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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무너지고 있다

성실함과 책임감의 그림자

by 나리다

5년 전, 남편의 죽음으로 정신없는 시간을 보던 중 산재 심사 날짜가 정해졌다. 굳이 내가 참석하지 않아도 된다고는 했지만, 노무사가 알아서 처리하기보다는 유족이 자리에 있는 것이 유리하다고 해서 참석하기로 마음먹었다.


심사위원들은 먼저 노무사와 사측의 의견을 청취한 뒤에 그들을 내보내고 내 발언을 듣고자 했다. 긴 테이블이 앞에 있었고 양옆에 앉은 심사위원들의 시선이 내게 집중되었다. 나는 잔뜩 긴장했으나 그 무표정한 얼굴들 속에서, 연민이 섞인 부드러운 태도를 느끼곤 용기를 얻어 말했다.

"남편은.... 늘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무슨 일을 해도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해왔습니다. 그날 휴가 중에 일을 나갔던 것도 본인이 맡은 업무를 남에게 맡기지 않는 책임감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남편을 죽게 만들었습니다."

가슴 한구석에 억울함이, 또는 분노가 소용돌이쳤다. 그 소용돌이는 슬픔과 절망으로 뭉쳐졌다. 눈앞이 부예졌다.


"제 아기는 태어난 지 이제 갓 오십일이 지났습니다. 저는 그 아이에게, 이 사회가 성실함과 책임감을 갖고 최선을 다해 일한 사람에게 반드시 적절한 보상을 주는 곳이라는 것을 가르치고 싶습니다. 제가 그럴 수 있도록, 부디 공정한 심사를 해주시길 바랍니다."

그것은 반은 진심이었고 반은 거짓이었다.

성실함과 책임감의 결과가 죽음이라면, 나는 어떤 보상보다도 그가 살기를 간절히 바랐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내가 사랑했던 그 남자의 성실함과 책임감을 나와 내 아이도 간직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것이 그가 우리에게 남긴 것이라면.


사회는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사람을 원하고, 세상에는 반드시 그 사람들이 필요하다. 필요한 사람들은 곧 소모된다. 한 사람의 생을 생각했을 때 그것이 반드시 가치 있는 일인지에 대해 나는 매일매일 고민한다. 는 내가 무의미한 존재가 되는 것이 두려우면서도 대충 살고 싶다. 느지막이 아직까지도 사춘기인 걸까.


이런 잡생각들은 주로 회사생활을 하는 동안 무럭무럭 자라나 꿈틀댄다.

내가 생각하는 나는 아직도 신입사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데, 어느덧 내일모레면 마흔이고, 회사에서의 입지는 중간관리자 직전 그 어디쯤이다. 실수 몇 개쯤 귀여운 애교로 넘어갈 수 있던 시기를 지나 내 실수를 침착하게 처리하는 것은 물론이거니와 아랫사람의 실착을 능숙하게 덮어야 하고, 윗사람의 속내를 제대로 읽어내지 않으면 어리숙한 사람으로 치부되어 버리는 위치가 되었다. 그건 무척 부담스럽다.


주변을 살펴보면, 맡겨진 업무를 못한다 말할 줄 아는 사람들은 욕을 좀 얻어먹어도 편하게 사회생활하면서 워라밸을 챙길 줄 안다. 반면에, 능력을 인정받는 사람들은 딱히 대단한 보상도 못 받은 채 남들이 기피하는 업무만 떠맡곤 한다. 요즘에 와서는 많은 사람들이 전자를 현명하다고 생각한다. 현대사회에서 직장과 일은, 자기만족의 수단이 되기도 하지만 생계유지와 삶의 질 향상을 위한 돈벌이 수단으로써 더 큰 역할을 한다. 나에게도 그렇다. 그래서 사회에 인정받지 못하더라도, 남들과 똑같이 번다면 일은 적게 하고 싶다. 런 생각을 하는 것은 어린아이를 혼자 양육하며 회사일까지 해야 하는 처지 탓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성실하고 책임감 있게 일하는 편이다. 그걸 스스로 기특하게 생각하면서도, 이따금 그런 것이 손해인 것 같아 억울할 때가 있고, 그럴 때면 성실함과 책임감을 다해 일하다 죽은 남편에 대해 생각한다.


내가 추구하는 가치와 내가 바라는 삶 사이는 가까운 듯 먼듯한 거리감이 존재한다. 그 간극은 내 삶 어딘가를 자극하고 무너뜨리고 때로는 일으켜 세울 것이다.


지금 나는 무너지고 있는 중이다.


그러나, 무언가가 무너질 때는 새로운 무언가가 되고 있는 중이라는 것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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