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를린 비건 여행ㅣ고민하는 도시
작년에 베를린에 다녀온 지인들이 너무 좋았다고 입을 모아 말했다. 뭐가 그렇게 좋았냐고 물었더니 설명하기 어려운데 그냥 다 좋았다고 했다. 그리곤 기나긴 에피소드들이 이어졌다.
내가 베를린에 갔다 왔다고 하자 주변 친구들이 좋았냐고 물었다. 너무 좋았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역시나 뭐가 그렇게 좋았냐는 질문이 이어지고, 나 역시 한마디로 결론 내리기가 어려워 이런저런 에피소드들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파리의 에펠탑처럼 세계적으로 유명한 상징물이 있는 것도 아니고,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처럼 역사적으로 유명한 건축물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 걸 기대하는 사람이라면 분명 실망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베를린에는 분명 무언가 있었다.
베를린은 대중교통이 잘 되어 있는 도시 중 하나라고 한다. 실제로 베를린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해 보니, 지하철이고 버스고 할 것 없이 다 깨끗했고, 도시 곳곳을 촘촘히 이어주고 있어 이동하기에도 편리했다.
그리고 트램, 버스, 지하철용 티켓이 구분되어 있지 않고 하나의 티켓으로 다 이용할 수 있는 것도 편한 점 중 하나였다.
하지만 베를린의 대중교통이 '잘 되어 있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는 다른 곳에 있었다고 생각한다.
베를린에서는 지하철, 버스, 트램 할 것 없이 꼭 붙어 있는 마크가 있었다. 바로 휠체어, 유모차, 자전거 마크였다.
*기후위기 시대에 온실가스 배출을 줄이기 위해 자전거 이용이 장려되고 있다고 한다.
마크가 허울뿐이 아니었던 것이, 어딜 가나 휠체어, 유모차, 자전거를 볼 수 있었다. 그러고 나서 관찰해 보니, 베를린에서는 바퀴 달린 것을 타고도 대중교통을 이용하기가 편리하다는 걸 깨달았다.
사실 난 휠체어나 유모차를 이용하지 않아서 평소에는 잘 인식하지 못하다가 한 번씩 그 불편함을 절절히 느낄 때가 있다. 외부 출강이나 마켓 같은 곳에 참가하기 위해 이동할 때이다. 차가 없는 나는 대중교통을 주로 이용하는데, 일의 특성상 짐이 많다. 특히 마켓에 출점하기 위해서는 판매할 비누부터 디스플레이할 도구까지 챙겨야 할 것들이 한두 개가 아니라서 캐리어에 그득그득 담곤 한다.
한번 짐을 싸면 20kg는 거뜬히 넘는 경우가 많은데, 버스는 타고 내릴 때 계단을 오르내려야 하기 때문에 제일 먼저 제외한다. (저상버스도 있지만, 내가 타야 하는 버스 노선에 저상버스가 있는지도 모르고, 있다고 해도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에 제외한다.)
그래서 차선으로 선택하는 것이 지하철이다. (지하철은 역에 내려가기 위해서 계단을 이용해야 하지만 대부분 에스컬레이터나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어 있고, 역에 내려갈 때는 다른 사람 눈치 안 보고 내 속도대로 내려갈 수 있다.) 지하철은 타고 내릴 때 버스처럼 계단을 오르내리지 않아도 된다. 그런데 지하철에서도 좀 불편한 것이, 승강장과 열차 사이의 간격이 넓거나 높낮이가 다른 경우가 꽤 있다는 것이다. 그럴 때면 20kg가 넘는 캐리어를 번쩍 들어 옮겨야 하는데 그때마다 머리가 핑 도는 경험을 한다.
그래도 캐리어는 손으로 들면 그만이지만, 만약 휠체어라면 그것도 불가능한 상황. 언젠가 한국에는 장애인이 없는 게 아니라 밖에 나올 수 없어서 '안 보이는' 거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 그 말이 너무 이해되었다.
베를린에서 본 대부분의 대중교통들은 타고 내릴 때 (계단은커녕) 높낮이의 차이가 거의 없어서 바퀴가 달린 그 무엇이든 굴리면서 타고 내리면 되었다.
실제로 내가 베를린에서 버스를 탔을 때 2인용 유모차를 끌고 탄 사람들이 있었다. (말이 2인용 유모차지, 5-6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 2명이 누워 갈 수 있는 대형 유모차였다.) 버스 내부에는 대형 유모차도 들어갈 수 있을 만한 충분한 공간이 있었다. 그리고 버스가 정류장에 정차하면 푸쉬-하는 소리와 함께 차체가 인도 쪽으로 딱 붙어 기울어졌다. 버스가 매번 이런 식으로 정차했기 때문에 그 유모차도 손쉽게 내릴 수 있었다.
베를린에서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또 인상적이었던 점이 있는데, 바로 비인간 동물들을 자주 만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버스에서도, 지하철이나 트램에서도 반려인이 반려견과 함께 타는 모습을 꼭 볼 수 있었다. (당사자에게 실례인 것 같아 사진은 찍지 않았다.)
그것도 이동장에 들어가 있는 모습이 아닌, 하네스만 한 채로 말이다. 어찌나 침착하게 앉아있는지 한두 번 겪은 일이 아니라는 걸 단박에 알아챌 수 있었다.
주변 사람들의 태도에서도 이는 특이한 상황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트램에서 반려견을 발견하고 반가운 눈빛을 보내거나 힐끔힐끔 쳐다보는 건 우리뿐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우리가 만난 반려견들도 (우리를 포함한) 다른 인간들에게 관심이 없었다.
이런 상황이 한두 번이 아니다 보니 우리도 점점 대중교통에서 만나는 비인간 동물들에게 호들갑을 떨지 않게 되었다. 아침 지하철에서, 오후 잠깐 이동하는 트램 안에서, 저녁에 숙소로 돌아가는 버스에서, 매번 비인간 동물을 만나게 되니 신기해하는 감정이 점점 무뎌진 것이다.
공존이란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내가 타고 있는 버스에 인간동물이 한 명 더 탄다고 해서 호들갑 떨지 않듯이, 비인간동물이 버스를 타는 것이 특이하지 않은 것, 내가 있는 공간에 그들이 있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 그게 바로 진정한 공존으로 가는 첫걸음이 아닐까.
베를린에서 카페를 갈 때마다 느낀 건, 주문한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다는 거였다. 그 흔한 티슈 하나 딸려오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어느 카페를 가도 티슈는 기본으로 놓여있는데, 베를린에서는 열심히 찾아야 했다.
더 반 커피에서도 나오는 건 내가 주문한 커피뿐. 굳이 티슈를 찾아 사용하지 않는다면, 쓰레기 없이 카페를 나오는 게 가능한 곳이었다. (매장에서 마시고 갈 때 머그잔이나 유리잔에 커피를 주는 건 기본이다.)
보난자 커피에서는 피콜로(오트로 변경)를 주문했더니 생각보다 씁쓸해서 설탕을 넣으려고 했다. 셀프바에 가보니 커다란 설탕통과 티스푼이 있었다. 소분 포장된 설탕이었다면 종이 쪼가리라도 나왔을 텐데, 그런 자잘한 쓰레기를 남길 여지조차 주지 않더라. 덕분에 보난자 커피에서도 커피만 마시고 쓰레기 0으로 나올 수 있었다.
사실 내가 일부러 제로 웨이스트 카페를 찾아간 것도 아니고, (베를린 3대 커피라는) 더 반, 보난자 같이 유명한 곳만 갔는데 이런 경험을 했다는 게 놀라웠다.
일회용품이 없으면 잠깐은 불편할 수 있다. 처음엔 티슈가 안 보인다며 찾아다녔던 것처럼. 하지만 한두 번 경험해 보면 일회용품 없이도 충분히 지낼 수 있다는 걸 익히게 된다. 나중에는 굳이 티슈를 찾지 않고 쓰레기 하나 없이 카페를 나오게 된 것처럼.
왜 그렇게 좋았을까.
사실 요즘 난, 스스로가 많이 지쳤다고 느낀다. 주위 사람들에게 유난스러운 취급을 받는 것에도 지쳤고, 일면식도 없는 사람들에게 욕먹는 것에도 지쳤다. 은근하게 이루어지는 특별 취급에서도 자유로워지고 싶었고, 애매하고 찝찝하게 상처받는 것도 그만하고 싶었다.
베를린은 어떤 의미에서는 참 이상한 곳이었다. 내가 빨대를 보며 사용할지 말지로 "유난"을 떨기도 전에 그럴 여지를 만들지 않는 곳이었고, 아무 빵집에 들어가서 비건 빵이 있냐고 물어보면 "없어서 미안하다"는 대답이 돌아오는 곳이었다.
고민한 흔적이 보여서 좋았다. 그리고 그 고민이 개개인의 행동(혹은 발악)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서 더 좋았다. 사회 곳곳에 다양한 고민의 흔적들이 배어있어서 좋았다. 내가 미처 생각해보지 않은 고민들도 보물찾기 하는 것 마냥 더 많이 찾아낼 수 있는 곳일 것 같아 좋았다.
이런 곳은 처음이라 그렇게 좋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