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마음 먼저 돌아보기.
오늘은 그냥 그러고 싶어서 아내와 함께 아이들을 어린이집과 유치원에 데려다주었다. 오랜만에 드라이브여서 그랬을까 들뜬 아내가 말했다.
"그래서 여보, 내가 사업 아이템을 하나 더 생각해 봤는데....."
"뭐라고? 나도 듣자. 더 크게 말해봐."
아내가 그동안 공부하면서 생각이 났던 어떤 사업 구상에 대해서 이야기하려는데 첫째 아이가 불쑥 끼어들었다. 우리 두 사람이 앞좌석에서 앞을 보고 말하는 데다가, 마스크까지 끼고 있으니 더 안 들리는 듯, 연신 더 크게 말해보라며 마치 벤처 캐피털 사장님같이 몰아붙였다.
결국 아내는 모든 걸 두 번씩 이야기해야 했다. 나에게 한번, 뒤를 돌아보고 아이에게 아이 눈높이에 맞는 설명으로 다시 한번. 그러더니 딸은 아내에게 해주는 나의 피드백 마저 자신에게 다시 이야기해달라고 했다. 하지만 찬찬히 설명해도 못 알아듣는 설명은 "안 들린다"며 보채는 아이 때문에 짜증이 밀려왔다.
"그런데 딸아, 너는 엄마 아빠 사업 이야기가 왜 궁금한데?"
"그냥 나도 듣고 싶어."
"너는 아빠가 오늘 유치원에서 있었던 일 좀 이야기해보라고 하면 기억 안 난다면서 하나도 말해주지 않으면서 왜 그렇게 아빠 엄마 보고만 너한테 열심히 설명하라고 하는 거야?"
"그건 진짜 기억이 안 나서 그러는 거란 말이야."
"오늘 아빠가 하원 할 때 물어볼 거야. 오늘은 잘 기억했다가 꼭 얘기해줘야 해. 네가 엄마 아빠 이야기 듣고 싶어 하는 거만큼 엄마 아빠도 네 이야기 듣고 싶어. 아빠가 꼭 지켜볼 거야."
집에 돌아오고 나니, 아이에게 그렇게 말한 게 후회가 되었다.
왜 굳이 나는 아이의 하루를 궁금해할까.
왜 굳이 아이가 집에 오자마자 물어보려고 했을까.
그 나이 아이들은 어떤 때는 잘 말하려고 하지 않거나, 또 어떤 때는 그만 좀 조용히 하라고 해도 조잘거린다. 순전히 제 기분대로인데, 어쨌거나 하루를 지내다 보면 스스로 제 얘기를 하거나, 소꿉놀이 시간에 유치원 선생님을 흉내 내거나 그날 있었던 수업을 인형들과 하기도 한다.
그저 묵묵히 듣다 보면 알 것을, 그저 묵묵히 바라보다 보면 느끼는 것을, 왜 당장, 내가 듣고 싶을 때 나는 듣고 싶어 했을까. 그리고 왜 굳이 아이의 단점을 끄집어내며 '너도 그러면서 왜 나에게 뭐라고 하느냐'라고 말해야 했을까. '너도 안 하니 나도 해주기 싫다'는 유치한 발상을 아이에게 부리고 나서 집에 돌아와 남는 건 후회와, 부족한 내 말솜씨에 대한 부끄러움뿐이다.
분명히 육아 책에서 그렇게 아이에게 무안을 주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읽었다. 아이가 관심을 가지고 함께 하고 싶은 마음이거나, 모처럼 엄마 아빠랑 셋이서 함께 하는 드라이브에 자연스럽게 함께 이야기하고 싶었을 뿐일 텐데, 아이도 아내의 사업구상이 그럴듯하게 들렸거나 뭔가 해주고픈 피드백이 있었을 수도 있는 건데, 우리가 보지 못하는 아이만의 엉뚱함이 기발함이 되어서 적용이 될 수도 있었을 텐데.
괜한 말싸움을 했다는 찝찝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와 책상 위에 올려진 책을 펼쳐서 읽었다.
"자꾸만 날 선 말이 쏟아진다면, 내 마음의 어느 곳에 날이 서 있는지 알아보는 게 첫 단계인 것처럼. 말을 만들어내는 마음을 살펴서 그 균열을 메우는 것, 그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당신의 말 그릇을 살핀다는 것은 말속에 숨어있는 자신을 이해하는 과정과 같다. 만약 당신의 말이 잘못되어 있다고 느낀다면 그 이유 역시 당신의 마음 안에 있을 것이다."
<비울수록 사람을 더 채우는 - 말그릇. 김윤나, 2020. 카시오페아.>
오늘 아침에 어머니 전화를 받았다. 내용은 아버지 회사가 코로나로 저하된 경기에 더해서 요즘 기승을 부리는 조류독감으로 인해서 너무나 힘들다고, 아버지께서 많이 힘들어하시니 이따가 만날 때 많이 예민하시더라도 그러려니 하라는 말씀이었다. 더불어 기도도 부탁하신다는 말씀도.
내 마음은, 아버지를 걱정하느라 예민해진 걸까, 예민한 아버지를 상대할 생각에 예민해진 걸까.
왜 내 예민함을 예민하게 아이에게 풀었을까.
수요일 아침에 묵직하게 목과 어깨가 결리기 시작해서, 이틀이나 잠을 제대로 자지 못했다. 2-3시간마다 깨서는 2-3시간씩 잠을 이루지 못하다가 다시 잠들고 또 깨고를 반복했다.
생각해보니, 수요일 저녁도 아이와 싸웠다.
색종이 여러 장을 테이프로 제본해서 나름 단어장이라고 만들었는데, 제목을 "새에 말"이라고 적어놓았길래, "새의 말"이라고 써야 한다고 지적해주었더니 토라진 아이는 계속해서 골을 부렸고 (우리 딸은 무엇이든 "틀린다"는 것을 매우 싫어하고 부끄러워한다), 조목조목 따져가며 한 번도 봐주지 않고 "네가 계속해서 글씨를 틀리게 놔두고 지켜보기만 하란 말이냐"며 말싸움을 했다.
색종이를 테이프로 제본한 것을 칭찬해 줄 수도, 단어장에 적혀있는 단어 선정에 칭찬을 해줄 수도, 색종이의 색깔 배합을 인정해주며 감탄해 줄 수도 있었다. 그 모든 칭찬이 끝난 후에 격려와 함께 제안 형식으로 잘 말해줄 수도 있었을 텐데, 우리 말싸움으로 나는 그 단어장을 표지밖에 보지 못했다. 딸은 부끄럽다며 단어장을 숨겨두고 보여주지도 않는다.
그저 내가 젖은 머리를 털어 말리다가 담이 결려서 예민했을 뿐인데. 딸과 나의 심리적 거리는 멀어졌다. 내 말 그릇이 좁아서, 내 마음을 내가 챙기지 못해서. 화를 내진 않았어도, 사사건건 따지고 들었고, 아이들이라도 이해해주지 못했다.
아이에게도 그랬는데, 아내에게는 어땠을까.
이따가 만나면 꼭 안아주고 일주일 동안 유치원에 다니느라 고생했다고 격려해줘야지. 그리고 그냥 들어주어야지. 나에게 무엇을 해달라고 하는지, 무엇이 필요하고 무엇을 느끼는지, 그리고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같이 하자던 색칠놀이도 해주어야지. 비록 아직도 결려서 고개를 숙이기 어렵지만 죽어라 해줘야지.
내 예민함이 아이를 상처 주지 않도록 내 마음을 일단 진정시켜야지.
그렇게 어제보다, 오늘 더 사랑해주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