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번아웃
"유진, 오늘은 점심 먹었어?"
"ㅎㅎㅎ 아이고, 벌써 또 2시가 지나버렸네..."
"으이구...그럴 줄 알았지! 여기, 이거 먹고 일해-"
내 팀의 막내 디자이너가 내게 머핀을 내밀었다. 점심 식사 후 다른 팀원과 커피를 마시러 나갔다가 내가 또 점심을 거를 것을 짐작해서 사 온, 단 맛 가득한 큰 머핀이었다. 나는 멋쩍게 웃으면서 감사하게 그 머핀을 받았다. 그리고 종이 포장지를 벗기고 책상에 있던 커피 한 모금과 함께 우적 베어 먹었다.
벌써 몇 주째 점심을 걸렀지만 배가 고픈지도 모르게 바쁜 하루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아니, 사실 정신을 차려보니 대부분 저녁 식사를 첫 끼로 때우며 일을 한지 이미 여러 달을 훌쩍 넘었다. 아침 9시 반부터 시작되는 미팅은 화장실에 들를 시간도 없이 'back to back'으로 저녁까지 이어졌다.
그래도 점심들은 먹고 일을 할 거 아니야...
물론, 일반적으로 사람들의 구글 캘린더에는 점심시간은 일정이 없는 빈칸으로 남아있거나, 일부러 'Lunch time'이라는 미팅 제목으로 한 시간 반 정도 일정을 block 해놓고는 암묵적인 존중을 요구한다. 나 또한 마찬가지였지만, 관리자들의 경우 워낙 많은 일정 때문에 급하고 미룰 수 없는 미팅을 비어있어 마땅한 점심시간에 예약당하기도 한다.
또, 운이 좋아 미팅이 없는 점심시간은 미팅 외에 처리해야 하는 일들을 - 이 말인즉, 하루를 가득 채운 그 많은 미팅들은 사실 부가적인 스케줄인 - 집중해서 바짝 처리할 수 있는 유일한 시간이었기 때문에, 오전 마지막 미팅에서 돌아오는 대로 노이즈 캔슬링이 되는 헤드셋을 바짝 쓰고는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힐 수 있는 'Musical Therapy' 앨범을 재생하고 볼륨을 크게 틀어 집중을 할 준비를 마친 후, 팀원들 작업 확인 및 피드백 전달, 밀린 이메일과 Slack에 기다리는 답변 보내기, 그리고 분기별 팀 플랜을 집중해서 한 시간 안에 작업해야 했다. 그렇게 해야 그날은 야근이 늦어지지 않았다.
코로나 전까지 어느 정도의 규모 있는 실리콘밸리의 회사들은 회사 내에 식당에서 영양가 있고 좋은 퀄리티의 음식을 제공하는 것이 기본 benefit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식당이 없으면 케이터링 서비스를 통해서라도 점심은 무엇을 먹을지, 어디에서 먹을지 고민하고 시간을 보내는 대신 회사에서 좋은 영양식의 음식을 제공해서 열심히 일하는 직원들의 건강을 지원하고, 그 덕분에 직원들은 그들의 업무에만 신경을 쓸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는 것이다. 물론 한편으로는 마치 공부에만 신경 써야 했던 학창 시절, 어머니께서 '너는 오직 공부에만 집중하고 전념하거라...' 하고 책상으로 영양가 있는 식사와 간식을 가져다주신 것과 같은 맥락이기도 하다.
내가 근무하던 회사는 진심으로 열정인 food팀이 있었다. 특히나 농장에서 바로 가져오는 유기농 재료를 사용해서 각국에서 온 직원들의 입맛을 신경 써서 매일 다른 나라의 음식을 돌아가며 테마로 정해서 아침, 점심 저녁 식사 메뉴를 구성했고, 또, 여느 카페, 레스토랑과 비교를 해보면 오히려 더 나은 퀄리티와 맛을 제공해주었다. 그것뿐만이 아니었다. 각층에 있는 2개의 카페 공간마다 설치된 에스프레소 기계과 여러 가지의 종류의 유기농 차, 그리고 펍에서만 봄직한 많은 탭들은 여러 종류의 홈메이드 콤부차, 홈메이드 음료들, 콜드 브루, 그리고 저녁 4시 이후에 오픈하는 여러 종류의 맥주와 와인을 끊임없이 직원들의 잔에 언제든 채워줄 준비가 되어있었다. 아, 종종 점심식사와 함께 나오는 아침 근무의 스트레스를 모두 잊어버릴 수 있는 달달하고 예쁜 디저트와 각 층 카페에 있는 건강식 홈메이드 스낵들이 있는 것은 안 비밀이다.
이런 곳에서 아침과 점심을 거를 수가 있다고?? 그러게나 말이다... 그러니 내가 더군다나 얼마나 안타까웠을지... 혹시 짐작이 슬쩍 될 수 있을까?
회사 식당의 점심시간은 정확하게 12시부터 2시까지이다. 그리고 그날도 정신을 차려보니 안타깝게 5분을 넘긴 2시였다.
다들 너같이 이렇게 일해??
No. 아니. 내 주변을 잠시 둘러보면 사실 20년 동안 늘 일련의 패턴들을 구경해왔다. 한국에서든 해외에서든 어떤 이들은 늘 여유롭고 고상한 매일을 보냈다. 늘 커피숖에 가서 커피를 마시고 수다를 떠는 시간도 있고, 인터넷 쇼핑을 하거나 동영상을 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고 6시가 되기 전부터 회사에 자리들이 하나둘씩 비어갔다.
또 이 곳에서는 점심시간에 복에 겨운 사내 식단의 메뉴가 '지겨워져' 흥미가 떨어진 사람들, 혹은 아무리 맛있는 점심 메뉴라 한들, 사무실에서 벗어나 광합성이 필요한 사람들은 삼삼오오 선글라스를 쓰고 밖으로 나가 근처의 카페나 식당에서 여유 있는 점심 식사를 하고 돌아왔다.
또, 4시 즈음부터는 회사 근처의 바에서 칵테일을 마시면서 동료들과 하하호호 즐기는 사진을 소셜미디어에 올리기도 했다. 가끔 여유 있어 보이는 그들과 대화를 해보면 늘 그들의 바쁜 스케줄을 투정하기도 하고, 또 업무를 요청받으면 시간이 없다며 거절을 하기도 했다.
사실 그렇게 쉬엄쉬엄 일하면서 매일 시간이 없다며 투덜대는 그들이 한심했었다. 그런데 20년이 지난 후에야 겨우 깨달은 것이 있었다. 문제는 그들이 게으르고 일을 안 하는 것이 아니었다. 내가 일을 비정상적으로 해내고 있던 것이었다.
점쟁이들이 그렇게 말하던 일복은 이런 것이었나 보다. 처음부터 나는 언제나 '일'이 우선순위였고, 머릿속은 온통 '일'로 가득한 사람이었다.
삶은 마라톤이다. 그리고 그 긴 시간을 달려가기 위해 '삶의 의미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일과 돈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Work life Balance'를 잘하는 그들이 안정된 심호흡으로 꾸준하게 마라톤을 완주할 수 있는 주자들이었고, 그렇지 않았던 나는 나의 세 번째 번아웃을 맞게 되었다.
머핀을 다 베어 먹기도 전에 노트북 오른쪽 상단에 다음 미팅 알림이 떴다. 다음 미팅 장소는 거리가 조금 있었다. 노트북, 배지를 챙겨서는 허겁지겁 4층으로 올라갔다.
아직 아무도 오지 않았다. 다행이다. 이 짧은 기회를 틈타 얼른 화장실에 다녀와야겠다.
- Photo by 선인장. San Francisco, U.S.A