동네에 있는 큰 집에서 살 생각만 하던 내게 경종을 울리는 글쓴이의 질문이었다. 어른과 함께 산다는 것은, 정말 많은 이해와 노력이 필요한 일이고, 마땅히 자식으로서 그리고 함께 사는 식구로서 신경 쓰고 책임져야 하는 부분들이 있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저자는 그리 어려운 일은 아니라고 했다. 관심 끊지 않기 (자주 뭐하냐고 물어보거나 하고 있는 일에 관심 가져 주기), 정겨운 말투로 대하기, 시원찮은 농담 건네기 등이 할머니를 웃게 만들었다고 했다. 참으로 소박한 할머님이시다.
그나마 아버지보다는 어머니가 편한데, 가끔 "엄마, 모해?"라고 물으면, 뭔가 꿍꿍이가 있는 사람 마냥 "왜! 왜 물어보는데!"라고 하시는데 마치 나의 10대 시절에 당하신 것을 이제와 앙갚음하시는 것 같아서 황당하면서도 웃기다. 그리고 죄송하다. 이제야 물어봐서. 이제야 관심 가져드려서.
오늘부터 진지하게 고민해 보기로 했다. 그리고 관찰해 보기로 했다. 어떤 때 나의 부모님은 즐거워하시는지. 무엇이, 나의 어떤 모습이 부모님을 즐겁게 해 드리는지. 그렇게 노력하고, 연습하고, 함께 살아가는 법을 배우기로 했다. 행복하기 위해서. 나뿐만이 아니라 우리 가족 모두가 행복하기 위해서.
아내에게는 오빠가 하나 있는데, 형님은 "매일" 점심시간과 퇴근시간에 장모님께 전화를 드린다. 식사는 하셨냐, 뭐 드셨냐, 별일 없으시냐, 등등. 점심 먹고 통화했으니 퇴근시간까지 별일도 없을뿐더러 요즘 코로나 때문에 집에만 계시는데도, 아무리 짧게 끊을지언정, 내가 결혼생활 내내 지켜본 중에 단 하루도 빠짐이 없었다. 수도권에 살고 계신 형님 가족은 한 달에 한번 정도는 꼭 와서 하루 자고 가기도 한다.
나는 그런 아들이 아닌데, 그런 아들을 매일 봐서 그런지, 내 아들은 그랬으면 좋겠다는 놀부 심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