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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윤희 Jun 03. 2023

우당탕탕 대만여행 14-다시 만난 23년 전 라이선생님

열여섯 살 사춘기 딸과 다시 대만 여행

2023년 2월 26일(일), 대만 여행 6일째.


"엄마, 이제야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아요."


타이중 고속철도역에서 호텔로 가기 위해 택시를 탔다. 창밖을 바라보던 아이가 이제야 마음이 편해진다고 말하는데 얼굴 표정을 보니 정말 밝아진 것도 같았다. 사실 나도 같은 느낌이었다. 타이베이는 올드 시티이기도 하고 겨울철에 날씨도 좋지 않은 탓에(겨울에는 부슬비 내리는 날이 잦다.) 좀 우중충한 느낌이 있다. 이번 타이베이 여행 동안에도 줄곧 날이 흐렸는데 타이중에 와 엿새만에 화창한 하늘을 보니 기분이 좋아졌다. 택시 창 너머 보이는 풍경은 신도시의 빌딩이었다. 빌딩이 즐비한 도시 풍경은 어디를 가도 비슷하지 않은가. 우리나라와 경치가 비슷한 것도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호텔 체크인 후 바로 택시를 타고 객가 요리 전문 식당인 '객가본색(客家本色)'으로 향했다. 3년 전 라이 선생님, 치엔 선생님과 이 식당에서 식사를 했는데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그래서 올해 다시 한번 객가 음식을 먹자고 내가 먼저 제안했다. 나, 딸아이, 라이 선생님, 치엔 선생님, 그리고 치엔 선생님의 15개월 된 아들, 이렇게 말이다. 




라이 선생님은 23년 전 어학연수 시절의 선생님이다. 예쁜 외모에 직선적이고 쿨한 성격을 가진 그야말로 반전매력 넘치는 선생님으로 당시 같은 반의 일본 친구들은 선생님을 조금 어려워했는데 나는 불편한 걸 몰랐다. 그래서인지 가끔이지만 페이스북을 통해 메시지를 주고받으며 연락을 유지했고, 대만에 갈 때마다 한 번씩 만남을 가졌었다. 


"인시(내 이름의 중국어 버전), 부탁이 하나 있어. 내 아들 교실에서 다문화 수업이 있는데 네가 징런(함께 어학연수를 했던 대학 친구)과 함께 한국 문화를 소개해 줄 수 있을까?"


23년 전 어느 날, 정확한 문장은 기억나지 않지만 라이 선생님이 대략 이런 말로 부탁을 해왔다. 큰아들이 초등학교 5학년이었는데, 선생님이 어학당 교사인 것을 알고 학교에서 부탁을 한 모양이었다. 한국의 위치, 한글, 명절 등을 소개했고 한복을 아이들에게 입혀보기도 했다. 수업을 어떻게 했는지 기억은 희미하다. 다만 수업이 끝났을 때 수고했다며 등을 토닥이던 선생님이 "아고, 등이 땀으로 다 젖었네."라고 했던 것으로 보아 엄청 긴장했던 것만은 틀림없다.



며칠 뒤 라이 선생님이 우리에게 고마웠는지 주말에 짧은 여행을 다녀오자고 하셨다. 당일 약속 장소에 나가보니 일본 남학생 한 명, 또 다른 어학당 선생님 한 명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선생님의 낡은 빨간 자동차를 타고 두 시간쯤 간 것 같다. 도착해 보니 '뱀처럼 긴 가마'라는 뜻의 '셔 야오(蛇窯 사요)'로 유명한 '수이리(水里)'라는 도자기 마을이었다. 


'뱀처럼 긴 가마'라는 뜻의 '셔 야오(蛇窯 사요)'


IMF 시대에 주식 폭락으로 가세가 기운 탓에 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 지원 없이 어학연수 생활을 하던 터라 자취방과 숙소만을 오갈 뿐 여행은 꿈도 못 꾸고 있었다. 이날의 짧은 여행이 지금까지 기억에 생생한 것을 보면 여행은 몹시 즐거웠고 선생님의 배려는 고마웠던 것 같다.  


그때 내가 수업해 주었던 그 아들이 지금은 서른 살이 훌쩍 넘었다 하니 세월이 참 빠르다는 진부한 말이 절로 나온다. 아들, 딸과 함께 찍은 사진을 보여주며 아들이 TSMC에서 일한다고 슬쩍 자랑을 하신다. 그 말을 듣자마자 딸아이와의 나이 차이를 계산하며 '5년만 일찍 아이를 낳았어도 사위를 삼을 수 있었는데...'라고 생각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피식 웃었다. 



"오늘 식사는 우리가 낸다."


선생님은 무엇을 드시겠냐며 주동적으로 주문하는 모습을 보고 나의 계산 의지를 눈치 챈 선생님이 "네가 사려는 모양인데 그건 안될 말"이라며 하신 말씀이다. 


"오늘은 제가 사려고 한국에서부터 마음먹고 왔어요. 예전에 선생님이 대접해 주셨는데 이번에도 대접받으면 제가 마음이 편치 않아요."
"아니야. 아니야. 너네가 멀리서 왔는데 그럴 수 없지."


결론이 나지 않자 일단 맛있게 먹고 나중에 다시 얘기하기로 했다. 잠시 후 라이 선생님이 아이 엄마 편하게 식사하라며 치엔 선생님의 아이를 데리고 잠시 밖으로 나갔다. 이 틈을 타 한국에서 갈고닦은 계산 노하우를 발휘하여 결재에 성공했다. 잠시 후 내가 계산한 것을 알고는 손님에게 이럴 순 없다는 선생님께, 


"타이중은 내 구역이나 마찬가지이니 저는 손님이라고 할 수 없지요. 게다가 이번에도 저한테 돈 못 내게 하시면 제가 다음에 또 대만에 왔을 때 선생님께 만나자고 맘 편하게 전화드리지 못해요" 
"이번에도 제가 계산하지 않는 건 불법이에요."
"다음에 대만 오면 연락드릴 테니 그때는 샤오롱빠오 사주세요."라고 설득했다. 


반가운 사람과의 만남, 유쾌한 수다, 맛있는 식사로 일주일의 대만 여행이 따뜻하고 만족스럽게 마무리되었다. 식당 문 앞에서 모두 함께 사진을 찍으려고 지나가는 사람에게 부탁했더니 앉았다 섰다 하며 최선을 다해 사진을 찍어주었다. 


아쉬운 만남을 뒤로하고 딸아이와 나는 23년 전 내가 살았던, 그리고 3년 전 딸아이와 한 달 지냈던 동하이비에슈(東海別墅 동해 별장이라는 뜻)를 돌아보고 동해대학도 거닐었다. 


타이중 최대의 야시장인 펑지아 야시장까지 방문했으니 계획한 모든 일정이 진짜 끝났다. 이제 내일 아침 공항버스를 타고 타오위엔 공항으로 가 출국만 하면 되는데 라이 선생님의 말 한마디가 계속 신경 쓰였다.


"인시, 모레인 2월 28일, 228 기념일까지 연휴야. 그래서 내일 공항 가는 고속도로가 막힐 것 같으니 일찍 출발하는 게 좋아."


다행히 시간 넉넉하게 잡고 공항버스를 예약하였기에 고민 끝에 '에라 모르겠다' 정신을 발휘하여 그냥 시간 변경 없이 출발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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