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을 바꾼 화가 마네』 188화
[대문 사진] 베르트 모리소, 「으젠 마네와 딸 쥴리」, 파리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
18장-1
(1882-1883)
기억하는가, 그대여!
세월이란 도박에 빠진 노름꾼이
속임수를 쓰지 않고도 돈을 따듯이
갑작스레 찾아온 행운과도 같다는 걸.
하현달처럼 대낮은 이지러지고
밤은 차오르는구나. 그대여, 기억하는가!
늘 갈증만 더해갈 뿐인
물시계조차도 물이 메말라 버렸구나.
- 샤를 보들레르
다가오는 미술전람회를 위해서는 바로 지금이야말로 콧노래를 부르던 것을 준비할 때라고 마네는 생각했다. 마네는 신이 나서 스스로 나팔 부는 병사이기를 꿈꿨을 뿐만 아니라 승마복을 입은 여인을 그리는 자신의 모습마저 상상해 보았다.
따뜻한 봄날에 그렇잖아도 몇 점의 스케치를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스케치들이 과연 유화로 완성되었을까? 고집불통의 사내처럼 마네는 화사한 꽃과 같은 여인네들을 화폭에 담으려고 갖은 애간장을 녹였다.
그러나 그 꿈은 여물지도 못한 채 무너졌다가 다시 살아나고 반복을 거듭했다. 다시 화폭에 메리를, 이르마를, 이사벨르를 담고자 애썼다. 자신이 사랑하는 여인들을 그리고 싶은 마음이었다. 그녀들이 과분하다 여길 정도로 애정을 과시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뿐이었다.
으젠과 베르트는 일주일 내내 서로 교대하며 마네를 찾아왔다. 귀스타브는 주말에만 지나가는 길에 잠시 들러 마네의 건강을 살폈다.
마네가 살고 있는 곳은 거대한 왕국을 방불케 했다.
누구나가 다 마네를 오매불망 장남 걱정뿐인 모친인 으제니로부터 눈에 띄지 않게 하고자 노력했다. 천만다행인 것은 어린 쥴리가 할머니 으제니의 마음을 온통 사로잡은 탓에 으제니는 오직 손녀를 돌보는 재미에 빠지고 아이는 할머니의 보살핌 속에 자라고 있어 장남까지 돌볼 여유가 없었다.
마네는 다른 한쪽 다리마저도 아파왔다. 상태를 호전시킬 방법은 전혀 없었던 걸까? 이를테면 약이라든가 수술을 한다든지 하는 방법으로 아픈 다리를 치유할 방법은? 어느 여름날 오후 햇살이 찬란한 가운데 가족들이 다 모인 자리에서 마네는 느닷없이 파리로 달려가야 한다고 실성한 사람처럼 고집을 피웠다.
“지금 당장?”
그렇다. 만사를 제쳐놓고 병이든 통증이든 상관없이 가다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빨리 달려가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걸을 수조차 없는 상태가 아닌가! 마네는 무슨 연유인지 난데없이 그동안 미뤄뒀던 일을 해야 한다면서 난리법석을 떨었다.
모친과 형제들은 마네더러 제발 움직이지 말고 편안히 쉬라고, 그렇지 않으면 아주 위험한 상황에 처할지도 모른다고 애원하듯 마네를 달랬다. 심심할 때마다 어린 비비를 돌보면서 귀애해 주고 예뻐해 주고 아이를 한 번 그림으로 그려보라는 것을 당부하기도 했다.
마네는 언제든지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화구를 갖춰놓은 채, 아이를 요모조모 살펴보기 시작했다. 그러던 중에 스케치한 그림이 물뿌리개 옆에 앉아있는 쥴리를 담은 그림이다.
아이의 천진난만한 모습을 스케치하는 동안 마네는 레옹에 대한 돌연하고도 까닭 모를 쓸쓸한 심정에 빨려 들어갔다. 마치 화상을 당한 것처럼 가슴을 저미는 회한마저 일었다.
마네가 더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그때, 레옹은 어떤 삶을 살아갈 것인가? 그 녀석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까? 오직 마네 곁에서 모든 관심을 쏟아부으면서 대부를 간호하고 있는 이 녀석에게는 대체 어떤 미래가 펼쳐질 것인가? 세상을 뜰 날이 바로 내일일 수도 있었다. 죽기 전에 빨리 이 녀석을 어떡해서든지 도와줄 방도를 찾아봐야 하는 것이 자신이 할 도리라고 마네는 생각했다.
마네 집안의 혈통을 이어받은 두 자식을 번갈아 쳐다보면서 마네는 두 자식 간에 어떤 불공평한 차별적 대우가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가슴을 저미는 아픔마저 느꼈다. 두 자식에 대한 대우가 너무나 어울리지 않을 만큼 대등하지 않았던 탓이었다.
그건 어느 모로 보나 자신의 잘못이었다. 이제야말로 화급히 레옹에게 해줄 수 있는 걸 다 해주어야만 할 때였다. 마네의 가계 혈통에 합당한 성씨를 부여할 수 없었던 사내아이에게 이제야말로 정당히 마네의 성씨를 부여하고 레옹이 떳떳한 신분으로 살아갈 수 있도록 모든 걸 유증해야 할 순간이었다. 시간이 촉박했다. 화급함이 마네의 가슴을 짓눌러왔다.
생 라자르 역에서 삯마차를 타면 곧장 마네 집안의 일을 도맡아 하고 있는 공증인 사무실로 달려갈 수 있었다. 그곳에서 마네는 허둥지둥 유언장을 작성했다.
“이 유언장에 따라 아내인 수잔은 내가 남긴 모든 재산을 레옹 코엘라에게 상속한다.
내 형제들은 전적으로 이에 따라야 한다.
가용할 수 있는 모든 현금 재산 역시 즉시로 레옹에게 상속한다.
앞으로 그림들을 처분할 시에는 우선적으로 레옹에게 5만 프랑을 지불하고 나머지는 아내 몫으로 한다.”
지나가는 길에 뒤레가 일하고 있는 일터엘 들러 마네는 그가 그린 그림 가운데 어떤 작품이든 상관없이 뒤레가 좋아할 만한 그림을 한 점 기증하겠다고 하면서 자신의 사후에 아틀리에에 남아있는 그림들을 매각하는 일을 전적으로 맡아줄 것을 부탁하고 보다 좋은 가격으로 그림들이 판매될 수 있도록 최선을 다 해줄 것 또한 부탁했다. 사후에.
그렇다. 유언장과 공증은 마네 자신이 사망해야만 효력을 발휘하는 것이었다. 임종이란 말조차도 이제 더 이상 마네에게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법이 없었다. 죽음을 바란 것은 아니지만, 점점 기력이 떨어지면서 통증마저 심해지자 죽는 것이 나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다시 시골로 가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콜레라 전염병이 온 파리를 휩쓸었다. 병실이 부족하여 새로 지은 오페라 건물마저 징발되는 지경이었다.
파리에 있기에는 몸이 너무 허약할 뿐만 아니라 공기마저도 더럽고 불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