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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기장 Dec 09. 2024

고된 육아 속, '나'를 잃어버리지 않기



  "합격". 모니터 화면 속 한 귀퉁이에 나타난 두 글자는 고된 육아로 지친 내 삶에 충분한 보상이 되어 주었다.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이 고생을 하고 있는 것인가'라는 생각 때문에 수백 번도 더 흔들렸지만, 결국에는 결실을 얻어낸 것이다. 근 몇 년 동안 이토록 강렬한 성취감을 느껴본 적이 있었던가.


  9월에 들어서며 본격적인 공부에 돌입했으니 무려 3개월 만에 이룬 성과였다. 물론, 육아와 병행하지 않았다면 아마 한 달이면 충분히 공부할 분량이었을 것이다. 밀도 있고 효율적으로 공부하진 못했지만, 육아와 병행하며 만들어낸 결과였기에 전에 없던 큰 보람을 느낀 것이 아닌가 싶다.


  사실 시험 준비는 다소 느닷없이 시작되었다. 2024년 새해를 시작하며 책 읽기, 영어 공부, 운동, 신문 보기 등등의 계획을 세웠지만, 모든 계획은 끝을 가늠할 수 없는 모호한 성격의 것이었다. 합격을 목표로, 자격증 취득을 목표로 하는 계획 따위는 애당초 내 관심 밖의 영역이었다. 나는 그저 나 자신을 잃어버리지 않고 한 해를 살아내길 소망할 뿐이었다.


  매일 밤 'To do list'를 끄적이며 2024년의 절반을 넘겼을 무렵, 문득 한 해 동안 나에게 남은 것이 무엇인가 떠올려보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았지만... 없었다. 육아휴직을 한 지 1년이 훌쩍 넘어가고 있었고, 아이는 하루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커가고 있었지만, 막상 올해 내가 이뤄놓은 성과는 이렇다 할 게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틈나는 대로 책을 읽고 영어 문장을 외웠다. 침대에 드러눕고 싶은 충동을 참아가며 글을 끄적였고, 체력을 유지하고 건강을 지키기 위해 꾸준히 물살을 가르고 뜀박질을 해댔다. 단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않으려고 머리와 몸을 이리저리 굴리면서 고군분투하였는데... 막상 지난 한 해를 돌아보니 아등바등 지내온 시간에 비해 결과로 내세울 만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결국 늦더위가 지속되는 가을의 어느 날, 충동적으로 수험서를 주문하기에 이르렀다.



  수험서를 배송받았지만 막상 포장을 뜯는 데까지 꽤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고, 그 때로부터 수일이 지나서야 겨우 수험서의 첫 장 넘길 수 있었다. 시작이 반이라고 했지만, 읽는 것조차 버거운 내용들을 머릿속에 넣어야 한다는 사실은 책장을 넘길 때마다 한숨을 내쉬게 만들었다. '포기하기에 늦은 때는 없다'라는 우스갯소리가 떠올랐다. 하지만 이미 저질러버린 일, 어쩌겠는가. 그렇게 매일 적는 'To-do-list' 목록에서 '시험공부' 한 줄이 비집고 들어왔다.


  짧게는 30분, 길게는 1시간씩 매일 공부를 이어갔다. 결코 길다고 할 수 없는 소중한 나의 자유시간 일부가 스트레스 지수를 끌어올리는 데에 할애되었다. 꾸역꾸역 책장을 넘기길 두 달. 공부는 시작했지만, 막상 시험 접수는 하지 않은 채 어느새 11월에 접어들고야 말았다. 달력이 11월로 바뀌고 나니 드디어 발등에 불이 떨어졌음을 느꼈다. 이렇게 대충대충, 설렁설렁 공부하다가는 이도 저도 없이 시간만 축내겠구나 싶었다. 응시료 10만 원...! 떨리는 마음으로 3주 뒤에 있을 시험에 응시하고야 말았다. 배수의 진을 치는 셈이었다.


  다음 날부터 나의 'To-do-list'는 올 스톱이었다. 하루를 반성하고, 다음날을 계획하는 시간도 사치로 여겼다. 아기가 잠든 틈틈이 책을 눈으로 훑으며 문제를 풀었고, 틀린 문제를 복습하기를 반복했다. 글쓰기도, 독서도, 영어 공부도, 달리기도, 심지어 낮잠과 밤잠도 줄여가며 공부에 매진했다. 물론, '지금 포기해도 늦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을 버리지 못한 채...


  결전의 날이 밝았다. 수험생 룩의 정석이라 할 수 있는 츄리닝과 모자, 백팩을 둘러메고 시험장으로 향했다. 시험문제는 40문제, 합격 점수는 70점. 컴퓨터로 응시하는 시험이라 답안을 제출하면 바로 합/불 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시스템이었다. 긴가민가 하는 문제를 하나 둘 넘기다 보니, 긴가민가 하는 문제 중에서 몇 개라도 맞추지 못한다면 합격에 문제가 생기는 상황이었다. 고심에 고심을 거듭하며 문제를 풀었고 벌벌 떨며 답안 제출 버튼을 클릭하였다. 


  실눈을 뜨며 모니터 이곳저곳을 훑던 그 순간, '합격'이라는 두 글자가 눈에 들어오자 온몸에 '소오오오름'이 돋았다. 시험을 치른 지 2주가 훌쩍 지났지만, 아직까지 그날의 전율이 이따금씩 온몸을 찌릿찌릿하게 만든다. 그만큼 시험을 준비했던 과정과 합격이라는 결과는 올 한 해 나에게 있었던 많은 일중 가장 인상 깊은 뉴스거리로 남지 않을까 싶다. 나의 삶도, 아빠의 삶도 포기하지 않았던 2024년의 나 자신에게 박수를...!  


  육아로 '나'를 잃어버리고 있는 엄마, 아빠들이 있다면, 지금 당장 관심이 갈만한 시험이 뭐가 있는 있는지 검색해 보자. 되도록이면 짧은 시간과 적은 노력으로도 합격할 수 있는 시험을 찾아서 응시해 보는 것이다. 비록 당장의 육아 라이프에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할지라도, 바스러져 가는 '나'를 지키는 가장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방법이 될 수 있을지 모르니 말이다. 끝을 모르는 애매모호한 '육아'라는 거대한 장벽에다가, 작게나마 분명하고 확실한 '숫자'와 '문자'로서 나를 새겨 넣을 수 있을 테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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