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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폴로하스 Polohath Dec 01. 2020

속초

어렸을 땐 잘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나의 부모님은 참 부지런하고 본받을 점이 많은 분들이셨다. 두 분 모두 성실함과 깔끔함에 있어 따라올 자가 없어서 집안은 늘 정돈되어 있었고 주말이면 두 분이 함께 대청소를 하셨다. 맞벌이하시면서도 네 식구가 아침과 저녁을 늘 같이 먹게 해 주셨다. 엄마 아빠의 월급날은 외식하는 날이었다.

주말에는 당일치기든 1박이든 여행을 갈 때가 많았다. 그땐 원래 다들 그렇게 사나 보다 싶었고 때론 나가기 귀찮을 때도 있었는데 내가 맞벌이하며 아이들을 키워보니 엄청난 체력과 시간, 그리고 열정을 요하는 일이다.

딸은 아빠 닮은 남자랑 결혼한다는 말이 맞는 건지 남편이 우리 아빠와 비슷하다. 연애할 때도 둘이 여행을 많이 다녔지만 아들들을 위해서라면 더더욱 눈에 불을 켜고 검색하고 준비한다. 한글날 연휴를 낀 속초 여행도 올해는 코로나 때문에 아무 데도 못 가서 섭섭하다는 말을 하다가 갑자기 떠나게 됐다.

속초는 우리 가족에게 가장 익숙하고 편한 곳 중 하나다.  목요일에 말 나오자마자 한글날 연휴 기간인데도 10분 만에 콘도 2박을 예약할 수 있었던 것은 시아버님 덕분이다. 신랑이 대학생 때였으니 한참 전인데 그 당시 사업을 하셨던 아버님께서 거래하던 업체가 대금을 지불할 형편이 안되어 보유 중이던 콘도 회원권으로 대신 정산을 했다고 한다. 콘도 회원권이 인기였고 상당한 금액으로 거래되던 시절이었다.

연식이 오래된 콘도라 시설이 낡은 편이고 교통도 그다지 편하지는 않은데 연애할 때부터 남편과 속초에 자주 오다 보니 콘도가 아닌 우리 가족 별장이나 세컨 하우스처럼 느껴진다. 낡은 시설마저 정겹다.


첫날은 가는 길이 알밤체험 농장에 들러 알밤을 한 아름 들고 입실했다. 둘째 날은 설악산에 갔다. 작년에도 한글날 연휴 때 네 식구가 설악산에 와서 권금성 케이블카를 탔었다. 이번에는 아들들도 컸다고 비룡폭포까지 트래킹을 하기로 했다.





계곡물이 그 이전 어느 때보다도 맑았다. 설악산은 참 아름답고 기이한 산이다. 오래전에 친구들과 내 사촌동생들까지 여자 다섯 명이서 설악산에 왔던 기억이 난다. 울산 바위까지 올라갔다가 외국인 두 명이 사진을 찍어달라기에 찍어줬었다. 바닷가 근처에 이렇게 rocky 한 산이 있다니 정말 멋지다며 설악산 감하던 그들의 표정을 잊을 수 없다.

미국의 그랜드 캐년에 갔을 때는 그 광활함에 감동했고 자이언 캐년에서는 이름처럼 조물주가 직접 솟아 올린 듯한 웅장함에 압도되었었다. 옐로 스톤은 신비로웠고 요세미티는 평화로웠고 세도나는 고혹적이었다. 남아공의 테이블 마운틴은 단아했고 이집트의 시내산은 고독했다. 스위스의 융프라우는 그냥 그 자체가 스위스였다.

모두 장관이었고 명산이지만 설악산과는 다르다. 설악산은 매 계절 느낌이 다르고 꺾어지는 굽이마다 표정이 다르다. 그 외국인들의 말처럼 rocky 해서 절대 만만한 산이 아닌데도 한없이 여유롭고 다정하다. 내가 가 본 외국의 산 중 설악산과 비슷한 산은 없었지만 그래도 가장 느낌이 비슷한 산을 고르라고 하면 워싱턴 주의 레이니어와 와이오밍 주의 그랜드 티튼을 꼽겠다. 사실 이 두 산을 합해야만 그나마 설악산과 비슷해진다.


아빠랑 요즘 자전거도 열심히 타고 줄넘기도 해서 체력이 많이 좋아졌을 거라 예상했는데 비룡폭포까지 가는 길이 아들들에게 쉽지만은 않았나 보다. 등산객들 손에 쥔 스틱을 부러워하더니 아빠랑 셋이 만만한 나뭇가지를 찾아와 지팡이로 삼았다. 비교적 쉬운 길이라고는 하나 그래도 산은 산인 것이다.

그 생각을 하다 보니 또 한 가지 기억이 떠올랐다. 오래전 혼자 태국으로 배낭여행을 갔을 때 치앙마이에서 갔던 트래킹 투어에 코끼리 타기가 포함되어 있었다. 산에서 어떻게 코끼리를 탄다는 걸까. 설악산이나 북한산 등을 상상했던 나로서는 언뜻 이해가 가지 않았는데 곧 깨달았다. 이게 산이냐. 언덕이지.

치앙마이에서 트래킹을 마치고 내려왔을 때 다른 한국인 단체 관광객들을 만났다. 그중 한 분이 트래킹 좋았냐고 묻자 내 팀에 있었던 아저씨가 대답했다. 좋긴 뭐가 좋아요. 산도 아니에요 이건. 설악산이 백배 나아요.
질문했던 분의 팀은 파타야에 갔다가 오는 길이라고 했다. 파타야 바닷가 좋아요? 하고 묻자 돌아오는 대답. 아이고, 제주도가 훨씬 나아요.
나만 우리나라에 빠져 있는 것이 아니었다. 외국을 많이 다녀본 사람일수록 우리나라에 더 빠져든다.





술 마신 경력이 짧아 막걸리도 늦게 배운 내가 설악산에 가면 꼭 옥수수 막걸리를 마셔야 한다. 관광지이고 국립공원 안이라 가격은 비싸지만 그래도 마셔야 한다. 그냥 그 느낌이 좋다. 


막걸리와 부침개로 배가 빵빵해졌지만 속초 시장에 들러 만석 닭강정을 사고 회 포장 전문집에서 회도 떠왔다. 놀러 오면 한없이 너그러워지는 엄마 아빠가 티브이도 마음껏 보게 하고 잠자는 시간도 늦춰주니 아들들은 신났다. 집에서 마시는 술이 제일 맛있다는 남편은 먹고 마시다가 그대로 자면 되는 상황이 너무 기뻐 신났다.

날씨는 환상적이었고 설악산은 아름답고 음식은 맛있고 숙소는 친정이나 시골집 온 것처럼 편안하니 모든 것이 완벽했다.

Family Tradition을 만들고 싶어 크리스마스 때마다, 또는 무슨 날마다 매년 가족이 함께 할 수 있는 뭔가를 각해보곤 하는데 2년 연속 해 본 결과 이제부터 우리 가족의 가을 전통은 속초 여행으로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이렇게 아름 다운 곳이 우리나라여서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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