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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J Aug 29. 2022

기러기 부부

2년 차, 우리 괜찮을까?

 남편은 한국에, 나는 이곳 미국에서 살고 있다.

지난 일 년은 두 아이들과 혼자 그야말로 살아내느라 글을 쓸 생각 따위는 하지 못했다.

그럼 지금은 글을 쓸 정도는 여유가 생긴 건가?

모르겠다.

다만, 순간의 생각과 감정과 경험을 글로 담아내고 싶다는, 반드시 그렇게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여전히 새벽부터 밤까지 정신없이 밥을 하고, 도시락을 싸며, 아이들을 챙기고, 청소를 하고, 미국에서 살기 위한 일들-그러니까 장을 본다거나 때때로 여기저기에 (많은)돈을 내고 문제가 생기면 통화를 하는 등의 잡다한 일을 해야 한다.

그리고 이제 곧 개학을 하면 과제에 치이고 공부를 하고 내 학교까지 다니는 일까지 더해질 것이다.

이제 그런 일들에 대체로 적응을 해 별로 당황하지 않고 비교적 신속하게 처리할 수 있게 되었다.

나는 미국에 아이들과 살아보기 위해 석사 과정을 다시 지원해서 공부를 시작했다.

큰 아이가 사춘기가 시작되면서, 대한민국에서 가장 교육열이 높다는 동네에 살고 있는.. 영특하던 아이는 친구들과 스스로를 비교하며 빛을 잃어갔다. 부모는 비교적 아이가 원하는 쪽을 맞춰주려고 노력했지만 주변 상황을 보면서 '공부'란 것을 시작하기도 전에 좌절하게 된 것이다. 모든 것을 내려놓고 노상 핸드폰만 들여다보는 아이를, 보다 못해 함께 외국으로 데리고 오는 방향을 찾다 보니 내린 결정이다.

그리고 이곳에서 오롯이 나의 힘으로만 (재정적인 부분 말고) 살아가기 위해 위와 같은 것들을 해내면서

평생 참으로 의존적인 삶을 살았음을 알게 되었다.

운전한 지 10여 년이 되어가는데, 미국에서 주유라는 것을 처음 해봤으니까.

부유하게 살아서도 아니고 공주같이 살아서는 더더욱 아니고 결혼 전엔 나이차 많은 언니들이, 결혼 후엔 모든 걸 다 알아서 해주는 남편이 있었고 태생적으로 관심 없는 것에는 철저히 무심한 성향도 큰 몫을 했다.    

남편이 정착을 도와주고 한국으로 돌아갔을 때, '차에 기름 넣는 법'을 물어보지 못해 기름이 떨어질 때까지 계속 불안했었다. 기름 넣는 걸 주의 깊게 봐 둘걸.

결국 남편이 떠나고 며칠 후 주유소 직원의 도움을 받아 겨우 넣을 수 있었다.

다소 황당해하는 직원에게, "한국에 있던 내 차랑 주유 방향이 달라서 잘 몰랐어, 미안해요"라고 말하면서.   


그러니 나는 당연히, 단 한 번도 자동차 등록증이나 보험 따위에 관심을 기울인 적이 없었다.

문제는 그렇게 '관심을 기울인 적 없던' 것들이 미국에서 계속적으로, 끊임없이 내 발목을 잡았다.

이제 나는 자동차 등록증을 갱신하고 스티커를 기다리고 혹시 있을지 모를 스티커 도난에 대비해

칼로 몇 차례 긁어내는 요령까지 터득하게 되었다. 자동차 보험을 비교하고, 컴플레인을 하고, 뿐 만 아니라 웬만한 집안일과 이런저런 일들은 이제 크게 당황하지 않고 처리할 수 있다. 애들 학교에 가고, 이곳 엄마들과 완전히 동화되지는 못해도 생일 파티를 열고 초대 연락을 돌릴 수 있을 정도는 되었다. 화장실 변기가 막혀도, 욕조가 막혀도 그런 것쯤은 웃으면서(욕도 같이하면서) 해결할 수 있다. 고속도로에서 그야말로 '미친 속도'로 달려오는 차들 사이로 여유 있게 끼어들 수 있게 되었고, 미국인들이 웃으면서 보이는 친절에 마음을 다 내어주지 않고 적당히 웃으면서 대처할 수 있게 됐다. 웃지 않아야 할 순간엔 정색하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불만을 표출할 수 있게도. 그러니까, 나는 지난 1년 간 미국에서 살아내고 적응하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고 어느 정도는 그럴 수 있게 된 것이다.



다만,

끝내 적응이 되지 않고 점점 더 명치끝이 시린 느낌을 받는 건 남편과 나의 관계이다.  

열렬히 연애하고 결혼한 우리. 이제 더 이상 십수 년 전만큼 뜨겁지 않아도, 난 아직도 함께 누워 차가운 남편 배를 통통 두드리며 핸드폰 하기를 좋아한다. 동네 편의점을 갈 때도 손을 꼭 잡고 걸어가는, 그래서 아이들이 질투하며 종종 입이 뾰로통해지는.. 아빠는 엄마만 좋아해-하는 그런 사이였다. 누가 나이먹고 주책이라고 욕해도, 카톡 프로필은 항상 우리 둘이 행복하게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서로의 문제 때문에 언성을 높이고 날 선 언어로 말다툼을(주로 내가) 해도 푹 잘 자고 나면,  난 똑같이 아침을 챙겨주고 남편은 잘 다녀오겠노라고 손을 흔들어주는 그런 부부 사이.

방학 때 잠시 한국에 들어갔다 나올 때 양가 부모님이 모두 큰 병에 걸리셨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정확히는 우리 엄마와 시아버지. 담도암과 폐암.

우리는 공인된 효자, 효녀로 상대 부모님에게도 이런 며느리는, 사위는 없을 거라는 이야기를 자주 들을 정도로 지극히 모셨다. 시부모님께 정성껏, 아낌없이 해드릴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아마도 남편을 너무나 사랑했기 때문일 것이다. '나 의리 있는 여자야' 하며 뿌듯하게 웃을 수 있던 건 남편과 결혼했으니 남편에 대한 의리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 나에게 남편은 똑같이 우리 엄마에게 의리를 보여주었다.

그러나 내겐 사춘기 딸도 있었다. 아이는 조부모님을 사랑하지만, 미국 생활을 해내며 기껏 찾은 자신감과 평안함을 포기할 수 없었고 자꾸 지체되는 미국행에 또다시 분노를 표출했다. 그것도 아주 격렬하게. 왜 엄마는 아빠와 할머니, 할아버지만 생각하냐고 했다. 딸 인생은 생각하지도 않는 엄마라고 했다.

남편은 가족을 붙잡아두고 싶어 했다. 가뜩이나 어깨가 무거운 장남인 남편은 의지하던 내가 떠나는 것을 두려워했다.


하지만 나는 아이 둘을 데리고 다시 미국으로 돌아왔다. 공항에서 남편은 기어이 눈이 벌게지며 눈물을 뚝뚝 흘렸지만 나는 울지 않았다. 내가 운다는 게 가식처럼 느껴졌다. 내가 한 선택에 눈물을 흘리면서 어쩔 수 없었어...라고 변명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어쩌면 그 순간 아이들의 행복과 미래를 선택했고, 그것이 꼭 반드시 성공을 보장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남편의 손을 놓았다. 아니, 나는 놓지 았았지만 남편은 내가 떠나버렸다고 믿으니 그러면 그런 것일 테다.

비행기에서 꾹꾹 눌러 담은 마음을 핸드폰 메모에 기록했다가 공항 와이파이가 켜지자마자 남편에게 전송했다. 남편은 잘 읽어보지 않은 듯했다. 슬픈 감정에 사로잡히기 싫다고 했다. 하지만 왜 읽지 않냐고, 내 마음을 아이 아빠인 당신이 왜 몰라주냐고 말하지 못했다. 나는 지금 결국 다시 미국이니까. 그리고 남편은 한국에 혼자 남았으니까.


예전에 떨어져 있을 때는 시도 때도 없이 하던 영상통화를 이제는 빈도가 줄어 하루에 한두 번이 되었다.

너무나 보고싶다고, 많이 사랑한다고 말하는 숫자도 점차 줄어들었다.

남편은 여전히 전화를 하지만 마음을 이야기하지 않고 일상을 이야기한다.

나는 일상보다 마음을 듣고 싶어 한다. 당신이 보고 싶고 필요하고 그립다는 말을 듣고 싶다.

그리고 다 이해한다는 말을.

그래서 때로는 일부러 심술궂게 남편의 일상에 관심 없는 척을 하곤 한다.

하루에 두어 번 있는 소중한 통화 시간에 저렇게 의미 없는 말만 늘어놓는다고 생각하면서.

주변에 이런저런 일들로 늘 지쳐있는 남편이 잠이 들어 전화하지 않는 지금도 화를 내면서.

문자 메세지 하나 보낼 수 없는 건 마음이 식었기 때문이라고 홀로 굳게 믿으면서.

서로의 마음에 낸 생채기는 다시 만나 함께 살면 아물 수 있을까?

한국 교육을 힘들어하는 딸아이를 끝내는 끌고 들어갈 수 있을까?

그때 아이가 엄마, 아빠를 이해해줄까?

다시 예전처럼 가족 모두 손을 잡고 저녁 산책을 갈 수 있을까?

모르겠다.

아마 남편도 모를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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