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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래된 타자기 Nov 08. 2024

목가(牧歌)로 핀 꽃

프랑스 문학의 오늘 40화

[대문 사진] T. S. 엘리엇, 『황무지』


오늘날 몇몇 시인들에게서 주도되고 있는 시 운동은 프랑스 현대시를 목가(牧歌) 지상주의(idyllisme)란 특별한 형태로 이끌어 가는 듯하다. 문제는 이러한 목가적 경향이 정반대의 결과를 낳을 수도 있다는 점에 있다. 예를 들어 쥐드 스테판(Jude Stéfan)의 『목가(Les Idylles)』(1973)를 비롯하여, 피에르 오스테(Pierre Oster)의 『가장 멋진 해(La Grande Année)』(1964)와 필리프 드라보(Philippe Delaveau)의 『유카리 식물 (Eucharis)』(1989) 등이 이에 해당한다.


왼쪽부터 차례대로 쥐드 스테판의 『목가』(1973),  필리프 드라보의 『유카리 식물』(1989), 그리고 피에르 오스테 『가장 멋진 해』(1964).


다른 한편으로 보면 목가적 경향이 늘 그러해왔듯이 훼손된 낙원(Arcadie blessée)이란 주제로 이어질 수 있다는 점 또한 간과하기 어렵다. 이 ‘훼손된 낙원’이란 주제를 바탕으로 씌어지고 있는 시들 가운데 조르주 생-클레르(Georges Saint-Clair)의 시들은 거의 나무랄 데 없는 시 세계를 보여주었는데, 그의 시는 베아른(베가리 사제)의 시에 상당 부분 영향을 받았음은 물론이고, 프랑시스 잠(Francis Jammes)을 연상시키는 듯한 기억들로 가득 차 있다.


1953년에서 1969년에 이르는 초기 시편들을 모아 간행한 『신비한 한 덩어리(Unité Secrète)』를 비롯하여, 1991-1994년의 작품 『빙글빙글 도는 불꽃(Feu tournant)』에 이르는 시편들은 모두 그에 해당한다. 참고적으로 덧붙이면, 두 시기 사이에 이루어진 작품들은 1992년에 이르러 비록 잠정적인 것이긴 했지만, 『시 선집(Poésies complètes)』으로 한데 묶여 간행되었다.


조르주 생-클레르의 『시 선집』


조르주 생-클레르의 시처럼 요즘 씌어진 시들은 확실히 상처의 각인이란 측면을 강하게 부각시키고 있는 듯하다. 예를 들어 죽음이란 ‘혼돈세계’ 속에 뿌리들에 의해 이끌려 솟아오른 나무들은 단지 ‘대지의 상처투성이들’만은 아니며(자코테의 시집 『대기(Airs)』에 수록된 「나무들 I」), 우리의 몸과 같이 죽음에 다가가는 유액의 ‘하얀 입맞춤’이며, 베르나르 노엘(Bernard Nöel)이 표현한 ‘키 큰 하얀 나무’들이라 할 수 있다.


키 큰 나무,

시드는 잎사귀들 한 잎 한 잎마다

죽음의 하얀 입맞춤이 새겨지는 한

더는 잎새를 달 수 없는 시간마저 도래하리라.

허나 우리의 육신 또한

돌부리에 차이는 바퀴이자

윤회의 솟구치는 활기찬 수액(樹液)이리라.


Grand arbre

le temps n’a plus de feuilles

la mort a mis un baiser blanc

sur chaque souvenir

mais notre chair

est aussi pierre qui pousse

et sève de la roue.


- 베르나르 노엘(Bernard Nöel)의 『몸속의 추출물(Extraits du corps)』(1958)에서. 『시 선집(Poèmes) I』(1971, 1983)에 재수록.


베르나르 노엘의 『몸속의 추출물』, 1958, 갈리마르.


세계를 지칭하는 기호들의 영역에서 ‘기호들의 노래’는 베르나르 노엘의 이중적 말의 유희를 빌자면, “말하고” “살해한다.” 『피부병(La Maladie de la chair)』(1995) 역시 여전히 죽음의 그림자가 짙게 드리워진 것에 대한 치유할 수 없는 병적인 징후를 그려나간 작품이다.


“여기 존재하는 것만이 최선(Hiersein ist herrlich)”이라 릴케는 『두이노의 비가(Élégie de Duino)』에서 노래한 적이 있다. 그러나 오늘날 시인들이 노래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이 기억하고 있는 T. S. 엘리엇의 『황무지(The Waste Land)』의 황폐한 땅에 여기-존재하는 최선의 태도에 해당한다. 이 썩고 짓무른 땅은 성배를 찾아 나선 중세 기사들을 그린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어부 왕 암포르타의 몸의 상처에서 흘러나온 고름으로 더럽혀진 땅이다.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와 T. S. 엘리엇의 『황무지』, 프랑스어 판.


그렇듯이 이브 본느파는 세계 밖에 대해서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음에도 불구하고(1975년에 간행된 두 번째 시집 『문턱의 속임수 안에는(Dans le leurre du seuil)』을 보라), 우리들이 살아가고 있는 이 세계야말로 ‘또 다른 세상’임을 역설하고 있는 것이다.


이브 본느파, 『문턱의 속임수 안에는』, 1975.


이후에 『적운(Le Nuage rouge)』에 수록된 1976년의 산문들 속에 깃든 본느파의 이와 같은 세계에 대한 성찰은 랭보적인 채색문자들과 생-존 페르스(Saint–John Perse)의 독특한 방법에 찬사를 보내는 것이면서 동시에 섬광을 발하는 그만의 독특한 시적 인식일 수 있었다. 이를 다시 한마디로 요약하면, 그의 세계에 대한 성찰은 다름 아닌 ‘지상에 속한 고유한 경험’의 중요성과 그에게 있어서 가장 독특한 의미를 띠고 있는 단순(simple)이란 어휘에 대한 중요성이라 할 수 있다.


이브 본느파, 『적운』


그러나 그는 ‘황금시대를 그리워하는 태도’를 경멸해 마지않으며, “진실을 갈구하는 취향을 우리는 이미 상실하였기에 자연 전원적인 몽상들”을 배격해야만 한다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는 우리가 존재하는 세계 내에서 너무도 쉽게 세계의 목가적인 의미를 거머쥐려는 시도와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문명의 참해로 표상되는 ‘재난의 표현’(‘풍화된’ 식물들, 짐승들, 지평선, 구름들로 말미암아 아스팔트는 최후의 길들과 부서지고 ‘보기 흉측하게 그을려진’ 낡은 집들을 사라지게 할 것이다)이라든가, 행복한 현존은 결국 소멸하고 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처 난, 참해를 입은 심연은 그만큼 자신을 설득시킬 만큼의 중단 없이 계속된다”고 시인은 확신하고자 원한다. 그는 말의 진실을 존재케 해야만 하는 것이다. 말에 대한 그의 이러한 입장 표명은 1959년에 간행한 『있을 법하지 않은(L’Improbable)』에 수록된 1953년의 『악의 꽃(La Fleur du Mal)』에 관한 글로 이어져 피에르–알베르 주르당(Pierre–Albert Jourdan)의 최후의 저술 『짚신(Les Sandales de paille)』(포츔(Posthume), 1987)에 관한 고찰을 수록한 1988년의 책(메르퀴르 드 프랑스에서 간행된 『말의 진실(La Vérité de parole)』을 가리킴)으로 이어지고 있다.


이브 본느파 『말의 진실』


이 저술들 속에서 시인은 “비스듬히 스치는 불빛 아래 피어있는 벚꽃들과” “불빛이 벚꽃에 머물렀다 사라졌다” 하는 심상들을 아주 간단한 필치로 묘사해 가고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의혹은 여전히 시인을 감금한 채이다.



세계의 사물들은 언어로써 우리에게 인지되는 것은 아닌가? 또한 사물을 관통하는 언어에 있어서 갑작스레 팽창하는 지각 작용의 강렬함이야말로 근본적으로 우리가 말을 통하여 획득하는 한정된 표현들을 넘어서서 오히려 사물의 완전무결한 충만 상태에 이르게 하는 표현을 낳고 있는 것은 아닌가?

- 이브 본느파, 말의 진실.



현존은 단지 우리에게 현존에 대한 환영만을 제시하며, 아르카디아적인 환영은 제공하지 않는가? 말의 진실을 믿는다는 것은 그렇기에 환영을 초월하는 것이며, 충만한 언어를 통해 “아침 정원에서 절대의 경험”을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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