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들의 일상, 취리히 디자인 박물관

Design Museum

by 브레첼리나
designmuseum.png


스위스라고 하면 흔히 알프스, 시계, 금융을 떠올릴 것이다. 하지만 스위스를 설명할 때 빼놓을 수 없는 핵심적인 키워드가 있는데, 바로 디자인이다. 스위스는 1950년대 ‘국제주의 타이포그래피 스타일(International Typographic Style)’을 정의하며 전 세계 시각 디자인의 글로벌 표준을 세웠다.

일명 ‘스위스 스타일’이라 불리는 이 흐름의 핵심은 “디자인은 객관적이어야 한다”는 철학에 있다. 디자인을 예술적 기교로 보기보다, 정보를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전달하는 수단으로 여긴 것이다. 불필요한 장식을 걷어내고 메시지 그 자체에 집중하게 만드는 이 스타일의 가장 큰 특징은 그리드(Grid) 시스템이다. 화면을 수학적인 격자무늬로 나누고 그 칸에 맞춰 글자와 그림을 배치함으로써, 복잡한 정보에 질서를 부여하고 시각적 통일감을 완성한다.

여기에 삐침이 없는 산세리프(Sans-serif) 서체의 사용이 방점을 찍는다. 우리에게 익숙한 헬베티카(Helvetica)와 유니버스(Univers)가 그 대표적인 예로, 이 서체들은 중립적인 성격 덕분에 특정 문화권에 치우치지 않는 국제적인 감각을 전한다. 이 외에도 여백의 활용과 비대칭 구성 등을 통해 스위스가 정립한 시각적 질서는 오늘날 전 세계 디자인의 근간이 되었다.

취리히 디자인 박물관(Museum für Gestaltung Zürich)은 이처럼 스위스 디자인이 전 세계를 휩쓸던 찬란한 흐름을 기록하고 저장해 온 공간이다. 1875년 ‘공예박물관(Kunstgewerbemuseum)’이라는 이름으로 처음 문을 연 이래, 그 역사는 무려 150년에 이른다. 1930년대 본관 건물을 완공하며 건축적으로도 모더니즘의 중심지로 떠올랐으며, 이후 디자인·가구·그래픽·포스터·공예 컬렉션을 체계적으로 구축해 왔다. 특히 16만 점이 넘는 포스터 컬렉션은 세계 최대 규모 중 하나로 꼽히며 디자인 역사에서 독보적인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1968년, 현대적인 디자인 담론을 수용하기 위해 현재의 이름으로 변경하며 지금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Ausstellungsstrasse - 디자인 박물관 본관


image.png 출처: museum-gestaltung.ch


박물관 본관은 그 자체로 스위스 모더니즘 건축의 걸작이라 불린다. 2018년 대대적인 리모델링을 거쳐, 역사적 미학을 유지하면서도 현대적인 전시 인프라를 완벽히 갖춘 공간으로 거듭났다. 이곳은 스위스 디자인 유산의 본가로서 그 가치를 보존하고 전시하는 데 집중한다. 5만 점 이상의 가구와 산업 디자인 제품을 보유하고 있으며, 초기 인쇄물부터 현대 디지털 그래픽까지 방대한 그래픽 사료를 갖추고 있다. 또한 박물관의 전신인 19세기 중반의 섬유, 세라믹, 유리 공예 등 귀중한 공예 컬렉션도 만나볼 수 있다.

상설전은 스위스 디자인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작품들로 구성되어, 방문객들이 스위스 미학의 역사를 한눈에 이해할 수 있도록 돕는다. 기획전으로는 시대를 관통하는 테마 전시나 세계적인 디자이너들의 회고전이 주로 열린다.

이곳은 단순히 작품을 보는 것에 그치지 않는다. 어린이를 위한 디자인 체험부터 전문가를 위한 심화 워크숍, 강연, 심포지엄 등 풍성한 프로그램이 활발히 개최된다. 다양한 세대가 디자인적 사고를 직접 경험하며 디자인의 미학을 배워가는, 그야말로 풍요로운 영감의 장소라 할 수 있다.




토니 아레알(Toni-Areal)


취리히 디자인 박물관의 두 번째 거점인 토니 아레알은 과거 우유 공장을 개조하여 탄생한 역동적인 공간이다. 현재 취리히 예술대학(ZHdK) 캠퍼스와 박물관이 한 지붕 아래 공존하고 있어, 세 거점 중 가장 현대적이고 에너지가 넘친다. 본관이 디자인의 고전과 역사를 깊이 있게 다룬다면, 토니 아레알은 현재 진행형인 디자인 이슈에 집중한다. 디지털 미디어, 인터랙션 디자인, 지속 가능한 디자인 등 최신 트렌드를 반영한 전시가 이곳에서 활발히 펼쳐진다.

이곳의 가장 큰 매력은 '개방형 수장고(Schaudepot)'이다. 본관에 다 담지 못한 50만 점 이상의 방대한 디자인, 그래픽, 공예, 포스터 아카이브가 이곳에 보관되어 있다. 디자인 전공자와 연구자들이 즐겨 찾는 이유도 바로 이 압도적인 사료 덕분이다. 대학과 함께 위치한 덕분에 디자인 아카이브 도서관과 연구소 등 동시대 디자인을 탐구하는 학문적 장소이자, 새로운 아이디어가 탄생하는 창조적인 실험실 역할을 하고 있다.


image.png 출처: zuercher-museen.ch




파빌리온 르 코르뷔지에 (Pavillon Le Corbusier)


취리히 호숫가에 보석처럼 자리 잡은 파빌리온 르 코르뷔지에는 건축의 거장 르 코르뷔지에의 최후 건축물이다. 그의 건축 철학이 집대성된 이곳은 그가 세상을 떠나기 전 설계를 마쳤으며, 사후인 1967년에 완공되었다. 2019년부터 취리히 디자인 박물관이 위탁 운영을 맡아 건축과 예술, 디자인을 넘나드는 전시를 선보이고 있다.

이 건축물의 가장 큰 특징은 ‘모듈러(Modulor) 시스템’의 적용이다. 인간의 신체 비율을 수학적으로 계산한 이 시스템을 건물 전체에 도입하여 계단 높이, 천장 높이, 창문의 너비에 이르기까지 모든 공간을 인간에게 최적화된 비례로 설계했다. 또한 거대한 우산처럼 보이는 독특한 지붕 구조는 햇빛과 비를 막아주는 실용적 기능과 동시에, 건물이 지면에서 떠 있는 듯한 가벼운 시각적 효과를 준다. 옥상 정원에 오르면 취리히 호수와 공원의 풍경을 입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다.

야외 공원에 위치한 특성상 이곳은 4월부터 11월까지만 시즌제로 운영된다. 전문가의 상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는 건축 가이드 투어가 마련되어 있으며, 방문객들은 공원 전체를 산책하며 건축물 그 자체를 하나의 예술로 경험하게 된다. 내부에서는 르 코르뷔지에의 드로잉과 회화, 가구 디자인 등 그의 폭넓은 작품 세계를 함께 만날 수 있어, 거장의 예술과 철학을 온전히 마주하기에 더할 나위 없는 공간이다.

image.png 출처: zuerich.com




위의 세 공간은 모두 ‘취리히 디자인 박물관’이라는 이름 아래 시내 곳곳에 자리 잡고 있다. 이처럼 박물관이 도시 전체로 퍼져 있다는 것은 디자인이 특정 계층의 전유물이 아니라 시민들의 일상에 깊숙이 스며들어 있음을 의미한다. 즉, 디자인을 공원이나 도서관처럼 누구나 언제든 누려야 할 기본적인 공공 인프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세 거점을 통해 확인한 취리히의 모습은 디자인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여기는 ‘디자인 강국’의 면모 그 자체다. 취리히는 디자인이 단순히 보기에 좋은 것을 넘어, 과거를 기억하고 현재의 문제를 해결하며 미래의 미학을 제시하는 도시의 가장 중요한 작동 원리임을 우리에게 일깨워주고 있다.




취리히 디자인 박물관

https://museum-gestaltung.ch/en

금요일 연재
이전 01화브랜드의 얼굴, 로고 디자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