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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J Sep 01. 2022

돈 줄을 끊으면

당신의 유일했던 무기

남편은 함께 살면서 내가 기억하는 한은 한번도 자신이 벌어온 돈을 '어디에','얼마나', 혹은 '왜' 썼는지

추궁한 적이 없다. 단 한번도.

되려 뭔가 필요한 건 없는지 늘 물어보고, 내가 조금이라도 가지고 싶어하거나 관심있어 하는 물건이 있으면

먼저 알아보고 사러가자고 하곤 했다. ooo(내 이름)의 선택은 결국에는 옳더라고 웃어주면서.


어느 날,

내가 다시 아이들을 데리고 미국에 가야할 것 같다고 말했을 때 남편이 싸늘한 표정과 목소리로

재정 지원을, 그야말로 돈 줄을 끊으면 그만이 아니겠냐고 했다.

그러면 가고 싶어도 못 가는게 아니겠냐고 했다.


나는 순간 예상치 못한 남편의 답변에 멍해지면서 곧 분노로 온 몸이 흔들렸다.

치사하고 치졸하고 야비하다고. 당신은 원래 그런 사람이였던 거냐고 화를 냈다.

아이들 미래를 위해 들이는 돈을 그렇게 들먹이느냐고.


내가 한참 분노를 쏟아내고 난 후 남편의 얼굴을 보았을 때,

지금껏 본 적이 없는 슬픔, 외로움이 뒤섞인 얼굴로 나를 보고 있었다.

남편은 두려워 하고 있었다. 내가 옆에 없을 때, 아이들이 옆에 없을 때의 상실감을 다시 홀로

겪어 낼 것에 대해.

일을 하고, 또 해보지만 시간이 가지 않고 겨우 텅 빈 집에 들어왔을 때의 공허감을 또 다시 감당해 내야 하는 것에 대해.


돈은 남편이 가진 유일한 무기이자 방패였기 때문에

나에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그 무기로 상처를 내고 방패로 가지 못하도록 막아선 것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설령 그것이 아이들을 위한 선택이었다고 해도.


누군가는, 아마도 많은 사람들이 기러기 부부까지 해가면서 아이들에게 쏟아붓다가

결국 남편이 지쳐 병들거나 남편이, 또는 부부 각각이 바람이 나는 등의 최악의 상황에 대해 말한다.

아직도 매스컴에 연예인 누가 기러기 부부를 하다가 결국에는 이혼을 했다는 글이 올라오면

아내를 욕하면서 결국 뻔한 결말이라는 등의 댓글이 달린다.


그러나 적어도 내 주변에 기러기 부부를 경험했던 이들이 바람이 나거나 이혼을 한 경우는 없다.

물론 그 또한 소수의 성공한 경우일지 모르겠다. 내가 알고 있는 것이 다는 아닐지도 모른다.

아마 매스컴에 나오는 그런 이야기들이 더 빈번하게 발생할 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내가 이렇게 떨어져 살면서 지금껏 알지 못하던 것을 경험하고 나서는

내가 모르는 일에 대해 그렇게 쉽게 말을 하고, 키보드를 눌러대고 엔터키까지 누르지는 못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기러기 가족, 통근 가족, 장기 분거 가족 등 여러가지 이상한 이름으로 불리우는,

즉, 한 배우자가 자녀들과 해외에 거주하면서 나머지 배우자가 생활비를 송금하여 부양하는 가족의 형태가

겪는 슬픔과 외로움 역시 경험하지 못한 이들의 영역이기 때문이다.


나는 머지 않아  생활을 끝낼 것이다. 아마도 그리 머지 않은 시간 내에.

나는 남편 곁으로 돌아갈 것이고, 우리 가족은 아마도 다시 함께하게 될 것이다.

내가 써내려가는 글은 우리가 '기러기 부부'를 경험하면서 시시때때로, 아니 매 순간 겪고 있는 상처와 슬픔, 외로움에도 불구하고 종국에 '회복'으로 가고 싶은 나의 몸부림의 기록이 될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나와 같은 선택을 한 이들이 공감하고 위안을 받았으면 좋겠다.

인터넷에 '기러기 아빠', '기러기 부부'를 쳤을 때,

내가 결국에는 저런 결말로 끝나지 않을까 두려웠다. 지금도 두렵다.

하지만 나는 노력할 것이다.

우리의 말과 행동, 마음을 다시 기억하고 쓰면서 가족이 떨어져 살 때 겪을 수 있는 숱한 오해와 착각들을

그것이 실은 '오해'와 '착각'이었음을 스스로 깨닫고, 다시 '사실'과 '진실'로 머리와 마음에 새겨낼 것이다.

어디선가 나와 같은 입장에 놓인 이들이 나의 이야기에 공감하고, 기러기 부부가 꼭 '그렇게' 끝나지는 않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내 남편이 나에게 재정 지원을 끊겠다고 협박한 것은 돈이 아까워서가 아니다.

혼자 남겨질 외로움과 두려움이 낳은 조바심의 표현이었음을 다시 알아차린다. 나는 그 말에 문자 그대로 반응하면서 분노와 배신감, 그리고 무관심으로 남편을 대하지 않고, 반드시 다시 돌아간다는 약속과 확신, 사랑과 고마움을 표현하는 편이 낫다고, 그게 지금 맞는거라고 결론을 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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