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낭만곰돌이 Feb 02. 2021

작은 것들의 소중함.

작은 친절에서 얻는 자신감.

2011년, 내가 일을 하기 위해 처음 이 지역에 왔을 때 느낀 감정은 '사람들이 불친절하다'였다. 퉁명스러운 표정과 특유의 대충스러운 말투, 그리고 절대 먼저 인사하지 않는 서비스직까지. 올해로 정확히 10년, 강산도 변한다는 세월답게 지금은 많이 변했다. 그래도 여전히 가끔씩은 특유의 어색함을 느낄 때가 있다.


다만 세월이 변해서인지, 내게 여유가 생겨서 인지, 아니면 이제는 적응이 되서인지 불친절함이 이 지역 사람들 특유의 낯가림으로, 무뚝뚝함이 시크함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또 여러 사람들과 관계를 맺고 동호회를 비롯해 친분과 인맥이 생기고 나서 보니, 대부분의 무뚝뚝함은 낯가림이 맞다.




나는 천성이 모질지 못해서 인지 아니면 내가 그렇게 무시당하고 싶지 않은 성격이기 때문인지는 몰라도,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또 오세요."등의 인사를 받으면 - 아무리 그게 그분들에게 매뉴얼 대로인 형식적인 인사라 해도 - 대답을 꼭 해준다. "네, 감사합니다." "수고하세요." "안녕히 계세요." 또는 그냥 먼저 인사하고 나오는 경우도 많다.


어떤 때는 전화 상담원들과 통화를 종료할 때 서로가 습관적으로 "감사합니다."와 "네, 수고하세요."를 하다가 서로 감동에 겨워 연신 "네 정말 감사합니다 고객님." "아니에요 정말 수고가 많으세요." 하며 인사만 서너 번씩 한적도 많다.


대분의 경우는 내가 받은 서비스가 만족스러워서 자발적으로 나오는 인사이다. 아무리 내가 고객이라도, 아무리 그것이 그 사람의 직업이라고 해도, 누군가 나를 위해 친절히 설명해주고 팔릴지 안 팔릴지 모르는 불확실성 속에서도 나를 위해 시간과 노력을 집중해 준다는 것이 그저 고마울 때가 많다.


오늘은 내가 그 사람의 고객이었지만, 내일은 그 사람이나 그 사람의 가족이 내 고객이 될 수도 있는 것이기도 하지만, "고객은 왕"같은 손님 제일주의의 경제적, 서비스적 논리를 떠나서 작은 인사 한마디라도 상대방의 마음을 따뜻하게 한다거나 자신의 일에 보람을 느끼게 한다면 값진 인사라고 생각한다.


물론 나도 본의 아니게 진상고객이 되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때로는 아이들을 먼저 생각하다가 극성 부모처럼 보일 때도 있을지 모르겠다. 나도 모르게 내게 베인 어떤 습관이 다른 사람들을 불편하게 할지도 모르고, 다른 사람들 눈에는 나도 무뚝뚝하거나, 내 낯가림이 버릇없어 보일지도 모르겠다.




아버지는 골프를 치러 나가시면 항상 "오늘도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라고 손수 적으신 봉투에 캐디피를 넣어 중간 홀쯤에 드린다. 내가 아버지와 같이 골프를 치는 수십 번의 라운딩 동안 대부분 캐디분들이 비슷하게 반응하셨는데, "이렇게 손글씨까지 적어서 주시는 고객님은 처음이세요."라는 대답이었다. 심지어 많은 경우  캐디피가 봉투에 담겨있는 적도 없다고 한다.


부모님을 모시고 백화점이나 길거리 매장에 가면 설사 직원이 멀뚱이 서있더라도 아버지는 "안녕하세요."라며 마치 원래 알던 사람처럼 인사를 건네시는데 가끔 나도 헷갈릴 정도다. 내 아이들도 이런 모습을 보고 자란다면, 그런 아이들이 사회를 이루고 서로가 서로에게 작은 배려를 나눈다면 얼마나 살기 좋은 세상이 될까 생각해보았다.


돈이나 물질을 기부하는 것은 형편에 따라 부담이 되거나 어려울 수 있다. 또한 내 작은 도움이 딱히 누군가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되지 않을 것만 같은 경우도 많다. 그러나 어린이를 데리고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사람을 위해 문을 잡아주고, 택배기사님들에게 정중한 감사인사를 한다거나, 마트 계산원에게 수고하세요 인사 한마디 건네주는 것은 돈이 들지도, 딱히 어렵거나 힘든 일이 아니다.


나는 원래 이 글을 노트에 써두고는 제목을 "작은 친절"이라고 써놓았었다. 그런데 어제 읽은 "도리스 메르틴"의 저서 <아비투스>에는 이러한 행동들이 "교양"이며 이는 어렸을 때부터 습득되는 "문화자본"이라고 했다. 그리고 이러한 어린 자녀들의 문화자본은 대부분 유치원에서부터 배우는 것인데 얼마든지 훈련으로 습득하고 몸에 익힐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완전히 체화하게 되면, 우리에게는 자신감이 생기고 그러한 자신감이 어릴 때부터 이런 교양과 격식 속에서 자라온 상류층의 사람들과 높이를 같이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남들을 위해 문을 잡아준다거나, 이야기를 할 때 눈을 바라본다거나, 서비스 직원한테 친절히 대한다거나, 낯선 사람에게 가벼운 인사를 건넨다거나 하는 것들은 내가 미국에 처음 갔을 때 느꼈던 문화충격이자 그들에게 "매너"있는 행동들이었다.


자신감은 내가 성공한 다음에 누군가 나에게 내려주는 지위가 아니라, 나 스스로의 노력으로 쌓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교양이라고 하든, 친절이라고 하든 상대방을 배려하는 마음도 바로 자신감에서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저 사람은 나에게 인사도 안 하는데 왜 내가 먼저 해야 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예의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감이 없는 것이라는 것을, 나는 매번 먼저 인사를 건네는 아버지에게 배웠다.




부모님과 같은 교회, 부모님과 같은 직업, 부모님과 같은 후원회 등의 활동을 하게 되면서 항상 듣는 이야기는 "아버님이 참 훌륭한 분이시네요."이다. 나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던 사람도 "누구"아들이라고 하는 순간 없던 관심이 생기며 알은체를 한다. 한때는 아직까지도 "누구 아들"로만 불리는 게 싫고 벗어나고만 싶고, 빨리 성공하고 인정받아서 "누구 아버지"로 불리게 하는 게 목표 인적도 있었다. 지금의 목표이기도 하다. 다만 거기까지 가는 길이 조금 달라졌을 뿐이다.


<아비투스, 도리스 메르틴. 2019. 다산초당>의 [심리 자본] 편에서는 "오늘 우리가 경험하고 배우고 듣고 행하는 것이 내일의 우리를 만든다."라고 했다. 끊임없는 성장에 대한 욕구의 중요성을 설명하면서 어려움을 극복하는 회복 탄력성과 좌절 없는 노력, 성공에 대한 자신감등을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설명 중에 성공의 조건 중에는 격식과 친절도 포함된다고 했다.


저런 부모를 보고 자란 자녀들은 그렇게 되고 싶은 욕망이 더욱 강하고, 그러기 위해서 남들보다 더 노력한다고 한다. 어쩌면 나도 그래서 힘들어도 한발 더 내밀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저런 부모가 없더라도 내가 그런 부모가 되어준다면 내 자녀는 그런 심리 자본을 물려받아 성장할 수 있다는 의미다.


격식을 차리는 몸에 베인 예절과, 남들에게 조건 없이 베풀어 주는 작은 친절조차 우리가 물려줄 수 있는 값진 자산이 되는 것이다. 나뿐만을 위해서가 아니라, 나의 뜻을 이어갈 미래를 위해서 내 자녀와 자손들을 위해서라도 오늘부터 작은 친절을 베풀어 보는 것은 어떨까.


작은 인사가 모여서 더 큰 친절이 되고, 친절은 나눔이 되고, 나눔이 모여서 베풂이 되고, 세상의 어둠을 밝혀줄 뿐만 아니라, 내 앞의 미래, 내 뒤의 자녀들까지 밝혀준다면 해볼 만한 도전이 아닐까.




어머니께 이런 말씀을 드려서 감동을 드린 적이 있었다.


"내가 아버지께 받은 게 많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값진 것은,   

바로 한결같은 겸손함, 성실함,

친절함을 보고 자란 것입니다."


어릴 때 학교에서는 왜 그렇게 "가훈"을 적어오라 했는지 모르겠지만, 우리 집의 가훈은 "작은 것에도 충실하라."이다.


나의 작은 친절은 내 자신감이 되고, 내 아이의 작은 경험이 되고, 작은 경험이 모여 미래를 만들어 간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이들의 반대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