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vs 프랑스, 제1차 동거 대전
약간은 갑작스럽게 동거를 시작하고, 나는 많은 싸움이 있을 거라 생각했다. 인터넷 세상의 기혼자들 말마따나 연애를 하는 것과 함께 생활하는 것은 다르므로. 하지만 사실 그렇지는 않았다. 우리는 생활 습관이 잘 맞는 편이었다. 맞지 않는 부분이 있더라도 현명하게 조율했다.
다만 돌이켜보면 몇 차례의 전쟁이 있긴 했다. 사실 가장 큰 문제는 식생활이었다. 우리는 식습관이 정말 달랐다.
나는 매운 음식을 사랑한다. 혈관 속에 적혈구 대신 캡사이신이 흐르는 타입의 인간. 직장에서 스트레스를 가득 쌓아 퇴근해서는 야식으로 맵디 매운 음식을 먹으며 짜증을 중화시키는 게 일상이다. 엽떡, 닭발, 매갈, 매족을 숭배하며 위벽을 제물로 바치는 순교자라 할 수 있다.
그날도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가득 쌓아 퇴근한 참이었다. 평소의 루틴대로 배달 어플을 켜 엽떡을 주문하려다 멈칫했다. 당시만 해도 스테펜은 진라면 매운맛조차 먹지 못하는 맵찔이였다. 그가 소화할 수 매움의 최대치는 육개장 사발면 컵라면 수준. 엽떡은 한 입도 먹지 못할 게 뻔했다.
물론 스테펜이 퇴근 후 스스로 파스타 같은 걸 만들어 먹을 수도 있었을 테지만, 당시의 나는 스테펜의 저녁 식사를 책임져야 한다는 약간의 강박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코로나로 주 2-3회 재택근무를 했다. 게다가 출근길이 걸어서 5분 거리라 사무실로 출근을 하는 날에도 귀가 시간이 6시 10분을 넘지 않았다. 하지만 스테펜은 마포구에서 강남구까지 매일 통근을 했다. 게다가 10시까지 출근해 7시에 퇴근하는 스케줄. 녹초가 되어 집에 돌아오면 8시 30분이 넘었다. 때문에 상대적으로 시간과 에너지가 많았던 내가 자발적으로 주중 저녁 요리를 담당했던 거다.
평일 저녁 식사 담당자로서 퇴근한 스테펜에게 엽떡을 들이밀 순 없었다. 결국 집 근처 중국집에서 짜장 짬뽕 세트를 시켰다. 그건 천 퍼센트 동거인을 배려하는 선한 마음이었다. 스테펜에겐 달달한 짜장면을 먹이고 나는 짬뽕을 먹을 셈이었다.
음식은 빠르게 도착했다. 상을 차리고, 비닐 포장을 벗기고, 짬뽕 국물을 한 입 입에 넣은 순간.
짜증이 밀려왔다. 짬뽕은 정말 맛이 없었다. 정말. 꽁꽁 싸매 놓은 우울이 폭발했다.
나는 왜 먹고 싶은 음식 하나 마음대로 못 먹지? 저번에도 매운 족발 먹고 싶었는데 얘 때문에 참았어. 돈 벌어서 떡볶이 하나 못 사 먹고, 이럴 거면 왜 같이 살지? 언제까지 내가 참아야 해? 내 스트레스 내가 풀겠다는데!
나는 분개하며 억지로 꾸역꾸역 면을 입에 넣었다. 배는 채워야 했으니까. 이 와중 짜장면은 꽤 맛있었고 그래서 더 뿔이 났다. 난 오늘 정말 힘든 하루를 보냈어. 매운 건 차치하더라도 맛있는 식사를 할 자격이 있다고. 그런데 왜 너만 맛있는 걸 먹는 거야? 식사가 끝날 때쯤에는 짜장면을 싹싹 비운 스테펜에게 화가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스테펜에겐 어떤 잘못도 없었다. 사실 배려랍시고 떡볶이 대신 짬뽕을 선택한 건 나였다. 엄한 사람에게 괜한 짜증을 내고 싶지 않아 그냥 입을 닫았다. 눈치 빠른 스테펜은 나의 저기압을 금세 알아챘고 내 표정을 슬쩍슬쩍 살피며 혼자 청소를 하고, 설거지도 하고, 고양이들의 화장실도 치웠다. 그런데 나는 눈 앞에서 왔다 갔다 하는 스테펜의 검은 티셔츠만 봐도 짜장면이 떠올라 열이 오르는 거였다.
그날 밤, 나는 더 이상 배려하는 파트너가 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