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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티 Jun 04. 2021

사표 쓰면 다음은 계약직입니다

알고 시작해야 할 대한민국 경력직

계약직의 쓴 맛


"나는 생계형이잖아요!"


생계형이란 말이 주는 무게가 너무 무겁게 느껴졌다. 이거 없으면 먹고 살기 어렵다는 말이니까. 직장 끈 떨어지면 온 가족이 굶주림에 허덕일 것 같은 그림이 눈에 그려지면서 애처롭기까지 할 지경이 된다. 어떤 직업이든, 심지어 괜찮아 보이는 일까지도 생계형이란 말 앞에는 따로 측정되는 저울이 있는 것 같이 깊은 삶의 무게감이 느껴진다.


같은 직장에 근무했던 한 팀장이 계약 만료를 1년 이상 앞두고 정부부처로 자리를 옮겼다. 그는 자신이 가장으로서 생계형 일자리를 유지하고 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생계인데 그렇게 대충대충 하느냐'고 나는 생각했다. 대충 하든 치열하게 하든 생계의 무게가 있어서 그런지 그는 계약 만료라는 압박감을 덜 느낄 때 일찌감치 자리를 옮겼다. 보기 드문 좋은 자리였다. 그냥 계약직이 아니라 정년이 보장된다는 것이다.


나도 똑같이 계약직이었다. 가장이 아니었던 나는 결국 5년 계약을 꾸역꾸역 다 채우고도 미련을 미련스럽게 떨치지 못하고 그 자리에서 나왔다. 뒤도 잘 안 돌아보는 '쿨의 대명사'로 자부했던 나에게는 정말 치명적 상황이었다. 나는 뻔한 상황극처럼 나가지 말라고 붙잡는 상사의 손을 뿌리치고 직장을 나온 경력이 두 번 있었다. 그러고도 한 번도 후회란 걸 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나답지 않게 정말 끈적거리며 질척였다. 이미 40대 중반을 넘긴 나이였고 집에서 출근할 수 있는 거리에서 이만한 직장을 찾기가 어렵다는 걸 알았다.


질척이기 시작하니 집착이 되었고 나중엔 원망이 되었다. 5년 계약이었지만, 정년까지 당연히 일해야 한다고 말했던 인사권자였던 본부장(그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의 허망한 말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지키지도 못할 약속을 했던 많은 사람들에게 원망의 화살을 쏘아댔다. 하지만 외부에서 수혈된 모든 계약직에게 똑같은 원칙이 적용되었다. 날짜가 다가오니 민망해서 또는 미안해서 눈길을 피하는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계약직의 쓴맛이 제대로 느껴졌다.




경력이 단절되셨네요. 뒤로 가세요


어떤 선택이라도 두렵지 않은 자신감이 넘치던 시절이 있었다. 나이가 중요한 원인으로 작용했던 것 같다. 사표를 쓸 수 있었을 때가 그랬다. 30대였고, 어떤 가능성이든 내게 있다고 생각했다. 누구한테 인정받은 건 아니었지만 가장 중요한 평가자인 내가 나에게 부여한 가능성이었다. 나는 스스로 후한 점수를 주었고 '긍정의 화신' 답게 미래를 장밋빛으로 바라봤다.


정규직 첫 직장을 10년 조금 넘게 다니고 사표를 썼다. 육아 때문이었다. 큰 아이가 초등학교에 입학하던 해 2월 말까지 근무했다. 3월에 입학하는 아이를 더 이상 돌봐줄 사람이 없었다. 초등학교 1학년들에게는 급식도 안됐던 시절이어서 아이를 초등학교에 보낼 때가 맞벌이 육아의 가장 큰 고비였다. 육아를 도와주던 시어머니가 가장 먼저 백기를 드셨고, 선택할 수 있는 다른 경우의 수가 별로 없었다. 일을 하는데 항상 적극적 지지자였던 남편도 오랜 주말부부 생활에 지쳐있었다.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나니 결정이 참 쉬웠다. 마음먹은 지 한 달 만에 퇴사자가 되었다.


일에 대한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생각해서 그런지 퇴사 8개월 만에 스카우트 제의가 들어왔다. 계약직이었지만 대학교 근무라 괜찮은 편이었고 경력을 살릴 수 있는 일이었다. 거기다 석사논문 준비를 하고 있던 차에 대학에서 일하면서 논문까지 쓸 수 있겠다는 '포부'로 마음이 부풀었다.(이 계획은 포부로 끝났다) 가족이 모여 살면서 안정감을 찾기 시작했기 때문에 이사를 할 수는 없었고 일을 하게 되면 주중에는 아이들을 남편이 혼자서 책임져야 했다. 나 혼자 떨어져서 주말부부를 다시 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남편이 찬성했고 시어머니도 도와주기로 해서 다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남편이 신경을 쓰고 시어머니도 알뜰히 챙기셨을 텐데도 아이들에게 너무 많은 티가 났다. 엄마의 손길은 아이들에게 정직할 만큼 곳곳에서 빈틈을 드러냈다. 큰 아이는 컴퓨터 게임에, 작은 아이는 TV 애니메이션에 지나치게 빠져있었다. 컴퓨터 게임을 하며 윗옷 카라를 잘근잘근 씹어대서 올이 나가 있는 아들 옷을 보아야 했고 물어뜯은 손톱은 너무 짧아져 있다. 결국 2년 차 계약으로 연봉 30% 인상이라는 좋은 조건을 포기하고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 이런 결정에는 아이들을 제대로 돌봐야 되겠다는 마음만큼이나 언제든 일을 다시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자신감도 상당 부분 작용했다.


그 뒤 9년이 지난 뒤 나는 다시 취업시장에 뛰어들었다. 중간에 논술학원을 해봤고, 대학에서 잠깐 강의를 했지만 스펙이 되는 데는 한계가 있었다. 그러니까 나의 경력단절 크레바스는 너무 컸다. 눈물겨운 경단녀 취업 전쟁의 시작이었다.


처음에는 '니네가 뭔데, 나를 서류에서 떨어뜨리냐!"라고 분개했지만 서류든 면접이든 떨어지는 일이 예사 일이 되었다. 많은 일자리를 알아봤지만 정말 단 하나의 정규직도 없었다. 계약직이라도 제발 일할 수만 있다면 물불을 안 가리게 되었다. 대한민국 경력직 취업 현실이 뭔지, 거기다가 경력이 단절된 여성의 취업이 얼마나 어려운지 절절히 알게 된 것이다.

   



몇번까지 도전하면 될까?


숫자를 세어보진 않았다. 정확히 기억이 나지도 않는다. 다만 경단녀가 취업을 마음먹고 쓴 원서는 엄청났다. 능력이 출중했던 직장 후배가 남편 따라 간 도시에서 재취업을 몇 번 시도하다가 포기하고 말았다는 얘기도 알고 있었지만 나는 나의 길을 갔다. 몇 번 해보고 말 거면 덤비지도 않았다. 자존감이 살짝 흔들리려고 했지만 한번 시작한 일이니 끝장은 일자리를 찾는 것으로 봐야 했다.


타도시에서 일해야 한다면 중학생이었던 딸아이를 데리고 가겠다는 마음을 먹고 근무지가 어디인지 따지지 않고 지원했다. 그렇게 면접 경험이 충분히 쌓인 후에 만난 직장이 집에서 출퇴근 가능한 공기업이었다. 인연이 따로 있다는 말은 직장에도 해당되는 것 같았다. 이 일을 만나려고 그렇게 많은 과정을 거쳤는가 보다 하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었다.


애초에 사기업에는 나같이 나이 많은 경단녀의 일자리가 존재하지가 않았다. 요즘에는 링크드인 등을 통해 일자리를 찾는 능력자들도 있는 것 같던데 나에게는 딴 나라 얘기였다. 그래서 공정한 경쟁을 해볼 수 있는 공공기관 등의 공채에만 집중 공략했다. 하지만 면접을 보고 있으면 눈에 안 보이는 내정자가 있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는 곳도 있었다. 공채가 형식적 절차 행위에 불과했던 것이다. 내가 들러리를 섰다는 기분이 좋지 않았지만 결과적으로는 이런 과정이 면접 경험으로 쌓여갔다.  


비교적 괜찮은 일을 공기업에서 잡을 수 있었던 것은 그때 그 자리가 났기 때문에 행운이었고, 포기하지 않고 계속 시도했기 때문에 노력의 산물이었다. 거기에다가 경단녀가 남성들이 도맡아 해오던 일을 비집고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남녀 또는 경력단절 기간 등을 따지지 않고 능력을 평가해준 사람들의 깨친 의식 덕도 있었다. 조직 내부에서도 "왜 여성을 뽑았느냐"라고 반발하는 분위기가 있었다는 것은 입사 후에 알게 되었다.

      


       

경력직, 허울만 좋은 자리가 태반


취업 시장에서 경력직이 많아진다는 얘기가 계속 나오고 있다. 그래서 학교를 막 졸업한 청년들이 취업할 곳이 줄어든다는 걱정스러운 얘기도 많다. 뒤집어 놓고 보면 논의의 대상이 되는 경력직은 청년들이 경쟁해야 할 일자리와 연관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까 길어봤자 경력 5년 내외의 젊은 사람들이 자신의 기술력과 경쟁력을 가지고 이직할 수 있는 곳이라는 것이다.


만약 10년 이상 경력이라면, 40대가 넘었다면 이직 시장에서 운신의 폭이 매우 좁아질 수밖에 없다. 우리나라 고용시장은 메이저와 마이너가 매우 분명하게 양분되어 있다. 메이저가 되는 길은 정규직으로 취직을 하는 것으로, 한번 편입되면 보장받을 수 있는 혜택이 많다. 특히 공공의 영역에서 거기에 들어가기만 하면 노동법에 나와있는 모든 혜택과 보호를 받을 수 있으며 높은 수준의 복지와 더불어 고용은 정년까지 안정적으로 보장된다. 능력이 얼마나 있는지 별로 상관이 없다. 그냥 진입하는 것으로 게임 끝이다.


메이저 노동시장에 들어가지 못한 사람들은 대부분 평생을 마이너로 살 수밖에 없다. 계약직을 전전하는 것이다. 이들에게는 1년이 왜 이렇게 빨리 돌아오는지 정말 이해가 안 간다. 돌아서면 또 계약을 해야 하고, 이들에게는 업무능력과 더불어 다양한 평가 잣대가 존재한다. 고분고분하게 업무수행을 잘했는지, 인사성이 밝은지 등도 평가받고 업무성과는 정량적으로 나타낼 수 있어야 한다. 그냥 잘하기만 하면 안 된다. 노조 등 이익집단의 보호를 받기도 매우 어렵다.  


우리 사회의 다양한 양극화가 존재하지만 고용시장 양극화는 상상 초월이다. 정규직 사다리에 올라타면 대한민국 최고의 노동자 보호 모토인 고용 안정성 혜택을 받지만, 그 사다리에 못 오르면 평생 고용 유연성의 희생로 이리저리 내돌리기 십상이다. 처음부터 사다리에 못 오른 사람과 더불어 첫 정규직 일자리를 나오는 경력직들도 어느 순간 고용 유연성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젊고 유능하거나 기술력이라는 무기를 지닌 베테랑이 아니라면, 어느새 고용시장 벼락 거지가 되었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낄 수도 있다.




퇴사하고 싶다면 냉정한 현타 필요


퇴사가 이 시대 최고의 트렌드가 되었다. "퇴사했어요"하고 인증사진 올리듯 퇴사 경험담들도 많이 공유되고 있다. 특히 공무원을 그만두었다 등 안정적인 일자리를 걷어찬 사람들은 더 큰 관심과 환호를 받는 분위기도 있다. 이들을 비판적으로 보는 것은 결코 아니다. 퇴사 희망자들에게 찬물을 끼얹거나 퇴사하지 말라고 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퇴사하고 난 후 마주칠 대한민국 고용 시장의 현실을 냉정하게 볼 수 있어야 한다. 미국에서 엔지니어로 일하는 동생은 일자리를 옮길 때마다 직급과 연봉이 지속적으로 올라갔다. 하지만 대한민국에서는 일자리를 옮길 때마다 직급과 연봉이 떨어질 가능성이 높은 게 현실이다. 무엇보다 불안정한 계약직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많다.


고용 안정성을 쥐고 있는 메이저가 계약직 마이너들을 일회용처럼 쓰고 있다는 것을 알고 시작해야 한다. 생계형 일자리를 유지해야 하는 사람들에게는 피 말리는 일이 아닐 수 없다.


고용시장의 가장 하위그룹에서는 경단녀들이 그것 조차도 감지덕지하며 일자리를 찾고 있다. 계약직 중에서도 마이너인 시간선택제, 대체인력, 기간제가 그녀들에게 할당된 몫이다. 그녀들도 처음에는 대부분 잘나가는 정규직이었다.   


           


# 위 이미지 : Pixabay의  Dirk Wouters님 이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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