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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영혼의 산

영혼의 산 - 겨울

2025년

by 오래된 타자기

[대문 사진] 프랑스 샤모니 마을에서 바라본 몽블랑 정상. © 오래된 타자기



몇 번이고 발길을 되돌리기만 했다. 무언가가 뒷덜미를 낚아채는 느낌을 받았을 적부터 숲속을 이리저리 헤매는 듯한 기분이었다. 새소리마저 들리지 않는 적막한 산의 고요에 영혼을 맡긴 대지, 산양들이 절벽을 타다 떨어뜨린 자갈들이 우르르 쾅쾅 마치 얼었던 눈이 녹아 흘러내리는 산사태처럼 들려올 때마다 길 잃은 양치기가 찾아헤매는 아늑한 대피소의 밤마저 그리웠다.


누군가 반드시 나타나 이 11월의 추위를 막아줄 것만 같은 꿈속을 떠돌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눈보라에 갇혀 보이지 않는 산 정상만큼이나 마을의 인기척마저 사라진 한기에 갇혀 몸을 부들부들 떠는 짐승처럼 후각의 가느다란 끈을 놓칠세라 비탈진 산기슭을 훑으며 먹이를 찾아 더듬거리는 짓만 재현될 뿐, 마음이 정해둔 나침판이 가리키는 영혼이 깃든 산은 끝내 찾을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오후 5시면 사위가 어둑해지고 발길이 끊긴 산길은 위험하다 못해 방향마저 잃기 십상이다. 겨울의 산행은 그만큼 어렵고 심신을 지치게 만든다. 젊음의 피가 온몸의 혈관을 타고 심장을 향하는 격정보다 더 뜨거운 구들장의 아랫목이 더 그리워지는 산행을 굳이 감행한 짓은 길이 산기슭 마을에서 끝나고 길의 끝까지 가야만이 직성이 풀리는 아련한 버릇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11월 하순 아직 마지막 마을로 향한 길이 끊기지 않았다는 건 하나의 이유였을뿐, 인생의 관목숲을 찾아헤매다 소중한 기억 하나쯤 되찾을 수 있겠다는 욕심마저 물거품이 된 지 오래다.


나는 그처럼 산을 멀리하고 살았다. 산이 나를 버렸는지도 몰랐다. 인생 모두가 즐거운 대지의 움푹 꺼진 분지에서의 하루하루가 빚어내는 일상의 소비와 향락과 권태라는 거품이 서로 적당히 버무려진 탁 트인 전망의 풍광으로 유혹하던 그 기나긴 세월 동안 나는 그처럼 산을 잊고 살았다. 산이 어떻게 인간에게 다가오는지 인간은 산을 어떻게 가깝게 느껴야 하는지조차 모르는 채.


늘 우울한 파티의 끝자락처럼 음울하게 그림자 진 바쁜 일상의 너울거림 속에 하루하루가 고단하게 다음날로 넘어가면서 힘없이 스러지는 나뭇가지 꺾이는 소리, 피를 토하듯 아침부터 들려오는 새들의 지저귐, 살아있음의 지옥으로 향할 동트는 시각의 부산스러움, 철근콘크리트 숲을 건너 뛴 산골짜기를 타고 넘나드는 물소리, 사붓사붓 밟히는 낙엽 잎들의 감촉, 거대한 나무뿌리 밑에서 기생하는 이름 모를 풀들과 버섯들의 교감, 꽃이 진 자리에 맺힌 붉은 열매들, 다람쥐가 쪼아먹다 팽개쳐버린 도토리 열매, 거무 축축한 침엽수를 타고 올라선 활엽수의 잎을 턴 가느다란 촉수들이 바람결에 내지르는 아우성에 반쯤 귀를 내맡기고 잠들다 보면 서둘러 집으로 도망치는 날짐승들의 나무 타는 곡예도 보일 듯 말 듯 산의 고요를 뒤흔드는 정상으로부터 불어오는 바람에 골짜기부터 눈보라가 시작된다.


중심을 잃고 흔들리는 산의 신들린 영혼처럼 여기저기서 돌풍이 일면서 허공의 서로 다른 기압 차이가 만들어낸 차갑고도 습한 냄새가 어둑해지는 야생의 숲을 갉아먹을 때 문명에 길들여진 이성의 촉수는 문명의 테두리를 벗어나 기억의 끈마저 놓친 야만의 감각을 되찾아간다.


나는 산길을 헤매는 것보다 서둘러 몸을 누일 곳을 찾아 헤맨다. 숲속으로 난 길은 띄엄띄엄 기슭에 자리한 집들을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 속에 살아났다 사라지게 만든다. 영혼이 이끄는 대로 세 나라 사이의 국경을 경계 지은 거대한 호수로 부는 물보라를 맞으며 콱 틀어진 운전대를 놓지 않고 달려온 덕분에 숲의 중간까지 오돌토돌 날카로워진 신경들을 전조등 삼아 달려왔는지도 모르겠다.


이유는 단 하나, 산에 정녕 영혼이 깃들어 있다면, 내 영혼과 산의 영혼이 어떻게 교감하는지를 확인하기 위한 줄달음이었다는 까닭, 사실은 십 년 넘게 그림자조차 밟아보지 못한 산이 드리운 그림자에 넋이 취해 포효하는 산짐승의 거친 본능만으로 야만에 길들여가는 중에 내 문명화의 거추장스런 이성의 외피만큼은 남김없이 벗어던지고 싶은 욕망이 저 내면 깊숙이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고 있었다는 점, 한겨울 고향에서 만난 눈보라에 꽁꽁 얼어붙던 그 젊음의 야생에 대한 기억을 온전히 되찾을 수만 있다면, 이까짓쯤 한기를 뚫고 정상으로 향할 4,810미터로 부는 눈보라쯤이야 오래도록 산자락 한번 마주하지 못한 잊힌, 잃어버린 감각을 되찾을 수 있겠거니 내딛는 발자국이 서툴다. 어설프다.


호모 호모 사피엔스의 혈통에 가려진 네안데르탈인의 무서운 본능! 날 것의 감성, 순 자연의 버림받은 영들로 무성한 숲에서 보낼 축제의 장이 과연 얼마쯤 남았을까 아직도 서두르기만 하는 본능적인 허둥댐이 낯설기만 하다. 그래도 안심인 것은 밤공기에도 언뜻언뜻 스쳐 지나갈 시원의 숲에서 솟아오르는 장작 태우는 냄새가 감미롭게 문명에 길들여진 감각에 세찬 회오리로 피어날 것을 기대하기에 만족스럽다.


모든 걸 내려놓고 싶다. 길 떠나 철든 사십 대의 늙수그레한 혈기처럼 산, 산의 기운에 감싸인 넋이 춤추는 이쯤에서 내 헐거워진 이성의 단추를 풀고 모든 걸 산 정상으로 부는 소용돌이에 내맡긴 날짐승의 오감마저 되찾고 싶다. 날름거리는 혓바닥에 돋는 야생의, 야만의 오톨도톨한 감각이 굳은살로 박힌 온전히 산이 품은 고요와 정적을 닮아가고 싶다. 그럴 때만이 오감이 자유로워지리라! 생애의 첫 발자국을 내디딜 때처럼.


몽탕베흐(Le Montenvers) 전망대에서 바라본 눈 녹은 알프스 협곡 메흐 드 글라스(Mer de Glace). © 오래된 타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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