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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래된 타자기 Oct 28. 2024

바이킹의 첫 침공

장 르노가 들려주는 노르망디 왕국 이야기 6화

[대문 사진] 노르망디 덴마크 해적들의 급습을 고민하는 샤를마뉴


바이킹들이 뇌스트리(뇌샤트리우스) 지역을 처음 침공한 것은 820년으로 알려졌습니다. 「왕실 연대기(Annales Royales)」에 따르면 ‘노드마니아(Nordmannia)’를 출발한 13척의 배들로 이루어진 선단이 플랑드르 해안을 침공한 뒤 파죽지세로 뇌스트리 지역의 땅을 점령했습니다. 노드마니아는 오늘날 스칸디나비아를 가리킵니다.


이어 “세느 강 연안에까지 상륙해 밀고 들어오자 강을 지키던 파수꾼들이 이들을 저지하다가 다섯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바이킹들은 이 과정에서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퇴각했죠.” 「왕실 연대기」는 또한 아끼탠느 지역 연안의 부엥 도성을 침공한 선단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노르웨이 선박들로 이루어진 바이킹의 선단은 아일랜드 바다를 통하여 침투할 수 있었던 것이죠.


노르망디 덴마크 해적들의 급습을 고민하는 샤를마뉴 [1]



바이킹 아스게르


옛 문헌들은 늘 샤를마뉴가 연안을 잘 방어했다고 기술하고 있지만, 새로운 침략자들의 공격을 분쇄하기 위해 항구와 강 하구에 수비대를 주둔시킨 것이 전부였습니다. 그나마 840년 경건왕 루이(Louis le Pieux)가 사망하자 이러한 주둔군 배치는 효력을 상실하고 말았습니다.


이러한 사정은 841년부터 새로운 선단이 세느 강을 거슬러 올라오는 것이 현저히 목격되었다는 사실에서 확인됩니다. 「퐁트넬르 연대기」는 저간의 사정을 매우 명확하게 묘사하고 있죠.


“5월 12일 노르망디 인들은 그들의 우두머리인 오쉐루스와 함께 나타났다. 5월 14일 그들은 루앙 도성을 불 지르고 5월 16일 그곳을 떠났다. 5월 24일 그들은 다시 쥬미에쥬 수도원을 불태웠다. 퐁트넬르는 5월 25일 6리브르를 지불하는 조건으로 약탈을 겨우 면할 수 있었다. 5월 28일에는 생 드니 수도사들이 도착하여 68명의 포로 몸값으로 26리브르를 지불했다. 5월 31일에는 이교도들이 바다를 점령했다. 국왕의 가신이었던 구화르가 이교도 무리의 선발대와 마주쳤지만 이교도들은 전투에 돌입할 어떠한 기색도 보이지 않았다.”


쥬미에쥬 생 피에르 교회 [2]


바이킹들의 침입이 계속되는 와중에 덴마크의 아스게르(라틴어로 오쉐루스에 해당)는 노르망디 중심지라 할 수 있는 프랑크 왕국의 중요한 주교좌 도시인 루앙을 너무도 손쉽게 점령합니다. 「생 베흐탱 연대기」는 이를 생생히 전해주고 있죠.


“덴마크의 해적들은 루앙을 공격했다. 그들은 망슈 해협을 거쳐 바다로부터 들이닥쳤다. 검과 화력을 동원해 공격한 끝에 도성을 함락시키고 파괴를 자행했다. 수도사들은 도망치기에 바빴으며, 남은 주민들 또한 포로로 붙잡히거나 살육을 면치 못했다. 모든 수도원들이 공격받아 완전히 파괴되자 더 이상 살 수 없게 된 주민들은 돈이 될만한 것들을 허겁지겁 주워 담아 피난길에 나섰다. 피난민들로 늘어 선 줄은 세느 강을 따라 길게 이어졌다.”


루앙 대화재의 흔적들


생투앙 수도원의 화재와 10일 후에 발생한 쥬미에쥬 수도원의 화재는 대단했습니다. 오늘날에도 현장에서 유물이 발견될 정도로 피해가 심각했죠. 그러나 이상하게도 아스게르는 이 해에 퐁트넬르(생 방드리유) 수도원만 남겨둡니다. 아마도 이 수도원만이 그만한 가치가 있었던 게 아닐까 짐작될 뿐입니다. 실제 이후에 이 수도원은 포로의 몸값을 지불받거나 세금을 징수하는 요긴한 장소로 활용되었습니다.


9세기 생 방드리유 수도원 복원 그림, 위그 르루아 형제수사 작품, 개인 소장품.


842년에 이르러 훼깡의 수도원이 바이킹들에 의해 파괴되자 수녀들이 도망치는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3년 후에 씌어진 「생 베흐탱 연대기」는 다음과 같이 증언합니다.


“3월에 노르망디 인들은 세느 강을 거슬러 파리까지 올라왔다. 강 좌안 우안 닥치는 대로 약탈을 일삼았고 어떠한 저항세력과 마주치는 일도 없었다. 샤를 왕은 이들과 대적하기를 기다렸지만 이들을 포로로 붙잡는 것은 불가능했다. 샤를은 이들이 파리를 공격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은화 7천 리브르를 주고 이들이 세느 강 연안에서 완전히 떠날 것을 요구하였다.”




[1] 알퐁스 뇌빌의 동판화. 프랑수아 귀조의 『손주들에게 들려주는 프랑스 역사』에서 발췌, 1879. © 캉 노르망디 박물관.


[2] 쥬미에쥬 생 피에르 교회. 북쪽 측랑 윗부분 회랑 모습. 841년 화재가 발생하여 불에 타 기둥들과 벽체만이 앙상하게 남아있다. 장 르노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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