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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오래된 타자기 Nov 15. 2024

꽃의 기대

프랑스 문학의 오늘 41화

 [대문 사진] 르네 샤르


셀랑의 으깨어지고 쥐가 갉아먹은 듯한 시어에 매혹 당한 일군의 시인들 맞은편에는 셀랑의 그와 같은 언어를 가능케 해준 원천이 자리 잡고 있었다. 르네 샤르(René Char)의 아침의 언어, 좀 더 정확히 말해 그 다양한 시 작업을 통한 너무도 당연한 결과였던 초현실주의를 관통하고 저항운동에의 참여라는 통과의례마저 성공적으로 완수한 『아침 일찍 일어나는 사람들(Matinaux)』(1950)의 언어야말로 셀랑의 시를 가능케 했던 원천이었던 것이다.


셀랑의 시를 가능케 해준 르네 샤르의 『아침 일찍 일어나는 사람들』. 책띠에 적혀있는 “지옥 같은 집에서 탈출하라”는 출판사(갈리마르) 광고가 인상적이다.


단상 형식으로 쓴 이 짤막하고도 간결한 문장을 통해 샤르는 삶의 하루하루를 ‘다시 재편하기 위해’ 세계를 구성하는 구체적 요소들인 꽃이나 새, 섬광 등을 명확하게 구분하여 제시하려고 애썼다. 샤르의 이러한 열의는 크리스틴 뒤푸이(Christine Dupouy)의 표현을 빌자면, 시인에게 가장 중요한 특징으로 자리 잡은 ‘비극적 낙천주의’에 해당한다.


“떠오르는 태양의 정기는 잔인한 날과 어둠의 기억에도 불구하고 환희 자체이다. 이글거리는 색조는 새벽의 홍조를 띠어가고 있다.”


르네 샤르, 『아침 일찍 일어나는 사람들』, 문고판, 갈리마르.


샤르의 시적 태도를 따르려는 경향은 세기말을 향한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적어도 그들의 열정과 고유한 목소리를 잃지 않은 젊은 신인들은 샤르의 후예들에 가깝고, 또한 언어의 밀도 속에 감지되지 않는 변주들은 샤르 시에 가깝게 다가서고 있다. 『자갈(Gravier)』(1963)의 자크 뒤팽(Jacques Dupin), 『그(Il)』(1994)의 도미니크 후르꺄드(Dominique Fourcade)는 장-클로드 팽송(Jean–Claude Pinson)이 1995년에 펴낸 『시인으로 살다(Habiter en poète)』에서 지적하였듯이, 거의 신탁에 가까운 위험을 안고 있는 몰개성으로 일관하고 있다.


자크 뒤팽의 시집 『자갈』(1963)과 도미니크 후르꺄드의 시집 『그』(1994).
장-클로드 팽송의 평론집 『시인으로 살다』, 1995.


그러나 이러한 태도는 적어도 낡아빠진 서정주의에의 탐닉을 제어해 주는 것임에는 틀림없다. 더군다나 가브리엘 알땅(Gabrielle Althen)과 같은 샤르를 찬탄해 마지않는 이의 글 속에는 ‘나(je)’가 모든 권한을 행사하고 있기까지 하다(엄밀한 의미에서 가브리엘 알땅은 샤르를 찬탄하고만 있다고는 볼 수 없다. 그녀는 샤르만이 아니라 이슬 쉬흐 소흐그(Isle–sur–Sorgue : 프랑스 남부 아비뇽 인근의 마을)의 경치에 상당히 동화되어 있기 때문이다.).


“내 머물던 곳의 형적으로만 남은 사라진 하늘의 흰 낱말을 원하다. 날빛의 침상이던, 또는 바람과 합일의 연회를 펼치던 말, 그 낱말을.”(『계급(Hiérarchies)』, 1988).


가브리엘 알땅, 『계급』, 1988.


비르길리우스의 시적 통찰(詩觀)에 기초한 이러한 집착은 프랑스 현대시에 있어서 새로운 목가주의를 낳는 계기를 이루기도 했다. 이에 대한 가장 커다란 성과라 할 수 있는 작품이 바로 클로드 에스트방(Claude Esteban)의 『시 논리 비평(Critique de la raison poétique)』(1988)이라 할 수 있는데, 에스트방은 사물을 단지 시적 대상이라는 기도(企圖) 속에 포함할 것이 아니라 “사물 본연의 모습을 되찾기 위한 방법을 강구”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기까지 한다.


클로드 에스트방, 『시 논리 비평』, 1988.


이런 점에서 에스트방은 본느파에게 퐁쥬(Francis Ponge)보다도 더 큰 영향을 미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본느파는 자신의 저술 속에서 에스트방으로부터 받은 영향에 대해 긴 회고를 남긴 바 있다. 또한 본느파는 퐁쥬의 『사물들의 고정관념(Parti pris des choses)』(1941)을 넘어서는 ‘현존에 대한 기정관념’으로 나아간다.


프랑시스 퐁쥬, 『사물들의 고정관념』, 1941.


이러한 엄밀한 통찰의 과정을 거치면서 『명명(命名)에 대한 믿음(Croyant nommer)』(1971)과 『인간 실체와 동산의 계기(Conjoncture du corps et du jardin)』(1983)의 시인은 20세기가 다한 이 시점에서 언어적으로나 그 밖으로나 프랑스 문학에 있어서의 ‘새로운 시대에 상응하는 비르길리우스’를 고대하기까지 한다.


클로드 에스트방, 『명명(命名)에 대한 믿음』(1971)과 『인간 실체와 동산의 계기(Conjoncture du corps et du jardin)』(1983).


“상상하기를, 도저히 해독하기 어려웠던 전원시들과 마찬가지로 세계의 파괴된 풍경이 오로지 피폐화되고 황폐화되어 감에 따라 우리 인간 역시 정신적이고도 육체적인 고통을 감내해야만 했던 공간으로써의 시를 상상한다.


풍경(le paysage)과 마찬가지로 각자 주체(Sujet)로서 자리매김하고 있는 우리 인간 역시 익명화되고 우리를 조종하던 거짓된 객관화로부터 완벽히 벗어나 고유한 자리를 되찾아야만 할 것이다.


시는 그럼으로써 이를 가능케 하는 하나의 수단일 수 있다.

달리 말해, 우리 가운데 단 몇 사람만이라도 이를 자각하는데 그 중요성이 있다 하겠다. 또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깨달아야만 한다. 이제야말로 항상 부차적인 것으로(본느파의 또 다른 저술들을 보다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리고 어둠침침한 것으로, 또한 그 이상으로 수많은 유해하고도 불길한 몽상 속에 흐려진 지상(terre)의 참다운 근원으로 우리를 되돌아가게 한다는 사실 말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이미 알고 있듯이 지상은 근원적인 것이며, 시원(始原)의 풍경을 띤 것이기도 하고, 또한 거부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 이미 섬광을 발하던 신화들 가운데 일부는 백색의 유혹, 입을 벌리고 있는, 공허에의 끈질긴 유혹에 지향하면서 보들레르가 이야기한 바와 같이 ‘심연의 수사학’에 이어진 것이면서 또한 ‘서로 싸우고 있는 지상의 갈라진 내부’를 이루는 몇몇 노랫가락을 낳기도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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