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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비이은 Feb 06. 2022

수평적 문화와 조직 침묵

침묵을 나쁘게만 바라볼 것인가? 침묵에 숨겨진 의미를 알아본다.

10년 넘게 기업문화를 담당하면서 매년 사업계획을 짤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어젠다가 있다. 바로 '수평적 문화'다. 수평적 문화 구축을 통해 소통을 활성화하고, 직원들의 다양한 아이디어를 듣고, 이를 업무에 반영함으로써 조직을 보다 창의적이고 역동적으로 바꾸겠다는 포부를 담은 계획은 아마 기업문화를 담당하는 대부분의 팀 사업계획에 들어 있을 것이다. 

수평적 문화를 만들기 위해 직급을 없애고, 호칭도 자율화하며, 비실명 게시판을 개설하기도 한다. 회의 및 보고문화 개선 캠페인, 애자일(Agile) 조직 도입, 주니어 보드(Junior Board) 및 체인지 에이전트(Change Agent) 구축, 역멘토링(Reverse Mentoring) 프로그램 등도 추진된다. 

이러한 활동의 결과는 어떨까? 조직의 엄청난 자원과 에너지를 쏟아붓고 있음에도 결과는 신통치 않다. 2020년 대한상공회의소에서 발표한 <직장 내 세대갈등과 기업문화 종합진단> 보고서를 보면 수평적 소통은 36점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실제 실무를 담당하고 있는 사람들과 대화를 나눠보더라도 다양한 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지만 그것으로 인해 조직이 수평적으로 변했다거나 창의적으로 바뀌었다고 느껴진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필자도 위에서 예로 든 프로그램 대부분을 조직에 적용해보았지만 의도한 목표를 달성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



왜 이러한 일들이 현장에서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국내 기업에서 추진하고 있는 프로그램을 찬찬히 살펴보면 대부분 '발언 행동(Voice Behavior)'을 촉진하는 활동과 연결되어 있다. 즉 수직적, 위계적인 조직 풍토와 사회적 맥락 속에서 성장한 구성원들이 침묵하지 않고, 심리적 안전감 속에서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이야기할 수 있도록 돕겠다는 의도를 담은 활동들이다. Van Dyne 교수 등은 '발언 행동이란 문제 해결, 상황 개선, 변화 위해 대안을 제시하는 의사소통 행위'로 정의했다. 국내외 실증연구들을 보면, 발언 행동은 목표 몰입, 학습 민첩성, 창의성, 혁신성 등에 긍정적 영향을 미친다는 점을 밝혔다.


그렇다면 발언은 좋은 것이고 침묵은 나쁜 것일까? 여기에 반기를 든 연구 결과들이 최근 나오고 있다. 구성원들의 침묵(Silence)은 억압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말하지 못하는 상태의 침묵도 있지만(silenced) 말로 표현하기 어렵거나(cannot be spoken),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명확하게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말하지 않는 침묵도 포함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했다. 


Van Dyne, Ang & Botero 등은 침묵을 체념적 침묵(acquiescent silenct), 방어적 침묵(defensive silence), 친사회적 침묵(prosocial silence)으로 구분했다. 체념적 침묵은 어차피 힘들기만 하고 변하는 것도 없을 것이라는 체념으로 인해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밝히지 않는 행동을 말한다. 방어적 침묵은 공포심으로 인해 나타나는 가장 고전적 형태의 침묵으로, 자신의 지위나 권리 등을 보호하기 위해 의견을 유보하는 것이다. 친사회적 침묵은 다른 사람이나 팀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 자신의 생각이나 견해를 보류하고, 상대방 의도에 맞추기 위해 침묵을 선택한 것이다. 


기존의 세 가지 침묵 유형에 더해 최근에는 '성찰적 침묵'이 새롭게 연구되고 있다. 성찰적 침묵이란 새로운 상황에 직면했을 때 조직 내 관행이나 루틴(routine)에서 벗어나 '내적 대화(voiced inner dialogue; VID)'를 통해 성찰하는 시간을 갖고자 의도적으로 침묵하는 것을 말한다. Bigo 교수는 성찰적 침묵이 다른 사람에 대한 포용과 소통, 서비스 마인드를 강화시키고, 본질을 탐구하게 하는 창의적 공간을 만들어 개인과 조직의 창의성을 높인다고 밝혔다. 발언이나 침묵이라는 행동 자체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그러한 행위 속에서 타인을 포용하기 위해 노력과 용기, 나의 의견을 다시 바라보는 성찰 등이 포함되어 있느냐라고 할 수 있다. 


이 연구 결과는 발언 행동을 중심으로 기업문화 활동을 추진하고 있는 국내 기업에 많은 시사점을 준다고 생각한다. 위계적인 풍토 속에서 변화관리 초기에는 발언 행동을 촉진하는 활동이 효과를 발휘할 수 있으나 그다음 단계에서는 내적 대화를 할 수 있는 침묵의 공간을 마련해야 한다. 수평적 문화는 그 자체로 목적이 아니다. 수평적 문화는 직원들이 자유롭게 자신의 생각을 이야기하고, 편견 없이 타인의 의견을 경청하며, 합리성에 근거해 의사 결정한 후 협업을 통해 창의적 결과물을 만들도록 돕는 환경적 맥락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본질적인 목적에 맞는 문화를 만들기 위해서는 발언 행동뿐만 아니라 '조직 침묵'에도 관심을 기울여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아마존의 회의 원칙 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회의는 침묵으로 시작한다'였다. 직급, 직책을 뛰어넘어 열정적으로 자기의 의견을 개진하고 토론하는 모습이 아니라 침묵 속에서 워드로 만들어진 자료를 읽는 것이다. 침묵 속에서 자료를 읽으며 내적 대화를 하는 것이다. 작년 연말 사업계획 수립을 위해 체인지 에이전트로 활동하고 있는 후배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후배는 2021년 한 해 가장 좋았던 것으로 '재택근무'를 꼽았다. 재택근무를 하면서 오롯이 일의 본질과 해당 업무의 고객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고 한다. 여기저기서 날아드는 합의문서, 자료 요청, 보고서 등 일은 변한 것이 없지만 혼자 있으면서 조용히 생각하고, 해당 업무를 요청한 사람의 의도와 고민이 무엇인지 생각할 틈이 있었다고 한다. 수평적 문화로 고민하는 문화 담당자들이 계시다면 '조직 침묵'에 대해서도 같이 생각해보는 것을 권한다. 



[참고자료]

On silence, creativity and ethics in organization studies(V. Bigo, 2018)

Voiced inner dialogue as relational reflection-on-action: The case of middle managers in healthcare(J.A. Holton & G. Grandy, 2016)

Conceptualizing employee silence and employee voice as multidimensional constructs(L. Van Dyne & I.C. Botero, 2003)

아마존처럼 회의하라(사토 마사유키, 2021)

침묵 동기 척도 개발 및 타당화(최명옥, 박동건, 2017)

참여적 리더십이 발언 행동과 목표 몰입에 미치는 영향: 리더 신뢰와 심리적 안전감의 매개효과를 중심으로(탁제운, 신제구, 2017)

한국의 조직 침묵 연구에 대한 메타분석(고대유,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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