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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원 Mar 07. 2024

모질게 찡한 밥꽃

자장면

            모질게 찡한 밥꽃

                                - 가원 안창호 - 

 

  11년 위인 누나와 네 살 작은 남동생 이렇게 삼 남매의 장남으로 어머니가 36세에 나를 낳았다.

면 소재지 국민학교에 입학하여 1년 반을 다니다가 아버지의 전근으로 2학년이 8학급이고 학급당 60명이 넘는 시내 큰 학교로 전학해 와서 2부제 수업도 받았다. 교내 글짓기대회에서 평소 하굣길에 무척이나 먹고 싶었던 어묵을 군것질하지 않고 참고 참아 그 돈을 저금했다는 내용의 글을 써 상도 받고 근검절약의 생활을 일찍부터 배워왔다. 그리 넉넉하진 않았지만 단란한 가정이었다. 

 

  아버지는 지방철도청 소속 전기사무소 기능직 공무원이라 높은 전봇대에 올라가 힘들고 위험한 현장 근무를 많이 했다.

지친 몸으로 퇴근해 집에 오면 땀에 절린 청색 작업복을 벗으면서 늘 “너는 공부 잘해서 펜대 굴리는 직업(화이트칼라)을 가져라.”라고 덕담 같은 말씀으로 격려해주셨다. 당시 우리 부모들은 교육의 힘에 주목했다. “내 자식은 나와는 다른 삶을 살 수 있다.”라는 믿음과 희망을 안고 억척스레 자식 뒷바라지에 올인하셨다.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이 한참 무르익던 8월 어느 날 아버지께서 높은 전봇대 위에서 전기작업 도중 안전사고로 순직하셨다. 이 일은 내 학창 시절의 가장 암울했던 사건이었고 그때부터 깊은 방황 끝에 불우한 환경을 벗어나려는 처절한 몸부림의 시기가 되었다. 내 지난 인생 전체에서 가장 큰 변화와 삶의 굴곡이 된 학창기. 물질이 궁핍하고 마음도 가난한 학생이었다.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가난이 곧 불행’이란 상념으로 가득했다. 그것들은 세상을 향한 가난한 현실에 대한 물질적인 원망, 분노와 실의가 가득했던 가슴앓이 학생 자체였다. 

 

  슬픔은 묵을수록 그 끈적함을 묽게 하기가 힘들었다. 빛바래고 눈물로 얼룩진 내 학생 시절 일기장에서 한 소절을 찾아냈다.

“오늘 나는 울면서 ‘나는 이래서 안 돼’라는 말 대신 ‘나는 이래서 잘 될 거야’라고 최면을 걸듯 되뇌기를 거듭했다. 이름이 없는 잡초도 저마다 아름다운 들꽃을 쳐다보듯 어느 사람보다 자기 자신을 좀 더 너그러운 눈길로 바라보았으면 좋겠다. 창호야! 내가 나를 괜찮은 사람으로 봐주는 것이 변화의 시작이 된다. 힘내자.”

 

  이젠 스쳐 지나간 아픈 추억이 되었지만, 고교 생활하는 동안 탁구장이나 빵집 한 번 안 가본 숙맥이, 중간·기말 시험 때면 우리 반 부자 친구 집에서 먹고 자고 함께 공부하기도 했다. 

부업으로 기르는 돼지와 닭은 공장 사료가 없던 시절이라 돼지 먹이를 얻기 위해 온 동네 집집에서 나오는 음식물(모아줄 그릇을 일정한 곳에 놓아둠) 찌꺼기를 모아 무거운 자전거 짐실이에 달고 부지런히 이 골목 저 골목 뛰어다녔다. 

“흙수저 탈출은 공부뿐이야.”를 큰소리로 외치면서... 

한겨울에도 교복을 입은 체 어머니와 함께 강냉이 가루를 배급으로 주는 언 땅 파기 취로 공공사업에도 다녔다.


  아버님 순직 후 선생님과 이웃의 많은 격려와 조언을 들으며 아버지의 빈자리도 인정하니 조금씩 슬픔이 희석되면서 마음이 정화되고 새살이 돋아나오는 치유가 됨을 깨달았다. 그것은 곧 내 악바리 근성의 힘이 되었다. 마음을 다잡으니 가난에 대한 원망은 고마움으로 바뀌었다. 


 고교생으로서 어찌하든지 힘내어 살아가야 했다. 연로하신 홀어머님과 동생을 안 울리려 이를 악물고 경제력이 생길 때까지 알뜰하게 계획적으로 가계를 꾸렸고, 겨울철 춥고 좁은 골방에서 엄마가 기워준 두꺼운 덧버선을 신고 솜이불을 몸에 휘둘러 쓰고 새벽녘까지 학업에 열중했었다. 그리하여 시 단위 지방 고등학교 360명 중 수석 졸업을 했다. 그땐 이웃이나 학교 선생님이 사범대학 가긴 아까운 학생이라고 하는 소리를 들었다. 악바리 노력형이기에 격려해주신 말씀이었다고 생각했다.

 

 고교 졸업식은 수석 상 외에도 여러 차례 단상에 올라가는 나를 위한 시간이었지만, 부뚜막 위에 정화수 한 사발을 떠 놓고 삼킨 울음도 억수로 많았을 우리 어머니나 다른 가족이 한명도 참석하지 않았어도 서운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날 저녁 기찻길 건널목 하나 건너 외가에서 배달 자장면 회식이 있었다. 

외사촌 형수님께서 시고모의 아들인 나와 같은 반인 아들의 졸업 축하를 겸해서 자장면을 시켜주셨다.

특별한 날에만 먹는 나의 ‘자장면 추억여행’ 속에는 노란 단무지, 양파와 춘장 한 접시 그리고 두 눈에 눈물이 어려서 파삭한 군만두도 있었는지 가늘게 썬 오이와 초록 완두콩 몇 알이 윤기 머금은 까만 자장면 위로 올라앉았는지 온통 하얀 희뿌연 무채색일 뿐 맛나게 먹었던 기억은 없었다. 

마음 속으론 악착같고 대견한 나 자신한테 토닥토닥 찡한 마음을 챙겨 담고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면서 먹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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