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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현 Sep 26. 2024

20240924

우리는 시간을 배달합니다.

시작하기 전, 이 글은 매우 길고 긴 호흡으로 작성되었기 때문에 가독성이 떨어지고 읽어내기 쉽지 않을 수 있으니 주의를 바란다.


그녀는 우리 중 단연 추진력이 가장 좋았다. 9월 초였던 걸로 기억한다. 너무도 팍팍하고 고단한 각자의 삶들로 인해 소강상태였던 단톡방에 멤버들을 소집하는 연락이 도착했던 게. 그렇게 우리는 만나게 됐다. 아주아주 오랜만에. (사실 엄청 오랜만까진 아닌데 이렇게 긴 호흡의 만남은 정말 오랜만이었음)


날짜가 픽스되어 캘린더에 적어놓은 이후로 애석하게도 너무 바빴다. 매일이 정신없고 머리가 띵해서 이게 내가 삶을 사는 건지 삶이 나를 질질 끌고 가는 건지 모를 정도로. 그렇게 정신없이 살았더니 어느새 다음날이 디데이라는 알림이 와있었다. 마음이 요동쳤다. 설레고 두근거렸어. 이런 감정이 어떤 말로 형용될 수 있을까. 그 감정을 느끼며 일하는 내내 생각했지만 답을 찾지 못했다. 나는 그래봤자 얼마 뒤 휘발될 감정일 뿐인 그 녀석에게 이름을 붙이는 것을 포기하고 이런 나의 감정을, 마음을 표현할 방법을 물색했다.


퇴근하자마자 운전을 했다. 마음이 급했다. 가장 가까우면서 퇴근하고 다녀올 때까지 영업하는 스타필드로 향했다. 조수석에 타있던 엄마는 그들이 너에게 어떤 존재길래 이렇게까지 하는 거냐고 했지만 나는 말했다. 엄마, 난 내 마음이 안 가면 안 하잖아. 마음이 가서 하는 거야.


급한 마음으로 러쉬에 들어갔다. 누가 봐도 게이 같은 남자애가 나를 응대했다. 사실 오기 전에 마음을 거의 정하고 왔지만 더 마음에 드는 게 있을까 싶어 추천을 요청했더니 대부분의 러쉬직원이 그렇듯 신나게 열정적으로 설명을 했다. 미안하게도 추천받은 제품은 하나도 고르지 않았다. 이거 이거 이거 주세요. 손을 씻고 가겠냐는 제안에 아 괜찮을 것 같아요라고 대답했다. 그때 내 머릿속은 너무 복잡해서 손 따위를 씻으며 제품 설명을 들을 여유 따윈 없었거든. 단지 그 선물을 받을 친구들에 대한 생각뿐이었다. 좋아했으면 좋겠다는, 마음에 들었으면 좋겠다는 어리지만 당연한 마음.


집에 와서는 편지를 썼다. 급한 마음과 퇴근 후 손목 상태가 합쳐져 글씨가 내 마음과 다르게 자꾸만 엇나갔다. 마음만 전해지면 되지,라는 생각으로 애써 무시하며 적어냈다. 각각의 선물에 내가 알아볼 수 있게 이니셜을 적고 그 이니셜에 맞는 편지를 넣었다. 준비는 됐구나. 알 수 없게 숨이 찼다.


우리는 평일 저녁 합정에 있는 퀴어 프랜들리 바에서 만났다. 4명의 퀴어가 모이기에 딱인 장소였다. 지하철에서 내려 약속 장소까지 걸어가던 그 시간이 얼마나 떨렸는지. 그 얼굴들이, 목소리가 자꾸 머릿속에 일렁거렸다. 짝꿍이 입만 열면 했던 '넌 진짜 N이구나'가 떠올랐다. 그 짧은 시간에 이런 상상을 하다니. 나는 미쳤지. 어 맞아 미쳤어. 지금 생각하면 나는 그때 미쳐있었던 것 같다. 우정에 미쳤었나?(개소리)


그대로였다. 모든 것이. 이것저것 나누다 보니 시간이 너무 빨랐다. 남은 시간이 아직 많음에도 지나가는 시간이 아쉬울 만큼. 그 시간을 허투루 쓰고 싶지 않았다. 흠뻑 즐기고 싶었다. 그 감각에 흠뻑 젖어서는 그 에너지로 한 달을 살아내고 싶었다.(과한욕심^^)

일정 때문에 늦참한 친구가 도착했을 때 준비한 스피치를 시작했다.

'아름다운 밤입니다, 신사 숙녀 혹은 그 어떤 존재 여러분.'으로 말문을 여는 나의 스피치가 시작되자 갑자기 눈물바다가 됐다. 조금 얼떨떨했다. 전혀 예상한 반응이 아니어서. 이거 울리려고 준비한 거 아닌데 왜 울어 얘들아.. (근데 사실 나도 울 거 같아서 안 울고 끝까지 잘하자는 다짐했음)


여기까지가 당일에 (약간은 취한 채로) 적어둔 글이다. 1시 넘어서 집 와서는 이럴 기운이 있었던 것 같진 않고 없는 기운에 이 감각이 휘발될까 봐 적었던 것 같다. 여튼 이틀이 지난 시점에서 약간의 코멘트를 남겨본다.


친구들은 나의 선물과 스피치 덕분의 최고의 하루가 되었다고 했지만(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연말 같은) 사실은 오히려 내가 더 좋은 에너지를 얻었다. 1년에 몇 번 만나지 못하지만 만날 때마다 너무도 반갑고 편안하고 충만한 사람들, 나의 말을 들어주고 공감해 주고 울어주는 친구들. 나는 그들의 언어에 매료되어 버린 것 같다. 그 친구들을 만날 때는 한 번도 내 모습이 아니었던 적이 없고 가면을 썼던 적도 없으며 내가 부정당할까 두려웠던 적도 없었다. 그대들은 나에게 그런 존재야.


너희와 함께할 때면 나는 정말로 고유한 이도현일 수 있었어. 너희와 있을 때면 나한테 이런 모습도 있었나? 하면서 나도 몰랐던 나의 의외를 발견할 수 있었고 이런 삶도 있구나 하고 위안을 얻기도 했어. 우리가 처음 만났던 2021년 겨울의 이도현은 너무 어렸지. 물론 지금도 어리지만 그때는 정말 너무 어리고 미숙하고 편협했어. 왜 다는지도 모르겠는 학교를 다니고 왜 어울리는지 모르겠는 친구들과 어울리고 왜 해야 하는지 모르겠는 것들을 하던 나의 세상에 캔라클은 큰 돌을 던졌어. 그땐 그 파장을 몰랐었는데 지금 생각하면 내 인생에서 어쩌면 가장 중요한 터닝포인트였는지도 몰라. 나의 세상이 너무도 작았구나. 학교 밖의 세상은 너무도 넓고 방대하구나. 이 넓은 우주에서 내가 어디에 소속되느냐는 크게 중요하지 않구나. 이런 것들을 느꼈어. 동시에 어디에도 소속되지 않고 싶다는 욕망도 함께. 그렇게 6개월쯤 뒤에 나는 학교에서 도망쳤고 무소속이 될 수 있었어. 내 생각만큼 쉽지는 않았어. 24시간이 온전히 내 손에 달려있다는 게 생각보다 아주 무서운 거더라고. 어떻게 얻어낸 자유인데 이렇게 허비해도 되는 건가, 그런 생각이 들 때쯤 너희를 다시 만났지. 그날 그 감각이 아직도 잊혀지지 않아. 이런 게 어른이구나. 삶은 이렇게 사는 거구나. 너희는 아니라고 할지도 모르지만 나는 정말 너희에게서 너무 많은 걸 배울 수 있었어. 삶을 사는 방식, 대하는 태도, 베푸는 다정과 온기까지도.


내가 이 우정을 얼마나 소중하게 생각하는지를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아마 말로는 형용할 수 없겠지. 그래도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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