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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구별소녀 Oct 19. 2021

엄마의 파우치

어렸을 때의 일이다.


"어? 립스틱이 부러져있지? 얼마 전에 새로 산 건데?"  

엄마가 말했다.

옆에 앉아있던 나는 심장이 두근두근 떨렸다. 들키지 않으려고 애썼지만 얼굴은 이내 빨갛게 달아올랐다. 엄마 몰래 새 립스틱을 발라보려고 했다가 그만 립스틱을 땡강 부러뜨리고 말았다. 하지만 혼날까 봐 말씀드리지 못했다. 엄마가 화장품 가게로 가서 새 립스틱으로 바꿔오셨다. 들키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이번엔 화장품 가게 아주머니에게 많이 죄송했다.

 

다음 날. 엄마는 전날 바꿔온 장밋빛이 나는 새 립스틱을 바르고 정장을 깔끔히 차려입고 낮은 굽의 구두를 신고 나와 함께 예식장에 갔다. 1년 365일. 쉬는 날 없이 장사를 하는 엄마에게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빨간 립스틱 덕분인지 엄마의 얼굴에 모처럼 생기가 돌았다. 어린 시절. 엄마가 화장을 했을 때 나는 분 냄새가 그리도 좋았다. 말끔히 차려입고 화장을 한 엄마의 모습이 낯설면서도 너무나 예뻐서 예식장에 가는 내내 엄마의 얼굴이 닳도록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았다. 이 순간만은 이 세상에서 그 누구보다 엄마가 제일 예뻤다.


어린 시절. 창문도 없는 작은 가게방 하나에 네 가족이 옹기종기 모여 살았다. 가구라곤 문이 두 개인 장롱, 작은 텔레비전, 3단 서랍장이 전부였다. 하지만 네 식구가 누우면 옴짝달싹 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작고 작은 방이었다. 그래서 여름이 면 엄마, 아빠는 방이 아닌 차가운 가게 시멘트 바닥 위에 돗자리를 하나 깔아놓고 주무시곤 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엄마는 변변한 화장대조차 마련할 수 없었다. 그래서 엄마의 화장품은 늘 어떤 주머니에 담겨있었다. 화장품도 스킨, 로션, 콜드크림, 3색 아이쉐도우, 립스틱이 전부 일정도로 단출했다. 엄마가 장사를 마치고 세수를 하고 기초화장품을 바르실 때면 곁에 다가가서 엄마의 말개진 얼굴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피로로 늘 푸석푸석해 보이는 엄마의 얼굴은 아주 가끔은 콜드크림 덕분인지 마사지를 한 덕분인지 밤하늘의 별처럼 반짝반짝거렸다.


며칠 전.

엄마의 가게에서 우연히 커다란 검은색 화장품 파우치를 보았다. 속에 샘플 로션이나 핸드크림 같은 화장품이 들어있을 것 같아 열어보았다. 하지만 파우치 속엔 화장품은 하나도 없었고 뮤렉스, 이모튼같이 외계어 같은 이름이 붙어있는 약들만 잔뜩 들어있었다. 자세히 들여다보았더니


-심혈관 약

-손가락 관절염 약

-위장을 보호해주는 약  

-허리 통증과 하지방사통을 완화시켜주는 약이 있었다.


약의 종류도 워낙 많고 챙겨 먹어야 할 양도 많아서 하루에 세 번. 아침, 점심, 저녁으로 이 모든 약을 잘 챙겨 드실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엄마는 약을 오랫동안 드셨기 때문인지 의외로 복잡해 보이는 파우치 속에서도 아침에 드실 약들을 쏙쏙 잘 골라내셨다. 엄마의 손바닥에 약이 한가득 담겼다. 저 약만 먹어도 배가 부를 정도였다. 한 움큼의 약을 물과 함께 들이키신 엄마는 곧바로 다시 가게 일을 시작하셨다. 너무나 덤덤하게 많은 양의 약을 드시는 엄마를 보고 오히려 내가 더 놀랐다.


엄마가 나이가 드시니 몸이 여기저기 아프셔서 드시고 있는 약이 많은 줄은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나 많은 줄은 몰랐다.  이렇게 많은 약을 드셔도 괜찮은지. 대학병원에서 진료를 보고 있는 과마다 약을 알아서 잘 처방해주셨겠지만 혹시나 중복 처방받은 약은 없는지. 여기서 줄이거나 뺄 수 있는 약은 없는지 하는 걱정이 되었다. 예전에 큰 아이를 임신했을 때만 해도 엄마를 모시고 대학병원에 같이 갔었는데 아이들이 태어난 후로는 엄마를 모시고 대학병원에 같이 간 이 없었다. 혼자 가셔도 괜찮다고 하시니 정말 괜찮은 줄로만 알았다. 내 자식은 그 흔한 감기조차도 병원에 데려가고 하는데 몸이 더 아프신 엄마는 그동안 나 몰라라 했었다. 죄송했다.


 

엄마의 파우치

그 흔한 핸드크림조차도 엄마의 파우치 속에는 담겨있지 않았다. 시어머님 생신 때에는 용돈과 함께 예쁜 색깔의 립스틱을 몇 번 사드린 기억이 있는데. 이상하게도 더 챙겨드리고 싶은 엄마의 생일에는 용돈만 드렸지 화장품을 사드린 기억이 거의 없다.


요즘 날이 갑자기 추워지고 건조해져서 다시 손가락이 트고 갈라져서 하얀 반창고를 덕지덕지 붙이고 계시던데. 또 손가락  끝이 찢어지셨을까. 집에 있는 피부연화제를 가져다 드려야겠다. 그리고 핸드크림과 영양크림을 하나 사 드려야겠다. 그동안 내가 무심해도 너무 무심했다. 늘 괜찮다고 하셔서 정말 괜찮은 줄로만 알았다. 하지만 이젠 알았다. 괜찮다는 말이 정말 괜찮은 것이 아님을...  혹시 내가 신경 쓸까 봐 으레 괜찮다고 하셨음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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