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혼의 산 – 봄

2012년

by 오래된 타자기

[대문 사진] 몽블랑 © 오래된 타자기



눈이 떠지지 않는다. 바쁜 일과가 죽음의 너울처럼 어른거린다.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쉽지 않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이들이 드나드는 호텔의 아침 식당에서 마주치는 등산복 패닝을 입은 중년 남녀의 옷차림처럼 현란한 색깔도 없다.


등산이 아닌 등반을 즐기는 이들은 벌써 길을 떠났을 것이다. 그들은 본능적으로 숲의 냄새를 알고 있다. 기온이 상승하면서 산이 쏟아내는 푸릇함을 겪은 농축된 경험의 후각만으로 고산지대의 찬연히 내리 퍼붓는 봄기운을 짐작했으리 싶다.


아침 식당에 마지막으로 남은 게으른 등산객들이 남긴 식은 커피가 향을 잃어갈 즈음, 잠자리를 털고 일어나 식당으로 들어선다. 웨이터의 제지를 뚫고 마침내 창가 자리를 차지한 조용한 아침 식탁은 등산객들이 보이질 않아서 쾌적하다. 그들이 먹다 남긴 대지가 준 일용할 양식의 온갖 음식물 쓰레기들이 차례차례 치워지는 걸 바라보는 것만큼이나 역겨운 일도 없다.


문명화의 탈을 쓰고 산 깊숙한 곳에까지 와서 도살장에서 해체된 돼지의 오장육부가 들어있는 소시지를 굳이 골라 먹는 이 파렴치한 중년 남녀들이 산에서 무슨 짓을 벌일지는 안 봐도 짐작이 간다. 저녁마다 알코올로 소독하는 산의 정제되지 않은 향기를 그들은 야만적이라 규정하고 야생의 냄새를 알코올에 잠재우곤 한다. 밤늦게까지 마신 취기가 그들의 감각을 다시 문명 상태로 되돌려놓는 것이 아이러니일 뿐이다.


프랑스 알프스 깊은 골짜기 샤모니란 마을엔 일찍 파리 생활을 청산하고 일본인 부인 사이에서 낳은 자식들을 데리고 산을 찾아 새로운 삶을 시작한 한국인 사내가 살고 있다. 기념품 가게를 운영하며 관광업 일도 마다하지 않는 사내는 가끔 조난당한 등산객들을 구조하여 여러 차례 훌륭한 시민상도 받았다.


사내의 눈동자는 검은빛이나 산을 닮아서인지 늘 초롱초롱하다. 딱 두 번 만난 일이 있는데, 과묵한 사내는 늘 ‘예스‘만을 조용히 되뇐다. 삶이 긍정적이어서 그런가 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도시인과는 다른 사내만의 야생의 어조엔 침착함과 노련함 너머로 찬란한 광채를 머금은 솔직함이 묻어났다. 사내가 산에 살아서 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산의 정기를 닮아가는 것이라는 생각도 앞섰다. 세월이 흘렀으니 다시 만나게 되면 늙수그레한 노인네로 바뀌었을 용모일 터이지만, 변하지 않는 침착한 목소리와 뒤섞여 더 노련해진 야생의 향기가 온몸에서 체취로 풍길 것을 예감한다.


그러나 만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가 운영하는 가게나 숙박업소를 지나칠 일도 없을 것이다. 부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가끔 집 밖을 떠돌며 산을 찾아다니는 파리의 지인처럼 생경한 삶을 좇아 살 일도 없을 것이니, 산이 좋아 산 아랫마을에서 매일 산을 바라보며 사는 사내는 전혀 늙지 않을 것이다. 방주를 감행한 노아처럼 일흔 살이 되어도 더 늙는 법이 없을 것이다. 영생불사의 삶은 몇 백 년이 흘러도 변함없을 것이다.


햇수로 나이를 먹는 우리네와는 달리 사내의 영혼은 자연을 닮아 나이를 먹지 않는다. 다만 겨울, 봄, 여름, 가을… 마른 가지에 잎이 돋아났다가 꽃이 피고 씨를 흩뿌리다가 낙엽으로 내려앉는 순환의 절기만이 생애를 끈질긴 인내심으로 가득 채워간다.


버스를 타고 마을엘 들렀다. 기차역에서 운행하는 버스는 갈아탈 곳이 마땅치 않은 곳에서 하차할 위험을 줄여준다. 하루 종일 빈둥거릴 필요 없이 숙박지에 들러 짐을 풀고 멀리 물러나 앉은 산등성이를 지켜보게 해 준다.


어느 여름날 아내와 함께 장인 장모와 점심을 들던 테이블에 다시 찾아간 점심 식탁엔 낯선 새가 찾아와 빵 부스러기를 쪼아 먹어도 편안한 오후가 되면 봄꽃이 피어날 차례다. 산 아랫마을 집들의 테라스마다 수선화가 사라진 대신 제라늄이 심어져 있다. 어느 날 제라늄은 창턱에서 제각기의 색조로 피어날 것이다.


벌써 봄에서 여름으로 질주하는 계절의 뒤바뀜 속에 우리 인간만이 계절의 변화를 체득하며 살아간다. 인간처럼 미생물도 흙 속에서 꿈틀대며 기지개를 켠다. 오랜 추위와 냉혹한 한기를 털어버리고 봄 햇살에 나른한 탈피를 꿈꾼다. 생명을 지닌 자연의 모든 아름다움은 그렇듯 다듬어지지 않은 상태에서 본연의 순수함을 잃지 않으려 꿈틀댄다.


하지만 인간만이 이 자연스러운 변화에 이성적 판단을 들이댄다. 인위적으로 계절을 조장하고 자신을 속이고 감정을 색칠한다. 바라보는 것마다 모두 좁디좁은 가슴팍에 새겨둘 듯이 용량마저 작은 기억의 뇌수에 장을 담그듯 저장하려고만 든다.


사진을 찍고 동영상을 올리고 금방 갈아입은 옷을 벗어던지고 새로운 차림으로 카메라 앞에 포즈를 취하는 어설픔, 나는 그것이 마치 간밤에 도박장에서 돈을 잃은 젊은 부부가 다음날 모든 것이 맘에 안 들어 싸움박질하는 시간의 덧없는 패거리질에 불과한 뿔난 나이먹음처럼 철딱서니 없이 보채기만 하는 꼴로 비친다.


맘에 들지 않는 구석이 있으면 포기하면 그만이다. 굳이 인위적으로 뭔가를 작당하고 만들고자 하는 문명인의 버릇은 결코 핸드폰을 놓지 못한다. 인간의 됨됨이도 그렇다. 꼭 핸드폰 같다!


아침 식당에서 점심 식당으로 다시 저녁 식당으로 순례를 이어갈 때까지 늘 웅성거리는 도시인들과 함께 해야 한다. 그들을 떠나왔지만, 결국 그들 속으로 제 발로 걸어 들어간 셈이다.


이럴 땐 산 정상 전망대에 오르면 기분이 확 풀린다. 에귀 뒤 미디는 케이블카가 운행되지 않으니 대신 브레방 전망대로 향하면 된다. 가느다란 철사 줄 같은 것에 매달린 케이블카에서 내려다보는 산 아래 풍경은 인간이 사는 마을의 처연함을 일목요연하게 밝혀준다.


2012년 6월 브레방(Le Brévent ; 2,525미터) 전망대로 향한 길목에서. © 오래된 타자기


인생은 다 똑같다고 이야기해 주는 듯하다. 정상에서 바라보면 잘난 놈이나 못난 놈이나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그놈이 그놈이다. 있는 놈 없는 놈 구별할 수 없으니 다 똑같이 보인다. 대신 지나가는 바람 소리에 놀란 가슴이 천국이나 지옥이나 별반 구별 없이 느껴지기까지 한다.


발을 헛디디면 만사가 물거품이다. 거기서 생명줄이 끊어지고 신문이나 텔레비전 뉴스에 한 줄 이름을 올린 채 허무하게 모든 게 끝장나 버리고 만다. 봄이 온 줄도 모르고 봄을 찾아 나선 어리석음처럼 산인 줄도 모르고 산속 깊이 살과 뼈를 묻는 아련하고도 어처구니없는 인생의 한 자락이 엎어질 따름이다.



추락은 금물



등산 금지 표시는 남을 귀찮게 해선 안 된다는 경고 표시에 가깝다.


전망대에 오를 때처럼 긴장한 채, 다시 정상적으로 하산할 것!


기이한 행동을 하는 짓을 금하는 건 나와는 상관없는 이들을 괴롭히는 짓을 하지 말라는 경고다!


도시인은 이런 규칙에 익숙해진 사람이다.


난간에서 사진 찍는 이들을 멀찌감치 바라보며 몽블랑 정상이 구름옷을 벗는 찰나에 목이 멘다. 오늘은 분명 얼굴을 보여줄 터이다. 허리춤에 구름이 감긴 날 보았던 잿빛 허공과는 달리 잘 생긴 남녀노소의 합성된 사진처럼 봉우리 이곳저곳이 봄 햇살에 드러날 찰나다. 딱 한 장만의 사진을 찍기로 한다. 케이블카 탑승권과 함께 박제할 봄에 대한 기록으로 남기기 위해선 딱 한 장의 사진이 필요하다.


브레방 전망대에서 바라본 몽블랑(Le Mont Blanc ; 4,810미터). © 오래된 타자기


산을 내려가면 야생초로 담근 술 한 잔 해야겠다. 봄을 더 실감 나게 느끼기 위해서는 적당한 야생의 향취마저 필요하다. 깊어가는 밤의 어둑한 숲길을 걸어가기 위해서는 한낮의 기억을 송두리째 되감을 필요도 있다. 산속에 사는 정령들을 만나기 위해선 이 거추장스러운 문명이란 자태를 스스로 걷어차고 속까지 완전히 비운 가슴팍에 아직 한기를 품은 봄바람을 쓸어 담을 필요가 있다.


그렇듯 바람 부는 곳으로 걸어가다 보면 온갖 봄 향기가 진동하는 야생의 숲길과 마주하게 되리라. 그리고 그곳에서 비로소 소중한 봄의 향기를 한껏 들이마시리라. 이곳에 온 목적이 눈물 나게 실현될 꿈속…아득한 깊이로 내려앉는 문명화의 거추장스러운 옷마저 훌훌 벗어던지고 나면 의식 또한 한층 맑아지면서 산이 곁에 다가와 앉는 느낌에 빠져들 것이다. 아늑하고 속 깊은 살이 닿는 느낌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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