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문학의 오늘 42화
[대문 사진] 이브 본느파
이 평화로운 지상으로 나를 돌려세우는
솟구치는 의문의 정체를 알고 싶을 뿐.
Je ne veux savoir la question qui monte
De cette terre en paix, je me détourne.
1987년에 발표한 다섯 번째 시집 『불빛도 없이 존재하는 것(Ce qui fut sans lumière)』의 권두시를 장식하고 있는 위 두 시구는 시적 인식에 있어서의 엘레아주의(irénisme : 소크라테스 이전에 감각으로 지각되는 운동이나 다양성을 미망(迷妄)이라 하여 이를 부정한 채, 부동유일(不動唯一)의 유(有)만을 진실이라고 주장하던 그리스 철학의 한 유파)를 표방한 것이면서, 다른 한 편으로 보면 본느파 자신의 시에 있어서 뒤로 한 발짝 물러서려는 태도를 함축하고 있는 의미심장한 표현에 해당한다.
여기서 지상(la terre)은 오늘을 살고 있는 우리가 여전히 생각하고 있듯 찢기고 고통받는 세계가 아니라, 평화스러운 곳이며, 시원(始原)으로서의 낙원을 주제로 한 목가주의에 해당하고, 랭보의 『모음들(Voyelles)』에 나오는 유(u)에 일치하는 초원, 다시 말해 “동물의 씨가 뿌려진 방목장의 평화”에 해당하는 그런 곳이다.
그렇기는 해도 이제까지 본느파가 열렬히 주장해 오던 것과의 갑작스런 방향 전환은 결코 아이러니한 것이 아니다. 이는 오히려 본느파가 세계의 불길한 의혹으로부터 등을 돌리고자 한 것이며, 이제부터는 호라티우스의 아르케오(l’arceot : 근본 원리)를 자신의 입장으로 견지하려는 태도를 표명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럼으로써 본느파는 의혹이 잠재해 있는 이 세계와 자연스럽게 등 돌릴 수 있었던 것이며, 또한 그러한 세계를 벗어날 수 있기까지 했다.
세 번째 시집 『금석문(Pierre écrite)』(1965)과 네 번째 시집 『문턱의 속임수에는(Dans le leurre du seuil)』(1975)에 등장하는 들판, 즉 시인이 그렇게도 사랑해 마지않던 프로방스의 대지는 이처럼 평화의 항구에 해당한다.
편도나무에 달빛이 머무는 고요하고도 평안한 밤에
흔들림조차 없는 나무들을 향해 나 있는
문을 미노라. 그리고 내 홀로 거기 머무노라.
J’ai à demeurer seul. J’ouvre la porte
Qui donne sur les amandiers dont rien ne bouge,
Si paisible à la nuit qui les vêt de lune.
밤은 섬광을 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달빛에 둘러싸인 채 평화로운 가운데 강물처럼 흐르고 있다. 고독은 충만함에의 계기를 이뤄가고 있기까지 하다. 또한 시에 등장하는 편도나무들엔 불안과 허무의 구덩이를 이루는 셀랑의 아몬드 씨를 발견하고자 하는 노력을 무위로 돌리기에 충분한 현존(la présence)을 향한 시선이 자리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차이에도 불구하고 본느파는 스스로 장례를 치러야만 했던 동료 시인의 작품 속에서 아몬드 씨가 지닌 의미와 그 중요성을 충분히 천착해 냈다.
1947년의 앙드레 브르통과 초현실주의와의 결별, 그리고 첫 번째 시집 『두브의 유동과 부동성에 대하여(Du mouvement et de l’immobilité de Douve)』를 간행했던 1953년, 문단 초창기의 본느파는 불멸의 시를 통하여 단순(le simple) – 사물의 단순함(la simplicité) – 에 관한 그의 모든 확신을 선취해 간다.
미셸 팽크(Michel Finck)가 1988년의 탁월한 저술(조세 꼬흐티(José Corti) 출판사에서 간행된 『이브 본느파 : 단순과 의미(Yves Bonnefoy : le simple et le sens)』를 가리킴)을 통해 이미 예증했듯이, 본느파에게 있어서 단순(le simple)은 그 자체로 의미(le sens)를 수반하는 것이었다. 제목은 물론이고 시마저 단순 과거 시제로 써 내려간 『불빛도 없이 존재하는 것(Ce qui fut sans lumière)』과 권두시 「추억(le souvenir)」은 시인이 “단순 사물들의 어렴풋이 어른거리는 상태를 보여 [주는]” 것만으로 만족한 듯하다. 본느파는 편도나무에게서 꽃 피는 철에 나무줄기를 가득 채운 수액의 흐름 외에는 그 어떤 신비도 이야기하지 않는다.
두 번째 시집 『사막만이 펼쳐진 어제(Hier régnant désert)』(1958)를 물들이고 있는 영원한 이별(l’adieu)을 노래하고 있는 시는 「지상의 찬가(Chant de la Terre)」의 종결 부분에서 노래하는 말러의 『작별 인사(Adieu)』의 경탄할 만한 성악가인 영국인 캐틀린 훼리에(Kathleen Ferrier)의 음성을 띠고 있으면서 동시에 어둠이 서서히 불빛 속에 드리워져 가고 있음을 묘사해 가고 있다.
시인은 “영원한 작별이라고?”라고 운을 뗀 뒤, “아니다. 그것은 내가 말하고자 한 말이 아니다”라고 이어간다. 또한 서막은 거의 프랑시스 잠을 연상케 하는 목가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면서 “여전히 플루트의 가느다란 선율로 반향”한다.
비르길리우스의 『목가(Bucoliques)』 첫째 장에서의 티티르(Tityre : 비르길리우스 『목가』에 나오는 목동)의 피리, 혹은 아르카디아의 요정인 목신(牧神, Syrinx)의 피리소리처럼 들리는 플루트의 가느다란 선율은 그러나 말라르메의 『목신의 오후(L’Après–midi d’un faune)』에서처럼 음울한 음조를 띠고 있지는 않다.
확실히 세상은 영원한 천국도 아니고, 잃어버린 낙원도 아니며, 되찾은 낙원은 더더욱 아니다. 역시 「작별 인사(L’Adieu)」란 제목이 붙은 본느파의 또 다른 시에서 “천국은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것으로 파악될 뿐이며, 그럼으로써 시는 천국의 흔적들을 찾아가는 노력으로 떠오른다.
본느파의 시는 여름의 광기, 다시 말해 뇌우를 예고하는 떨림의 폭발 또한 간과하지 않는다. 시어를 그대로 제목으로 취한 시 「벼락(La Foudre)」에서는 목신으로 비약함으로써 우리의 의식을 뒤흔들고 있는데, 이 시는 거무튀튀한 나무줄기 위에 하얗게 드러난 패인 상처로부터 흘러나오는 수액이 결코 말라비틀어진 그런 시는 아니다.
본느파의 시에 있어서 불안의 모티프들은 도처에 산재해 있다. 다시 말해 시간의 이행 속에 깃든 회피할 수 없는 죽음이 그런 경우에 속한다. 그러나 본느파는 언어라는 기적과도 같은 도구의 한계들 속에 죽음을 느끼고 있다고 보는 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불안의 모티프들은 증오에 의해 갈가리 찢긴, 부서진, 분열된 세상의 실상을 함축하고 있다고 보기는 어렵다. 비록 본느파의 시가 셀랑의 아몬드에서 쥐가 갉아먹다 남긴 듯한 시적 비의(秘義)를 향해 있다 하더라도 이는 어디까지나 어휘 자체에 대한 탐구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가 단순의 현존을 쟁취할 수 있으리라 믿었던 세상에 대해 회의하고 있는 불확실성은 그럼으로써 영원에 대한 의혹이며, 아울러 말이 지닌 가장 정확한 의미에서의 어휘를 취하여 이로써 표현해 내고자 했던 사물이 이와는 반대로 어휘 자체로부터 벗어나 있다는 사실에 대한 그 나름의 뼈아픈 자각이었던 셈이다.
예를 들어 하늘이라든가 뇌우를 동반한 하늘, 아이 혹은 아주 단순한 피상적인 어휘들이나 실체로부터 교묘하게 벗어나 있는 산딸기(la ronce ; 이 단어가 지닌 의미의 변용을 고려해 보라) 같은 어휘가 이에 해당한다(「그대는 가시 돋친 말을 하는 것인가(Le mot ronce, dit-tu)」).
시(詩), 만일 시라는 단어를 한마디로 표현할 수 있다면,
별이 이끄는 대로 끌려가든지 아니면 죽음밖에는
달리 어떻게 할 수 없는 한에 있어서
저 별빛을 여전히 끌어안아야만 한다는 걸 깨닫는 일 아니겠어?
사랑한다는 건 결국 허울 좋은 말처럼
아몬드 씨를 깨고 텅 빈 속을 들여다보는 일과 같은 것 아니겠어?
Et poésie, si ce mot est cicible,
N’est-ce pas de savoir, là où l’étoile
Parut conduire mais pour rien sinon la mort,
Aimer cette lumière encore? Aimer ouvrir
L’amande de l’absence dans la parole?
『반 플라톤(Anti-Platon)』의 저편에서, 좁은 의미에서 볼 때 상징주의의 방법론에 입각하여 이데아의 세계를 재발견하고자 한 본느파, 모든 문학 이론의 반대자인 시인은 점점 더 말라르메에게로 관심을 집중해 가면서 그 역시도 ‘공허하고 허망한 음악가’의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본느파는 그렇듯 자신의 저술들 속에서 『시의 위기(Crise de vers)』의 저자가 밤(nuit)이란 단어와 그가 표현하고자 했던 대상 사이에 놓인 간극에 대해 표명한 바 있는 불일치(le désaccord)에 갈수록 더 집착해가고 있는 듯 보인다. 본느파는 나아가 “나무에 어떤 매듭들의 / 의미-없음 위에 에워싸인” 눈의 하얀 겉장을 발견하기에 이른다.
『불빛도 없이 존재하는 것(Ce qui fut sans lumière)』의 두 번째 장에 수록된 마지막 시편들과 역시 1991년에 간행된 짧은 시집 『눈의 시작과 끝(Début et fin de la neige)』에서 시인을 사로잡은 눈으로 덮인 세상은 단지 시인의 몽상인가? 아니면 현실인가? 현존을 노래하는 시는 부재에 움푹 패여 있으며, 불가사의는 명백하게 드러나고, 단순은 그 말이 지닌 바와 같이 그렇게 단순하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더군다나 이 어휘가 담보해 내리라고는 상상치도 못한 의미들에 둘러싸여 있다.
시라는 공간으로 해석될 수 있는 프랑스로부터 멀리 떨어진 이탈리아에서 체류하면서 본느파의 지적 명상은 회화로부터 예술의 모든 형태들에게로 확대되어 간다. 그의 『꿈은 만토바에서 이루어진다(Un rève fait à Mantoue)』(1967)이나, 『1630년의 로마 : 최초의 바로크적 지평(Rome 1630 : l’horizon du premier Baroque)』(1970), 『알베르토 지아코메티, 작품 연표(Alberto Giacometti, Biographie d’une œuvre)』(1991), 『데생, 색채와 빛(Dessin, couleur et lumière)』(1995) 등은 어떤 것에 대한 계속적인 깊이 파고들기로 한정될 수 없는 아주 독특한 내용을 이루고 있는 지적인 도정을 구획해 준 것들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예술에 대한 본느파의 성찰은 그의 시와 함께 더욱 빛을 발하고 있으며, 또한 1981년에서 1993년에 이르는 기간 동안 꼴레쥬 드 프랑스 강단에서 행한, 시적 기능에 관한 비교 연구로 이어지고 있다.
다시 그의 시로 돌아가면, 본느파의 시는 미술 작품과의 유사성으로 말미암아 한층 풍부한 시적 세계를 구축한 것만큼은 틀림없다. 예를 들어 『두브의 유동과 부동에 대하여(Du mouvement et de l’immobilité de Douve)』의 「브란까치 성당(Chapelle Brancacci)」은 그림을 보는 듯한 은은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반 기술체(mi-récit)이며, 반 산문시(mi-poème en prose)에 속하는 『배후지(L’Arrière-pays)』(1972)는 미술 작품을 사진으로 찍은 도판 책자와 같이 연상될 정도다.
『불빛도 없이 존재하는 것(Ce qui fut sans lumière)』의 아름다운 시편들 가운데 한 편인 「데드랑을 바라보는 랑암(Dedlam, vu de Langham)」은 19세기 초의 영국 화가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의 회화를 떠올리게 만든다.
아울러 본느파가 회화로부터 포착해 낸 ‘충만함’은 그가 확신하기에 늘 주저해 왔던 실체(la réalité)에 대한 지각이란 충족감이었던 것이다. “아주 단순한 꽃의 / 향기 속에 영원히 숨 쉬고 있”기 위해서는 예술 작품에 대한 관조가 필요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예술 작품에 대한 명상은 시인에게 의혹투성이의 순간에조차 확신을 불어넣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일 수 있었다. 그런 점에서 「희망의 작업(La tâche d’espérance)」이란 제목이 붙은 시를 본느파가 창작한 것은 의미심장한 일일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셀랑을 자살로 내몬 절망감과 함께 시작품에서의 언어의 해체는 본느파로 하여금 또 다른 의미에서 셀랑의 시와도 같은 ‘이지튀르의 재난(Catastrophe d’Igitur)’이란 시를 낳게 했기 때문이다.
내 가노라,
테라스 너머 아몬드 나무들 가까이 지나가노라.
열매는 무르익는다.
아몬드를 잘라 내 불똥의 심장을 도려내노라.
Je vais,
Je passe près des amandiers sur la terrasse.
Le fruit est mûr.
J’ouvre l’amande et son cœur étincelle.
- 「세상 높이(Le haut du monde)」, VII
본느파에게 있어서 셀랑의 아몬드는 사유의 보석 그 자체였거니와 시에 있어서의 진주와도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