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에서도 그 일은 일어났다.
그 일이 벌어진 날은 어느 일요일 오후의 일이었는데 나는 그 전날까지 아들과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싸우고 있었다. 아들은 나와 말싸움 도중 감정이 격해지면 울기도 많이 울었지만 과격한 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탁자를 손으로 쾅 내리치기도 하고, 눈이 반쯤 돌아간 듯한 이성을 잃은듯한 모습에 나도 조금은 무서울 때가 있었다. '이런 상황이 격해지면 매맞는 엄마가 되는게 아닐까?'하는 걱정과 함께. 하지만 감정적으로 밀리면 끝장이라는 생각 역시 있었던 게 사실이다. 나는 이제 5학년때와는 달리 조금 더 공부를 해야될 것 같은데 격렬하게 거부하는 아들의 모습에 '이렇게 상황파악이 안되나'하면서 실망스러운 마음이 있었고, 아들은 아들대로 '열심히 한다고 하는데 엄마는 만족을 못한다'며 억울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녁에 집에 들어온 남편은 토요일에도 아들과 내가 냉전중이자 아들과 대화를 한다며 방으로 들어갔는데 아들녀석의 소위 말하는 싸가지없는 말투에도 화를 내지않고 차분히 이야기를 이어나가고 있었다. 나는 1시간가량 이어지는 그들의 대화에는 별 관심도 없이 그저 시간이 아깝다고 생각했고 아들이 빨리 학습지 과제를 해치우기만 바랬다. 학습지를 10여과목 하다보니 월/수/금 일주일에 3일이나 학습지 선생님이 오셔서 해내야할 과제가 많았기 때문이다. 이야기가 길어지는 바람에 어느새 시간이 11시를 훌쩍 넘겨 남편과 아들은 그만 자기로 하고 대화를 종료하였다. 나는 아들과 이야기 하는순간 화가 바로 올라오는데 어떻게 남편이 화를 내지않고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역시 이래서 아들에겐 아빠가 필요하구나'하고 느끼긴 했다.
그 다음날 아침.
울고 신경쓰면 머리가 아파지는 편두통증상때문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기가 너무 힘이 들었다. 내 편두통 증상은 심각해 한번 편두통이 발발하면 하루종일 아무것도 못 먹고 구토를 하는 날들이 많았다. 심각할때는 삼일간이나 구토를 한 적도 있어서 나는 편두통 약을 한 알 삼키고는 다시 침대에 누웠다. 남편과 아이가 뭔가 이야기를 하는 것 같았지만 몸이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나가 볼 엄두를 내지 못했다. 남편의 목소리가 계속 커져서 대화내용을 들어보니 남편이 아이에게 화를 내고 있었다. 머리가 무거웠지만 억지로 몸을 일으켜 나간 거실에서 남편은 아이에게 불같이 화를 내고 있었고, 자세한 내용을 들어보니 아이가 남편을 속였다는 거다.
뭘 얼마나 속인걸까? 남편은 엄마가 너때문에 신경쓰느라 또 머리가 아프니 아침에 공부를 해서 엄마의 기분을 풀어주자고 말한 모양이다. 아이도 (겉으로는) 동의했지만 사실 어제부터 마음이 해결되지 않았으니 쉽게 공부가 되었을 리 없다. 그래서 공부를 하는 척 하고 핸드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던 거다. 나는 아들이 마음이 동해야만 공부를 하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남편은 그렇게 세세한 부분까지는 잘 알아채지 못하고 있었다. 전날부터 충분히 아들의 마음을 헤아려 주었다고 생각한 남편은 아들이 자신이 참아줄 수 있는 한계를 넘었다고 생각했고 더 이상은 참을 수 없다며 핸드폰을 가지고 오라고 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나는 남편이 (아들은 아빠가) 핸드폰을 부술리는 없다고 생각했었다.
남편은 망치를 가지고 와서 아들에게 건네주었다. "네가 깨라"는 말과 함께.
나는 아들이 아빠에게 잘못했다고 빌거라고 생각했지만 아들은 잠시 고민하는 듯 하더니 울지도 않고 망치를 건네받아 핸드폰을 가격했다. 그것도 5번이나. 당연히 핸드폰은 액정부터 산산조각이 났고 파편은 거실의 여러 곳으로 튀었다. 핸드폰이 처참하게 부서진 걸 확인한 아들의 눈에는 눈물이 고였지만 내 예상처럼 엉엉 울거나 하진 않았다. 남편은 화가 많이 났는데도 불구하고 아들에게 저리 가 있으라고 한 뒤, 거실에 튄 파편을 손수 치웠다. 나는 옆에서 그걸 보면서도 이 광경이 믿기지가 않았다. 모든게 약간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울고있는 아들. 청소기도 아니고 빗자루를 갖고 유리파편을 치우고 있는 남편의 모습. 그리고 머리가 아파서 멍한채로 망연자실한 나. 남편은 도대체 왜 핸드폰을 깬 걸까? 나중에 남편에게 물어본 결과, 아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았기 때문에 벌을 받아야 한다고 했다. 물론 남편이 약속을 매우 중시하는 사람인 것은 나도 잘 알고있다. 하지만 그게 핸드폰을 깰 정도의 일이었나? 그건 동의하기 어렵다. 남편이 정말 부수고 싶었던 것이 핸드폰이었는지, 아니면 지금의 상황이었는지, 그것도 아니면 아들과 내게 보내는 일종의 경고장이었는지 솔직히 지금도 잘 모르겠다. 어쨌든 그 이후 시간은 어떻게 갔는지도 모르게 흘러갔다.
월요일.
아들과 남편은 각각 등교와 출근을 했고 학교에서 돌아온 아들은 핸드폰을 부수며 감정폭발을 해서인지 감정적으로 차분해져 있었다. 우리는 특별히 화해를 하지 않았지만 뭔가 묘한 동질감을 느꼈고 화해 아닌 화해를 했다. 그간 아들의 감정쓰레기통이 된 것 같다는 느낌을 받고 있었던 나는 '폭력을 쓸때 네가 얼마나 무서웠는지' 이야기했고, 아들은 자신의 행동이 그렇게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에 놀란 듯 했다. 남편은 저녁에 내게 살짝 전화해 아들에게 어떤 핸드폰을 사줄까 이야기했고, 나는 그럴거면 애시당초 핸드폰은 왜 부순건지 이해가 안 갔지만 일단은 남편의견에 따르기로 했다. 저녁에 먹을 것을 사들고 들어온 남편과 아들은 먹을것으로 대동단결하며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연출했고, 내 걱정과 달리 수습모드에 접어들었다. 화요일엔 남편이 아들에게 업그레이드 된 새로운 핸드폰을 가져다주며 짧았던 전쟁은 끝이 났다.
나는 그날이후 아들과 격하게 싸우지 않는다. 우리는 나름의 법칙을 정했고, 싸우다가도 아빠가 들어오는 즉시 싸움을 종료하기로 했다. 남편은 얼마간은 뭔가 묘한 분위기를 느끼면서도 우리가 아빠눈치를 본다는 사실만으로도 만족해했고, 아들과 나는 싸우다가도 곧 화해해야 하니 싸움이 길어지기 어려웠다. 그리고 아들 역시 한번 더 아빠를 자극해 최신기종의 핸드폰을 자기손으로 또 부술수는 없다고 생각했는지 극단으로 가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추스르려 애쓰는 것이 보였다. 어려움이 있었지만 집안의 평화가 유지되는 것을 보면서 공부보다 더 중요한 것이 존재함을 깨닫는 시간이기도 했다. 가정의 평화는 왔지만 이렇게 계속 살아도 되는 것인지 불안감이 없지는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