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번 윤석열의 비상계엄 사태를 보며 떠오르는 개인적인 사건이 있다. 연도로 2000년은 나에게 희비가 엇갈리는 한 해였다. 기다림 끝에 승진을 앞두고 있었지만 아주 또라이 지점장을 만난 해였기 때문이다. 은행원이었던 나는 당시 새로 발령받은 지점에서 대출업무를 맡게 되었다. 때는 IMF 여파가 본격적으로 가계 경제에 영향을 미쳐 치솟는 연체율로 담당자 뿐 아니라 전 직원들이 채무자 연체 독촉을 하던 시기였다. 그런데 대출 연체율을 줄이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다. 이미 나간 대출금의 이자나 원금을 회수하거나 아니면 새로운 대출을 일으켜 분모를 키우는 방법이다. 연체율을 산정하는 방법이 분자는 연체 대출금, 분모는 대출금 총액이기 때문이다. 당시 지점장은 연체 회수 보다는 분모를 키우기로 작정했는지 무리한 대출을 끌어들이려 했다. 사채업자, 경매 브로커 등 누가 봐도 위험해 보이는 대출들을 거리낌 없이 들고 왔다. 대출은 담보도 담보지만 돈을 빌리는 사람의 성향도 중요하기에 담당자인 나에게는 큰 부담으로 다가왔다. 은행의 대출 담당은 그 대출이 부실화되면 실행 당시 규정 위반을 따져 변상이라는 조치까지 취해지는 가혹한 자리이다. 나에게는 그해 승진 여부가 지점장의 손에 달려있음을 알고 있지만 그렇다고 부당한 대출 지시까지 따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때 확실하게 느낀 것이 있는데 상사란 직장에서의 직위가 높은 것이지, 도덕성까지 당연히 갖춘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지금은 특별할 것도 없는 사실이지만 당시는 직위가 높으면 모든 게 나보다 나으리라는 근거없는 믿음이 있던 시절이었다. 당시 지점장과의 대화내용 중 일부이다.
*지점장: “당신, 지점장 지시를 그렇게 안 따라도 되는 거야. 내가 가져온 대출이 뭐가 문제야.“
*나: “채무자와 담보 제공자가 일면식도 없는 대출을 할 순 없습니다."
*지점장: “그게 채권 보전에 무슨 문제가 있어?”
*나: “채무에 대한 책임이 모호한데 그 대출이 정상 상환된다고 보십니까?”
이런 식으로 나와 지점장은 사사건건 부딪혔다. 아무리 승진이 중해도 내가 죽을 짓을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해 지점장은 나의 고과를 낮게 주었지만 다른 승진 가점들이 있어 운 좋게 턱걸이 승진을 했다. 그리고 승진해 간 새로운 부임지에서 얼마나 지났을까 이전 근무지에서 본사 특별감사가 진행되었고 나는 참고인 자격으로 소환되었다. 당시 감사수반이 나에게 했던 말이 지금도 기억나는데 “당신, 정말 운이 좋았다. 이 대출 건을 당신이 실행했다면 승진이고 뭐고 큰일 치를 뻔했다" 는 말이었다. 그랬다. 그 대출 건은 내가 끝까지 기표를 거부한 경매 잔금 대출이었다. 하지만 나의 후임자는 지점장의 지시를 차마 거역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금번 윤석열의 비상계엄으로 고위 공직자와 장성들이 줄줄이 소환되어 내란 동조로 처벌 대상이 되고 있는 것 같다. 그중에는 비록 항명일지라도 지시를 거부한 장성들도 있었나 보다. 청문회에서 국회의원들의 날선 질문에 고개 숙이는 그들을 보니 당시 대출업무를 담당할 때 지점장에게 대들던 때가 생각났다. 상사의 부당한 지시를 따른 직원들에 대해 감사 나온 검사역들이 자주 하는 말이 있다. "당신, 지점장이 죽으라면 죽을거야?" 조직생활을 하며 윗 사람의 지시를 거부한다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내가 그 자리에 있는 이유와 역할을 잘 살핀다면 비록 출세는 못 할 수 있어도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릴 행동까지는 안 할 것 같다. 위 사람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하는 것 우리는 이것을 맹종 (盲從) 이라고 한다. 한자로 '장님 맹', '따를 종' 으로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고 시키는대로 덮어놓고 따르는 행위이다. 사유하지 않는 죄는 그래서 위험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