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리안 에크렉티시즘 (Korean Eclecticism)
세계 어딜 가든 이제 브랜딩과 트렌드를 논할 때 대문자 케이 하이픈 (K-)은 코리아이다. K-문화, K-푸드, K-뷰티 등이 그 예 들이다. 자랑스러운 일이다. 알파벳 26자 중에서 하나를 소유하는 건 대단한 일이다. 일본의 J도 꽤나 분발했었지만 한국의 K에 비할 바가 아니다. 중국의 C는 아직 까마득하다.
하지만 이렇게 임팩트 있는 K 접두사를 아우를 수 있는 간단명료하면서도 이해하기 쉬운 K의 정체성이라는 게 있을까? 정, 한, 흥? 다 일리가 있지만 뭔가 부족하다. 폭발적으로 영향력을 증가시키고 있는 지금의 K 브랜드 파워를 정의 내리기에는 너무 추상적이거나 관념적이다.
K 브랜드가 일시적 현상이 아닌 전 세계의 문화와 사회 전반에 뿌리내리려면 눈에 보이고 손으로 만질 수 있고 머릿속으로 정리가 되는 개념이어야 한다. 구체적이고 실체적인 정의를 내리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본다.
『한국의 정체성 』에서 탁석산은 “한국이란 집단이 갖는 여러 분야의 공통된 특성”을 통해서 한국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다고 제안한다. 쉽지 않지만 전적으로 동의한다. K 브랜드의 다양한 영역들 (기술, 문화, 사회, 등)을 아우를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 나는 코리안 디자인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건축, 인테리어, 가구, 패션, 생활용품, 테크 등의 다양한 영역에서는 “스타일”의 개념이 널리 쓰인다. 미드 센츄리 모던, 스칸다나비 안, 미니멀리즘, 셰비 쉬크, 인더스트리얼, 보헤미안, 아트 데코, 재패니즈 젠, 그리고 심지어는 펭 슈이 (풍수) 등 수많은 스타일이 존재한다. 패션에서도 펑크, 프레피, 그런지, 보호-쉬크, 톰보이, 빈티지, 스트리트웨어, 고딕 등의 룩 (look)이나 스타일이 있다.
많은 디자이너들이 자신의 작업이 특정 스타일의 틀 안에서 정의 내려지는 것에 거부감을 가지고 있지만 대중은 생각이 다르다. 수많은 요소들로 이루어진 디자인 콘셉트를 이해하기는 어렵지만 그것들의 스토리, 느낌, 분위기를 한 두 문장으로 설명할 수 있는 스타일은 가슴에 딱 와 닿는다. 지금 정착된 스타일들도 그 출발은 몇몇 디자이너들의 참신한 아이디어에 의해서다. 그것이 모방과 인용을 통해 트렌드화 되고 스타일로 구축되는 것이다.
요즘 건축, 인테리어, 가구 디자인에서 핫한 미드 센츄리 모던 (Mid-Century Modern)과 재팬디 미니멀리즘 (Japandi Minimalism) 스타일은 코리안 디자인을 정의하는데 중요한 단서들을 제공한다.
미드 센츄리 모던은 2차 세계전쟁 당시의 미국에서 형성된 스타일로 기능성, 깨끗한 선, 자연스러운 곡선, 다양한 재료의 조합, 등이 특징이다. 순수미술과 수공예의 융합을 강조한 독일의 바우하우스(Bauhaus, 1919-1933) 건축가와 디자이너들이 미국에 정착하면서 형성되었다.
대표적인 디자이너로 조지 넬슨 (George Nelson), 에임스 부부 (Charles and Ray Eames), 에로 사리넨 (Eero Saarinen) 등을 들 수 있다. 꾸준하게 사랑받고 있는 스타일로 아직까지도 Herman Miller, Knoll, Vitra 등의 가구점에서 찾을 수 있고 더 큰 맥락에서 모더니즘 운동을 포용한다.
재팬디(Japandi – Japanese and Scandi) 스타일은 이미 정착된 재패니즈 스타일과 스칸디나비아 (혹은 스칸디) 스타일을 혼합한 것이다. 단순함, 자연스러움, 편안함을 추구한다. 깨끗한 선의 디자인, 여유 있는 공간, 마감하지 않는 자연스러운 재료들, 중성적인 색깔과 녹색 (혹은 식물)을 사용하면 재팬디의 느낌이 난다.
재패니즈 스타일과 스칸디나비아 스타일은 유사성도 많지만 그 차이도 미묘하게 존재한다. 전자는 선 (Zen)과 와비 사비 (투박하고 조용한) 정신을 강조한 투박한 미니멀리즘인 반면 후자는 휘게 (Hygge – 편안함, 안락함)의 정신을 강조한 아늑한 미니멀리즘이다. 전자는 무인양품 (Muji)로, 후자는 이케아 (Ikea)로 대변할 수 있겠다. 이 두 가지를 조합하면 재팬디가 된다. 미니멀리즘이라는 좀 더 넓은 범주 안에서 아늑함, 편안함, 자연스러움, 세련됨이 다 갖춰진 하이브리드 스타일이다.
코리안 디자인 혹은 코리안 스타일을 정의 내려 보자. 물론 일개 건축가 및 디자이너가 개인적으로 시도해 보는 것이라 하나의 의견 정도로 해석하면 좋겠다.
우선 위에서 설명한 두 가지 스타일은 미국, 북유럽 국가들, 일본에서 자신들의 고유성을 찾아 세계화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오랜 시간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형성된 시대적 흐름이나 트렌드에 자신의 개성을 입힌 것이다. 미드 센츄리 모던은 미국, 2차 세계대전, 모더니즘 운동에서 출발했고 재패니즈와 스칸디 디자인은 미니멀리즘 운동에서 출발했다.
한국은 어디서 출발해야 할까? 시대적으로는 현재, 스타일에서는 절충주의(Eclecticism)를 제안한다. 합치면 코리안 에크렉티시즘 혹은 한국 절충주의.
시대적 배경으로 과거도 미래도 아닌 현재를 강조한 것은 당연하다. 가전제품, 음악, 드라마, 패션, 영화, 방역 등 각종 분야에서 영향력이 티핑포인트 (tipping point)를 넘어선 한국의 현재가 세계인의 관점에서 역사를 통틀어 가장 인상적이고 긍정적이다. 백의민족, 전쟁으로 피폐한 나라, 남북으로 갈린 나라, 어려움을 딛고 일어선 나라가 아니라 다방면에서 세계의 관심을 받고 있는 현재이다. 미래는 우리가 만들어가는 것이기에 중심에 둘 수 없다.
스타일을 정의하는 문제는 조금더 어렵다. 달항아리, 막사발, 고고한 선비 정신을 보면 미니멀리즘 같다. 상다리 휘어 지는 잔치상, 색동저고리, 형형색색의 민화들을 보면 맥시밀리즘(Maximilism – 과도함의 미학)에 더 가깝다. 하지만 현재의 현상들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절충주의가 가장 적합할 것이다.
스타일로서의 절충주의는 최근에 다시 인기를 얻고 있는데 다양성의 혼용이 가장 큰 특징이다. 특정 규칙에 따라야 하는 나머지 스타일과는 다르게 자유롭고 개성적이다. 다른 시대의 요소들과 기존의 각종 스타일들을 융합해서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것이다. 이를 성공적으로 잘 구현하려면 사실 섬세한 감각과 세심한 고안이 필요하다. 개성 넘치고 세련된 것과 촌스럽고 유치한 것은 종이 한 장 차이 이기 때문이다.
미국 남부의 닭튀김과 독일의 맥주를 합친 치맥, 현대 서울에 떡하니 서있는 숭례문, 각종 장르의 음악을 한곡에 담는 K팝 음악, 온갖 식재료로 만드는 한국 화장품, 각종 사상과 종교(무속신앙, 불교, 기독교, 유교사상 등)가 뒤섞인 드라마와 영화들, 드라이브 스루 코로나 검사 등 수많은 개성 넘치고 기발한 절충주의 디자인이 존재하는 곳이 한국이다. 창의적 브리꼴라주 (Bricolage)가 넘쳐난다.
최광진은『한국의 미학』에서 서양은 분화, 중국은 동화, 일본은 응축, 한국은 접화의 문화라고 분석한다. 저자가 말하는 접화(grafting)의 개념은 “대립적인 존재가 만나서 하나로 어우러지는 것”이고 동화나 응축과 다르게 “중심이 없는 균등한 통합”이며 “운명적으로 하나가 될 수 없는 대립적 요소가 상생의 관계로 맺어지는 것”이라고 강조한다.
내가 말하는 코리안 에크렉티시즘과 일맥상통한다. 이제 누군가가 한국의 정체성을 물어본다면 코리안 에크렉티시즘의 관점에서 설명해 보자. 간단명료하고, 구체적이고 실체가 있다.
[상단 사진: HS애드가 제작한 한국 관광 홍보영상 ‘Feel the Rhythm of KOREA.’ 게시 40일 만에 이천 만뷰를 넘어섰다. 2020년 11월 11일 현재 합산 조회수 삼천 만뷰를 넘었다- https://youtu.be/3P1CnWI62I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