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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온수 May 14. 2021

나 이제 X돼지 않았어!

늦은 생리로 프랑스 이민을 실감한 순간

예정일이 한참 지나도록 생리가 없던 참이었다. 프랑스에 도착한 지 2주가 조금 넘은 시점. 해외 이주를 준비하며 이어진 스트레스와 피로감에 입국 직후 아래에 조금 피가 비치긴 했었다. 이번 생리는 그렇게 지나가려나 싶기도 했지만 또 마음속 깊은 곳에선 또 불안을 떨칠 수 없었다.


터지면 짜증 나고 안 터지면 불안한 생리란 것.


나는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임신을 하기 싫어하는 사람일 것이기 때문에 우리는 피임을 절대 소홀히 하지 않는다. 2중으로 방어하고 한번 더 체크. 가능성이 정말 희박하다는 것을 머리로는 알고 있지만 왜 찌질하게 불안해하며 "그래도", "혹시나" 하게 되는지. 그건 아마도 그 만약의 상황을 돌이키기란 매우 어려운 데다 그게 내 미래를 송두리째 뒤집어놓을 수도 있다는 걸 알기 때문일 것이다.


그렇게 며칠간 "오늘도 생리가 없다고!" 하며 스테펜에게 온갖 짜증을 부리고 있었다. 그리고 어젯밤 잠들기 전 침대에서 내일 아침까지 소식이 없으면 아무래도 테스트기를 사 봐야겠다는 대화를 주고받았다. 그런데 스테펜이 갑자기 "아, 나 며칠 전에 네가 임신하는 꿈을 꿨어!"라는 얼토당토않은 말을 꺼내는 게 아닌가.


"너 내가 불안해하는 거 알고도 그런 소릴 해?" 난 화가 치밀어 등을 돌려 누웠다. 스테펜은 덜컥 놀라 사과하며, 그냥 개꿈이라고 생각하고 잊었는데 '테스트기' 소리를 들으니 갑자기 기억이 났다, 내가 왜 이 얘길 꺼냈는지 나도 모르겠다, 너의 불안을 자극할 마음은 없었다, 정말 미안하다, 또 어쩌고 저쩌고 등 뒤에서 주절거렸다. 허나 그 사과가 귀에 들어올 새도 없이 진짜 그럴 수도 있다는 근거들이 파도처럼 밀려왔다. 어쩐지 요즘 계속 이상하게 배가 아팠어. 식욕이 없고 단 게 당겼어. 어쩌면 그때 비쳤던 피가 착상혈일 수도 있어. X됐다. 가슴이 철렁했다.


빠르게 핸드폰을 들어 '프랑스에서 미프진 사는 법'을 구글링했다. 경구 임신중절약은 의사의 진단과 처방이 필요했다. 산부인과 진료를 예약하려면 또 며칠 걸릴 텐데 걱정하며 스크롤을 내리다가 아래 기사를 발견했다.


https://www.google.co.kr/amp/s/amp.rfi.fr/en/france/20200411-france-extends-access-to-abortions-during-covid-19-pandemic


기사는 프랑스가 코로나19 상황 내 여성의 자기결정권 보장을 위해 임신중절약 복용 가능 시기를 7주에서 9주로 연장했다는 내용이었다. 팬데믹으로 병원을 예약하는 게 더 어려워지기도 했고 사회적 거리두기 강화로 집에 머물다가 복용 시기를 놓칠 수도 있다는 이유에서. 또한 같은 이유로 전화 진료나 화상 진료로도 약을 처방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다.



나도 한국에서 코로나19 1년간 겪다 왔지만 이로 인해 임신중절에 대한 여성의 자기결정권이 침해되고 있다는 사실은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 전염병은  잡아도 인간의 권리를 꼼꼼히 보장하려 노력하는 나라.   프랑스.  기사를 읽던 1분은 내가 프랑스로 이민을 왔다는  가장 크게 실감한 순간이었다.  이제 생리 며칠 늦는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조마조마하지 않아도 . 만에 하나 테스트기에  줄이 뜬다고 해도  인생 X돼지 않았어.  이제  몸과 미래에 대한 온전한 결정권을 가지고 있어!


나는 한순간에 안심했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30초 만에 잠들었다. 오늘 아침의 테스트 결과는 음성이었다. 만세를 부르며 시작한 하루는 평소보다 하늘도 맑았다.


(한국에서도 여성의 안전한 임신중절을 보장하는 법과 제도가 빠르게 마련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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