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보다 내일 더 좋은 엄마 되기
다음주면 일본에서 소학교(초등학교)에 입학하는 딸을 위해 필요한 물건을 함께 사는 소소하지만 기억에 남을만한 시간을 가져야겠다는 마음으로 점심을 서둘러 먹었다. 20키로에 육박하는 아이를 자전거 뒤에 태우고 두 번의 가파른 언덕을 넘어야 도달할 수 있는 니시마츠야(아기 어린이용품점)에 가는 것은 각고의 결심이 필요하다.
무엇을 사야하나ㅡ 설레임으로 한 걸음씩 매장 입구부터 서서히 걸어 나갔다. 있는 물건을 버리지도 못하면서 또 새로운 물건을 들이는 일에 약간의 죄책감이 생겼지만 꼭 필요한 거니까 괜찮다고 속삭여줬다. 땡볕에 무거운 란도셀(일본의 초등학생 가방)을 메고 다닐 아이를 생각하며 모자를 하나 고르고, 한 켤레의 신발이 비에 젖을 경우를 대비해 심플한 단화 한 켤레, 그리고 비로부터 아이를 지켜줄 우산 하나를 카트에 담았다. 언니만 사줬다고 서운해 할 둘째를 위해 세일하는 것 중에 가장 예쁜 우산 1개, 똑같은 디자인의 한 치수 적은 단화 한 켤레도 함께 담았다. 분명 초등학교에 가는 자녀는 한 명인데 두 명 분을 준비하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집에 돌아와서 녹초가 되었다. 소파에 기대어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축 늘어져 허송세월을 보내다가 둘째를 데리러가는 시간까지 침범해버렸다. 평소보다 늦은 시간에 친정엄마에게 페이스톡을 했더니 대뜸 왜 이렇게 늦게 가냐고 타박이다.
"한나 초등학교에서 필요한 물건 사온다고 좀 늦었어."
애지중지하는 첫 손주를 위해 뭔가 했다고 하면 좀 핑계거리가 되겠지 생각하며 말했는데 더 퉁명스러운 대답이 돌아왔다.
"진작 사주지, 뭘 이제서야 준비하냐!!!"
안그래도 온 힘으로 산을 오르느라 피곤해 죽겠는데 친정엄마의 신경질적인 한소리에 기분이 상했다.
"그런 소리할거면 끊어!!!"
버럭 소리를 지르고 둘째를 데리러 나가버렸다.
자전거를 타고 가며 혼자 중얼거렸다.
"아니, 꼭 그렇게 말해야 해? 한나 학교 보낸다고 수고한다. 이렇게 얘기하면 얼마나 좋아!!!"
상한 기분이 달래지지 않아, 여느때처럼 혼잣말로 하고 싶은 말을 내뱉으며 속에 쌓인 울분을 토해냈다. 생각해보니 이건 내가 힘들거나 억울한 일이 있을 때마다 살기위해 혼자 터득한 방법이다.
보육원(어린이집)에 도착해서 선생님과 인사를 하고 현관으로 나왔는데 둘째가 따라나오지 않고 TV를 보겠다며 교실 문 앞에 우두커니 서 있다. 아무리 이름을 불러도 나오지 않는 아이가 순간적으로 미워졌다. '만화를 얼마나 보고싶겠어.' 둘째의 마음을 짐작하며 미움의 감정을 없애보려 했지만 친정엄마의 잔소리로 이미 감정이 심하게 상해버린 탓에 쉽사리 기분이 좋아지지 않는다.
둘째와 함께 집으로 돌아와 어째저째 저녁을 챙겨먹고 오늘 있었던 기분 나쁜 일을 남편에게 쏟아내고 나서야 서서히 안정감을 찾아갈 때 쯤, 첫째 딸이 나에게 다가와서 묻는다.
"엄마, 오늘 하루 어땠어?"
"한나 초등학교 가서 쓸 물건 사러 간 건 너무 좋았는데, 할머니가 엄마한테 늦게 산다고 뭐라고 해서 기분이 나빠졌어. 그래도 아빠랑 얘기하면서 기분이 점점 나아지고 있어."
"그랬구나, 엄마는 한 번도 나한테 그렇게 말하지 않았잖아. 근데 할머니는 왜 그럴까?"
딸의 한 마디로 끝까지 꽁해 있던 못내 서운한 마음이 사르르 녹았다.
어린 시절부터 친정엄마에게 긍정적인 피드백보다 세상과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메세지를 훨씬 더 많이 듣고 자란 나는 첫째를 임신했을 때, 간절히 좋은 엄마가 되고 싶지만 좋은 엄마가 될 수 없을 것 같은 슬픔에 눈물을 펑펑 쏟은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실제로 아이 둘을 키우면서 따뜻한 훈계보다 감정대로 분풀이를 한 날도 많다. 금새 후회하고도 또 울분을 참지 못하고 폭팔하기도 했다. 화난 게 아니라 가르쳐주려고 하는거라고 변명했지만 솔직히 화낸 게 맞다. 말해준대로 하지 않고 반복적으로 같은 잘못을 하는 아이들이 밉기도 했지만 그것보다 무엇이든 잘하고 싶은데 육아를 잘하지 못하는 자신에 대해 더 화가 났었다.
충분한 격려를 받지 못한 과거의 경험으로 인해 결핍이 있고, 나라는 사람 자체도 분노가 많은 사람이라는 자기인식을 하기 시작했다. 건강하지 못한 가정환경으로 자기 스스로를 비참하게 생각했던 과거의 나에게 설명해주었다. 부모님은 왜 그럴 수 밖에 없었는지, 너는 그들의 말이나 태도와 상관없이 그 때도 지금도 소중한 사람임을......
나 자신도 한 가지의 잘못된 습관을 고치기 위해 오랜 시간이 걸리는데, 하지 말라는 것을 계속 하는 아이들을 다그치지 말자고 다짐했다. 한 번에 하나만 가르치고, 단번에 고쳐지지 않는다고 바른 습관이 되기까지 화내지 말고 좀 더 기다려주는 엄마가 되기로 했다. 앞으로 백 번, 천 번은 더 말해야 될 수도 있다고 마음 먹고 "몇 번을 말해야 돼."라는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비록 처음부터 멋지고 품위 있는 엄마가 되지 못했지만, 불찰을 줄여나가며 '오늘보다 내일 더 좋은 엄마'가 되기로 했다. 부모로부터 온 좋은 것은 물려주고, 나쁜 것은 개선하며 살겠다고 호기롭게 시작한 결혼과 육아에서 헛스윙도 많았지만, 4번 타자라고 항상 홈런을 치는 건 아니지 않은가. 10개 중에 3개만 쳐도 3할대의 훌륭한 타자가 되는 것처럼 비록 실패도 있고 실수도 있을 수 있지만, 하루 하루 최선을 다해 살다보면 오늘이라는 타석도, 인생이라는 경기도 후회가 없겠다는 자신감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