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문학의 오늘 39화
[대문 사진] 폴 셀랑이 연하장에 자필로 쓴 시
우리는 이쯤에서 시인에게 등을 돌린 시만큼이나 시 자체에 대해서조차 등을 돌린 시의 배반에 관해 – 물론 시인을 배반하려는 의도는 없지만 – 고찰해 볼 필요가 있다. 셀랑은 확실히 지난 두 세기가 넘는 시기 동안 시의 식물도감을 장식해 온 ‘꽃 피는 시(une poésie florale)’의 벼랑에서 시라는 정원의 화려한 개화(開花)를 거부한 시인으로서 정의할 수 있다.
이러한 징후는 이미 보들레르에게서 싹튼 것이지만, 1857년에 간행된 보들레르의 『악의 꽃(Les Fleurs du mal)』이나, 랭보가 파리 코뮌 혁명의 실패를 목격한 뒤, 「꽃들에 부쳐 시인에게 말한다(Ce qu’on dit au poète à propos de fleurs)」를 태어나게 했던 새로운 기대와 함께 써 내려간, 1871년 8월 15일 자 방빌(Banville)에게 보내는 서한 속에는 이미 프랑스 시가 시들 대로 시들어져 그 빛마저 퇴색해 가는 징후들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랭보는 이 서한을 공개하려는 의도가 없었기에 편지 말미에 알시드 바바(Alcide Baba)라는 이름을 사용하여 서명하고 있는데, 이 이름은 알키비아데스라는 그리스 역사 속의 인물 이름의 프랑스 어(Alcibiade) 표기에 대한 패러디로 보인다.
셀랑은 조롱이 담긴 음조를 통하여 베를렌느와 ‘9월의 장미들’을 비웃고 있는데, 이는 랭보의 태도와 유사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랭보는 ‘하늘빛 펌프식 관장기’와 ‘황홀한 관장’을 동원하여 꼬뻬(Coppée)와 방빌(Banville)의 백합들을 조롱하고 나섰던 것이다. 셀랑 또한 이러한 점에서 랭보에게 뒤지지 않았다.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릴케든 고트프리트 벤이든 기욤 아폴리네르든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거부했다. 특히 기욤 아폴리네르의 저 유명한 ‘콜히쿰(유럽 원산 원예용 식물)’조차도 거부하며 조롱해 마지않았다.
「콜히쿰(Colchiques)」이란 시는 셀랑이 모작하기도 하였지만, 셀랑은 자신의 시를 통해 아폴리네르의 시상(詩想)과 어휘들을 완벽히 해체하기에 이르렀다. 그런 까닭에 아폴리네르가 노래한 미라보 다리 아래 세느 강을 향해서 셀랑은 몸을 던진 것일까? 1970년 셀랑이 세느 강에 투신해 사망한 때가 그의 나이 쉬흔 살이 되던 해였다.
셀랑은 『익명의 장미』에 수록된 한 편의 시를 통해 미라보 다리를 언급하였을 뿐 아니라 다리로부터 “그는 갑자기 삶 속으로 뛰어 들었[던] 것이다.” 셀랑은 『알코올』의 시인(기욤 아폴리네르)에 대해 전혀 관대하지 않았으며, ‘라인 강 연안’의 도시에서 인간 살육을 자행하던 사냥꾼 쉰데르한느를 에워싼 살인자들(그의 시에는 항상 잔혹한 나치가 예시되고 있다)에게도 관용을 베풀지 않았다.
또한 그는 콜히쿰이라든가 장미, 장미 형상의 방위판, 아네모네 혹은 꽃시계덩굴 등 그 자신을 위한 어떠한 꽃도 갖고 있지 않았다. 셀랑에게 있어서 콜히쿰은 오비디우스(고대 로마 융성기 때의 시인)의 유형지인 코카서스 남부 지방(Colchide), 즉 콜치스(Kolchis)를 연상시켰을 뿐이며, 그가 번역한 시의 주인공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 나름대로 심도 있게 천착해 낸 유태인 태생의 러시아 시인 오싶 맨델스텀(Ossip Mandelstam)의 유형지 크리미아 지방(la Crimée)을 연상시켰을 따름이다.
마찬가지로 비록 코카서스 지방이 황금 양털(Toison d’or)로 이아손(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영웅)을 유혹한 곳이었다 할지라도 셀랑은 이로부터 크리스토프 콜럼버스(이 이름 또한 코카서스와 콜히쿰이란 단어와 발음상으로 유사성을 띠고 있다)가 그러했던 것처럼 아르고 선(船)에 탄 일행들이 품고 있던 추악하고도 비열한 살육의 간계를 의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았을 따름이다.
시집 『익명의 장미』에 수록된 「고통의 음절들(Die Silbe Schmerz)」에 나오는 Blume(꽃), Rose(장미), fleur(꽃), rose(장미)는 그처럼 단두대의 어휘들이었으며, 마르틴느 보르다가 지적했듯이, “살해의 언어, 즉 단두대의 칼날을 한 형용어들과 수사학 상의 꽃들”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오늘날 씌어지는 프랑스 시들을 볼 때, 시라는 식물도감은 전혀 흙 갈이를 하지 않은 채 결코 중단됨 없이 꽃으로 피어나고 있듯이 보인다. 이런 점에서 셀랑보다는 릴케에 더 근접해 있는 필리프 자코테(Philippe Jaccottet)는 시집 『대기(Airs)』에서 다음과 같은 감미로운 시를 통해 노발리스(Novalis)의 작고도 푸른 꽃을 환기시킨다. 참고적으로 이 시집은 1961년부터 1964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창작한 시들을 1967년에 한 권의 시집으로 엮은 것이다.
깊은 잠에 빠진
꼭 다문 입들
푸른빛 감도는 꽃들
떼를 지어
지나가는 이에게 침묵으로 말하는
그대 보랏빛 푸른 색조여.
Fleurs couleur bleue
bouches endormies
sommeil des profondeurs
Vous pervenches
en foule
parlant d’absence au passant.
위 시에서 꽃들의 입은 위협적이지도 잔인하지도 않다. 오히려 꽃들은 랭보의 시 「새벽(Aube)」의 어린 시인에게 이름을 불러주는 꽃과는 대조적으로 벙어리 자체라 할 수 있다. 덧붙이자면, 랭보의 시 「새벽」은 1871년에 활짝 꽃을 피운 시를 한껏 조롱한 이후에 써 내려간 『채색문자들(Illuminations)』 가운데 한 편이라 할 수 있다.
역설적으로 보면 위 시에서 꽃들은 침묵을 통해 말을 건네고 있으며, 본느파가 그러했듯이 현존을 재발견한 시인에게 어휘들의 도움을 받아, 또는 그 실추를 통해서 부재를 이야기해 가고 있다.
본느파는 1965년에 간행한 세 번째 시집 『금석문(Pierre écrite)』에서 “수선화, 재스민 / 내 태어난 곳의 꽃들”이라 노래하고 있다. 그러나 이 시구에서 굳이 꽃들의 목을 자를 필요는 없을 것이다. 마치 꽃 따는 처녀 코레(Coré)처럼, 데메테르(Déméter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대지의 여신)에 의해 연기처럼 사라져 더는 ‘존재하지 않는’ 처녀처럼 말이다.
자코테는 빅토르 위고의 장시 『정관시집(Contemplations)』의 제목 그대로인 명상의 시들을 쓰기를 원하였지만, 그러나 그는 위고처럼 그렇게 폭넓은 다양성을 지니지도 못했거니와 위고가 이룬 정신세계에 다다르지도 못했다.
1996년에 간행된 자코테의 시집 『두 번째 파종기(La Seconde Semaison)』의 1980-1994년도 작품 목록에는 다음과 같은 시구가 자리하고 있다. “저녁, 여기저기 돌 지붕 빛으로 물든 라방드의 들판, […] 밀밭[…], 그루터기들.”
로마의 시인 비르길리우스의 『전원시(Géorgiques)』와 이탈리아 북부 도시 만토바의 풍경 이후에 프랑시스 잠의 『기독교도의 전원시(Géorgiques chrétiennes)』(19111-1912)와 피레네 산록 마을 오르테즈의 풍경이 이어지고, 다시 자코테의 전원시와 그리낭(Grignan : 자코테가 1953년 이후로 파리의 소란스러운 동요를 피해 칩거해 들어간 레만 호숫가의 드롬 지방의 한 작은 마을)의 전원시가 등장한다.
자코테는 이 ‘공간들’에서, ‘이 대지들’과 ‘초록들판’에서 무엇을 기대하였던 것인가? 오직 ‘휴식’만을 즐기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랭보가 ‘각성의 순간’이라 이름 하던 순간에조차 그는 순수에 대한 통찰을 꿈꾸면서 “불길한 침전물을 가라앉힌 뒤 찾아온 대낮의 밝음을 지켜보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지만 자코테는 세상의 아름다움을 포착하려 애쓰던 순간에조차 자신의 내면 속에 은닉된 상흔을 감추려 시도하지는 않았다. 그의 표현에 따르자면, 그가 시를 통해 보여준 개개의 시적 언술들과 묘사들은 기쁨을 맛보고자 ‘기쁨[에로]의 다가감’을 위한 것이었을 따름이다.
더구나 그가 이전에 표명한 바를 통해 짐작할 수 있듯이, 그는 기쁨을 특별히 강조하지도 않았거니와 단지 대략적으로만 그리고 약간은 모호하게 시를 통하여 기쁨이란 주제를 다뤄왔을 뿐이다. 또한 자코테는 어느 날 그가 “얼마나 긴 시간 동안 기쁨이 우리에게 아주 먼 것이 되어버린, 거의 불가해한 것이 되어버렸다는 생각을 하면서” 자신이 명명(命名)하던 이름들을 떠올려 갔다.
그는 엔트로피 현상에 주목하기 시작했는데, 이러한 자각 증상은 “일반적이면서도 우리의 세계를 황폐화시킬 만한 충분한 힘으로 몰아 닥쳐오는 움직임”에 관한 것이었다. 그는 어느 순간 니체의 말이 이룬 반향에 귀 기울였다. “신은 죽었다.” 이 거짓 음정으로 반향 하던 울림은 기쁨의 외침처럼 진동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