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보니 상수(常數)가 아닌 변수(變數)이더라
- 가원 안창호 -
수필 쓰기 시간에 ‘유효 기간 /유통 기한’ 글제를 받으니 퍼뜩 생각나는 이야기가 셋 있다.
첫번 째, 나의 애장품(愛藏品 )은 GS사 선풍기 1대와 파나소닉 사의 카세트 테이프 겸용 라디오가 주인공이다. 선풍기의 내력은 70년대 초 엄마와 고등학생 동생 세 식구가 정든 고향을 떠나 대구 봉덕동에 살 때 푹푹 찌는 날 서문시장에 나가 샀다.
벌써 50년이 지났지만 GS 가전 중 그때 만들어진 선풍기의 모터가 좋아 지금도 작동이 아주 잘 된다. 누름 판 위에는 조명등 버튼도 있어 밤에도 은은하게 초록 불을 밝혀 운치가 있다. 그래서 더 내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파나소닉 카세트 겸용 라디오는 70년대 말 초임지 영양에서 달성군으로 직장을 옮긴 기념으로 사들인 한 달 월급 정도의 고가 물품이었다.
모두 소중한 물건이지만 ‘연기법 ’에 따라 나타났다가 인연이 다되어서 유통기한을 다하는 순간을 맞기 마련이다. 라디오는 서너 번 교동시장에 가서 수리 받았지만 성능 면에서 회복이 힘드니 이젠 지금 형태로 더 많은 사람이 추억을 부를 수 있길 바라면서 아내와 함께 마땅하게 기증할 곳을 찾고 있었다.
지난해 8월 폭우와 장마가 길 때 괜찮은 날을 받아 지리산 ‘정령치’을 여행하고선 가게 이름이 길고 재미나 차 한잔 마시러 남원시 인월면에 있는 ‘안내소 앞 카페 제비’로 마음이 향했다. 미리 얻은 정보에 따르면 코미디언 J의 딸과 사위가 운영하는 커피와 피자 등 간단한 식사가 되는 가게로 가끔 공연도 한다. 바깥마당에는 아이디어가 돋보인 ‘인월 어쩌다가 J 의 지리산 잡화점’인 ‘코미디마켓’도 보였다. 건물 내부 2층 벽면 시렁엔 오래된 여러 가지 카메라, 라디오 등 수집품이 진열되어 있었다. 그중 내 애장품과 외형이 같은 라디오 한 대가 유독 눈에 띄었다. 아 ~ 짝을 맞춰 주면 참 좋겠다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두 달 후 해남 땅끝마을 아름다운 절 미황사 괘불재에 참석하고 어둠 속 돌아오는 길에 카페에 들려 코미디언 J도 직접 만났고 사위한테 우리 부부의 뜻이 담긴 라디오를 전했다. 서운한 마음보다는 가벼운 마음으로 잘 전달했다.
두 번째는 40대 초반부터 배드민턴을 시작했으니 어느새 구력이 30년이 넘는 운동이다. 중간에 오른 무릎이 시큰시큰 통증을 느껴 무릎 연골 보호 차원에서 체육관 마룻바닥에서 야외 흙바닥 구장으로 옮겼지만 다른 취미활동보다 꾸준히 여태껏 잘 운동하고 있다. 날쌘 결정타로 이기는 시합 위주보다 몸에 부상 없이 힘을 빼고 아기 다루듯 살살 달래가면서 시니어 동호인들과 즐긴다.
셋째는 아내와 함께한 42년의 세월이 끊임없이 머릿속을 맴돈다. 계단만 보면 엘리베이터를 찾고 한숨 쉬는 모양새가 아내 허리 같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한다. 매년 자식들과 사돈댁 김장까지 해오던 사람이 올핸 절이는 배추 포기의 수가 절반으로 확 줄었음에 그 누구도 흐르는 세월을 잡을 수도 없고 어찌할 수 없지만 참 마음이 아프다.
약 복용과 복대를 두르고 생활 습관 개선으로 꾸준한 걷기 운동과 허리 근육을 강화하는 간단한 체조를 함께 해보자고 권유하여 실천하고 있다. 산업 시대 ‘닦고 조이고 기름 치자’는 정비공장 구호처럼 다만 현 상태가 더 악화하지 않도록 보존관리를 할 뿐 그저 ‘지금 여기’가 중요하다.
얼마 전 지인으로부터 선물 받은 보이차의 포장지 안내 글이 떠올랐다. “보이차는 잎 속에 들어 있는 산화효소나 공기 중의 미생물을 이용해 만든 발효차이기에 유통기한이 따로 없으며, 정해진 보관 방법을 준수하시면 오래도록 깊은 맛과 향을 즐길 수 있습니다.” 제조날짜만 있고 유통기한이 없다는 특이한 사실에 위로 받으면서 삶의 용기를 북돋아 본다.
그냥 그대로 사는 것이 아니라 좀 더 보람있게 살고자 하는 방법을 찾아 본다.긍정적인 생각은 또 다른 궁리로 이어지고 유통기한을 늦추거나 아예 없애는 일이기 때문이다. 내게도 더는 젊은 시절의 열정적인 인생의 유효기간이 인생의 유통기한이라는 등식은 성립하지 않는다 . 마음도 건강검진이 필요하며 욕심은 끝이 없다.
앞으로도 내가 있는 곳에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겠지만, 자식들에게 큰 부담을 주지 않고 산뜻한 면을 보이면서 생의 끄트머리로 평안히 가고자 간절히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