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대문 사진] 몽탕베흐, 샤모니. © 오래된 타자기
몽블랑 협곡에 들어앉은 마을 샤모니까지는 프랑스 수도 파리에서 자동차로 7시간 거리다. 기차로도 세 번 갈아타야 하고 7시간 넘게 소요된다. 무작정 행선지를 정해 놓고 가다 잠시 들를 수 있는 곳이 아니다. 맘 단단히 먹고 작정하고 떠나야만 하는 그런 곳이다.
기차 안에서 캐나다인 젊은 여행객에게 말을 건 적이 있다. 샤모니를 찾아온 이유가 뭔지를 물었던 것 같다. 산림이 우거진 캐나다에서, 하늘빛 호수가 도처에 자리 잡은 곳에서 굳이 몽블랑을 찾아온 이유를 캐물었다. ‘알프스‘라는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그때 나는 무언가를 떠올리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프스
영혼이 깃든 산
그곳을 찾아 다시 여행을 떠난 것은 2004년과 2011년의 일이다. 2011년은 스위스 제네바에서 살고 있는 브라질 작가를 만나러 가는 길에 무심히 들른 경우여서 온전히 산을 찾아간다고 말하기는 무리다. 그가 펴낸 소설 『순례자』가 시사하듯, 러시아 횡단열차를 타고 샤먼의 세계인 바이칼 호수를 종횡무진 누비는 작가의 상상력과 맞물려있는 성지 루르드에 관한 이야기는 알프스가 아니라 피레네산맥으로 자연 이어지기에 샤먼과 기독교의 차이만큼이나 피레네산맥과 알프스산맥은 거리가 멀다.
알프스를 향한 본격적인 여행은 그렇듯 2004년 여름이 더 솔직하다. 자동차로 피레네에서 알프스까지 3박 4일 만에 주파한 기록은 미친 듯 운전한 경험밖에는 남아있지 않지만, 그 긴 여정을 견뎌준 베엠베(BMW) 고물 자동차에게 고마울 따름이다.
에귀 뒤 미디에 올라 몽블랑을 바라보던 기억이 되풀이될 때까지 샤모니에서 등산열차를 타고 알프스 협곡 몽탕베흐의 메흐 드 글라스에 오른 기억이 붉은빛 송어 살처럼 투명하기만 하다. 날씨가 푸근했기에 점심 식당 테라스에 핀 제라늄이 더 소담스러웠던 여름 한낮, 등산열차는 힘겹게 산자락 비탈을 기어올라 마침내 눈이 녹아 바다를 이룬 몽탕베흐에 닿는다.
나는 그곳을 지옥 같은 설원의 대피소쯤으로 생각했다. 휘청거리는 두 다리에 힘을 주고 협곡으로 내려가 메흐 드 글라스 얼음 동굴에 들어선 순간 빙하가 삼킨 맑고도 투명한 대기가 영롱한 빛으로 떠오르는 광경을 목도하기까지 목이 컬컬해지는 느낌에 손으로 매만져보는 얼음의 감촉은 차갑다 못해 시리다. 구름 한 점 없는 하늘처럼.
개를 보았다. 설산에서 사는 생베르나(세인트버나드)를 처음 쓰다듬어 보았다. 침을 질질 흘리는 개를 껴안고 푸석푸석한 털이 주는 경쾌함이 마치도 눈밭에 넘어져 나도 모르게 입안으로 눈을 삼킨 느낌이다.
얼음 동굴 입구에서 만난 개
세인트버나드(Saint Bernard)
내게 눈빛으로 겨울산의 공포를 달래주던 개, 그때 저쪽 빙하의 굴곡을 거슬러 가는 한 떼의 사내들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무얼 찾아 헤매는 걸까? 자연인가? 인간이 남긴 흔적인가? 빙하 등반은 고고학적 탐사와도 같다. 우연히 빙하에 갇힌 생명체를 발견하기도 하고 얼음층을 통해 빙하의 축적 연도를 가늠해 보기도 한다. 전문 가이드를 따라 일렬로 진행되는 빙하 등반은 금석학자의 겸허한 태도에 비견된다. 난 그들의 올곧은 정신 상태를 짐작할 수 있다. 자연은 축복이고 인간마저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묘비명처럼 들려주는 매력이 빙하 탐사의 궁극적 목적임을 눈여겨본다.
그러면서도 한 모금의 물의 가치를 잊어버리고 사는 도시인의 잔망스러운 망각 증세를 탓할 뿐, 도시에 길들여진 육체는 쉽게 자연에 적응하지 못하고 갈증과 배고픔에 허덕인다. 길들여진 탓이다. 공해와 소음과 이웃과의 신경전, 소속감을 잃은 상실이 가져다준 폐해 속에서 발버둥 치는 도롱뇽 신세가 한탄스러워 발광하는 생명체의 한계를 깨닫기까지에는 산이 정말 높다.
고개를 쳐들고 올려다봐도 산 아래 자락부터 정상까지 모두 훑어내기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허공을 가로지르며 헬리콥터 한 대가 요란하게 협곡 너머로 사라져 가는 풍경 속에 플랫폼에 정차한 열차가 하산할 시각을 알리는 경적을 울린다.
그린란드에서처럼 빙하의 얼음조각을 맛보지 못한 허탈감이 끝내 뒷덜미를 잡는 몽탕베흐에서의 한나절이 끝나고 인근 호텔 테라스에서 마신 쓰디쓴 에스프레소 한 잔의 향이 입안을 맴돌 때쯤 바라본 산등성이에 조물주의 형상이 새겨져 있음을 눈치챈다.
인간을 창조한 자의 피곤함이 자연에 눈 녹듯 사라지는 평화, 그 엄중하고도 절제된 고요함에 깃든 날 것 그대로의 순연한 공기가 탁한 공기에 찌든 가슴을 쓸어내린다. 그래서 산에 오르는가 보다. 그래서 사람들이 너도나도 이 맑디맑은 공기를 체내에 흡입하려고 산에 오르는가 보다고 생각한다. 힘들여 담배 한 대를 꺼내 물면서…….
생각에 잠긴다. 오늘 중에 파리로 돌아가기는 틀렸다. 여름 샤모니 마을에서의 하룻밤은 짧기만 할 것이다. 그 짧은 밤에 늦가을처럼 써늘한 한기를 품고 돌아선 산등성이에 자태를 드러낸 검은 숲의 길고 긴 침묵을 떠올리자면 낮이 너무 길다. 긴 낮 짧은 밤사이의 혼돈, 자연상태에 적응하지 못한 비릿한 존재가 겪어야 할 고통은 이틀 낮과 하룻밤만으론 부족하다. 모든 걸 내려놓고 모든 걸 뒤로하고는 살아갈 수 없는 존재의 망설임은 계속된다. 그저 살아 숨 쉬는 껍데기뿐인 하루하루를 삶이라 규정해 버릇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상의 흐름 속에 이 여정조차 한낱 일탈일 뿐이다. 자연에 대한 모독, 그 거칠고도 험악한 모욕을 감내해야만 하는 자연은 인간과 그처럼 동떨어져 있다.
아내의 손을 모처럼 다시 잡고 샬레라 부르는 숙소를 빠져나와 여름밤 밤하늘을 올려다본다.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오리온 별자리를 향해 밤길을 걸어간다. 길 끝에 무한한 평화가 주어지길 바라면서, 바랄 뿐이지만 끝없이 이어질 삶의 나날을 떠올려본다. 삶의 주인공이 될 날을 그려보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