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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행복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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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티 Feb 27. 2024

인생 후반부, 나찾기

 대충 윤곽만이라도 잡아보자

사실 옳은 말 좀 하고, 사리분별 좀 하고, 어떤 상황이든 눈치깨나 있는 그런 '배짱+엣지+쎈쑤'를 갖춘 여성으로서 자기고백은 참 쓰다. 도대체 나는 뭘 해야 좋은건지, 진득하니 시간을 잘 보낼 수 있는 방법이 뭔지 모르겠다. 이걸 하루이틀 한게 아니다. 그러니까 십수년전부터 나름 고뇌에 찬 사고를 거듭했더랬다. 


'나는 뭐여?' 

'내가 좋아하는 게 뭐여?'

'그러니까 일 말고 뭐허고 시간 보낼겨?'

'그렇게 많은 걸 해봐놓고 아직까지 그러고 있는겨?'

'진짜로 그렇게밖에 못혀?'

(충청도 사람이고 세상의 모든 사투리를 사랑한다)




UN이 아무리 청년이라고 기분좋은 말을 했다고 해도 나는 중늙은이가 다되어가는 50대 중반이다. 마음만 놓고 보면 UN이 맞다. 마음은 청춘이라는 말은 사실 '스스로는 젊다(정확히는 어리다)'고 생각하는 것인데, 더 솔직히는 아직까지 나도 어찌할바 모르겠는 일이 많다는 말이 맞다. 공자께서는 50을 지천명이라고 했지만, 시간을 좀 오래 살았다고 그렇게 성숙해지는 것은 아니다. 지혜도 나이와 비례하지 않는다. 휴일날 집에 있어 보면 어느새 하루가 훅 간 것 처럼, 살다보면 인생도 그렇게 훅 가고 있다. 눈깜짝할새 50이 넘었고, 그렇게 60, 70, 80을 넘길거란 건 안겪어봐도 알겠다.


우리가 종교처럼 숭상해왔던 유교사상에 의하여, 인간이면 마땅히 지켜야 할 다섯가지 인간관계 윤리인 오륜 중 하나인 장유유서 질서가 분명해서 우리는 아직까지 만나면 가장 먼저 나이를 따진다. 그래서 호칭을 형, 동생식으로 분별해서 부른다. 나이에 따라 질서를 매기는 방식은 참 이상하게도 끈질기게 남아있다. 오륜 중 장유유서 보다 앞서는 부자유친, 군신유의, 부부유별은 이미 구시대의 유물, 고리짝 같은 말로 치부한지 오래인데 말이다. 그러니까 "어린놈이!"라고 하면 예의가 없는 건방진 짐승들에 던지는 욕이다. 나이가 많다고 대접을 받겠다는 관념 속에는 나이만큼이나 경험과 지혜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나 살아보니 나이먹음에 따라 그렇게 대접받을 만한 중요한 가치를 축적하지 못한다는 걸 알겠다. 오륜의 상당부분을 이미 폐기처분한 시대에서 굳이 나이를 질서 삼아 모든 관계를 가족화해 형, 동생 처럼 따지는 것은 모순적이다. 그냥 나이와 상관없이 모두 같은 소중한 인격체로 대접하는 문화가 정착되면 좋겠다. 그런데 주제에서 또 벗어났다. 

       



하여간 언제 퇴직해도 이상하지 않은 나이가 되고 보니, '진정한 나의 취향'을 알아내는 게 과제가 되었다. 이러한 고민을 시작한 건 어언 10년이 넘었다. 부득이하게 이직을 여러번 했었고 비트윈 잡(between job) 기간을 보내면서 퇴직 후 나는 뭐할까를 많이 고민했다. 


'하루라는 시간이 온전히 계속 주어질 때 무엇을 하고 보낼 것인가?'

'취미생활만 하고 보낼 수는 없지 않은가?'

'이것저것 그냥 해보는 것, 도전해보는 것 자체도 의미있지 않나?'

'제발, 그 의미병은 집어치워!'


이렇듯 여러가지 생각이 소용돌이쳤다. 생각을 오래하는 것 보다는 행동으로 옮기는 게 더 편한, 잘 들이대는 기질의 소유자로서 무작정 닥치는대로 여러가지를 해보기로 했다. 나에게 맞는 그 무언가를 찾으리라. 그래서 시작한 것 중의 하나가 브런치다. 한번 시작하면 정신없이 하다가, 다른 것 시작하면 다 잊어버리는 기질 때문에 미술로 옮아갔다. 1년 쉬는 기간 중 얼마를 브런치에 글쓰는 데 집중했고 천에다 그림을 그리는 천아트와 색연필로 세밀화를 그리는 보타니컬아트를 시작하며 글쓸 시간을 확보하지 못했다. 꽃이나 나무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식물을 직관적으로 또는 세밀하게 그리는 작업은 재미났다. 집중하지 않으면 산출물이 나오지 않는 글쓰기를 병행하기란 참 어려웠다.




         

그렇게 시작한 그림 공부는 나한테 하나의 세계를 제공했다. 다시 일을 시작하고 난 뒤 더 몰입했다. 마침 직장 가까이에 예술회관이 있어 다양한 문화강좌를 접할 수 있었다. 유화, 수채화, 수묵화를 동시에 시작했다. 점심시간이든 저녁시간이든 가능한 시간을 모두 할애했다. 그러기를 어언 3년차가 되었다. 


요즘엔 훌륭한 화가들의 작품을 따라 그리면서 다양한 표현을 연습하고 있다. 오딜롱 르동의 정물화를 그리면서 고흐의 정물화를 같이 그려보는 방식이다. 고흐의 '아이리스'는 얼마전 시작한 그림이다. 지도 선생님은 큰 구획만 잡고 시작하면 된다고 했다. 그렇게 하는 게 맞나 하는 의심이 들고 도저히 제대로 된게 나올 것 같지 않지만 하다보면 다 나오게 되어 있단다.


그래서 1시간만에 바탕과 화병만 구분하는 칠을 했다.

 


일주일 후 여기에다가 윤곽만 잡는 작업을 다시 한다.




고흐의 '아이리스'를 세밀하게 들여다 보면 '이걸 어떻게 그리지'하며 낙담하기 쉽다. 하지만 이렇게 윤곽을 잡아 높으면 그림이 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진짜 제대로된 것을 완성하기에는 시간이 걸린다. 처음부터 디테일을 찾으려고 하면 시도하기 어렵다. 


그냥 대충 윤곽만 잡자. 그렇게 말해놓고도 나는 스스로를 의심한다. 나는 이 그림을 제대로 그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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