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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을 위한 선택일까? 변절일까?

나폴레옹의 궁정화가 '자크루이 다비드'

by 김큐


붓을 든 자크루이 다비드의 손이 미세하게 떨린다. 그의 눈은 커다란 캔버스에 고정돼 있다. 이마엔 땀방울이 맺힌다. 그는 붓을 들고 마지막 터치를 하기 전 잠시 숨을 고른다.

"이것으로 끝이다. " 그가 중얼거린다.

그가 붓을 내려놓는 순간, 방 안의 공기마저 바뀐 듯한 착각에 빠질 정도다. 다비드는 나폴레옹의 붉은 망토에 마지막 붓질을 했고 그림 속 나폴레옹은 용맹한 모습으로 살아 움직이는 듯하다.

다비드가 한발 뒤로 물러서자, 그의 조수가 감탄에 겨워 말한다.

"선생님, 이건... 정말 대단합니다."

다비드의 눈엔 자부심이 가득하다. 알프스의 험준한 산맥을 배경으로 백마에 올라탄 나폴레옹을 다시 한번 바라본다. 그림 속 영웅은 마치 내 앞에서 말을 달리며 프랑스를 위해 목숨을 걸자고 외치는 것 같다.

이때 갑자기 문을 열고 전령 한 명이 급하게 들어온다.

"다비드 선생님, 황제께서 그림을 보고 싶어 하십니다!"

다비드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진다. 그의 작품이 역사를 바꿀 순간이 다가오고 있음을 직감하는 듯하다. 그는 마지막으로 그림을 바라보며 중얼거린다. "이제 프랑스는 영웅을 갖게 되었다."


자크루이 다비드는 배신자? 부역자?

나폴레옹과 조세핀의 대관식

자크루이 다비드는 나폴레옹 황제시절 제일 잘 나가는 궁정화가였다. 나폴레옹 초상 중 가장 유명한 '알프스 산맥을 넘는 나폴레옹( Napoleon at the Great St. Bernard)을 그렸고 1804년 노트르담 성당에서 열린 나폴레옹과 조세핀의 대관식을 그린 그림도 그의 작품이다.


하지만 그는 프랑스 혁명 당시 급진파 자코뱅파를 이끌던 주요 인물이었다. 심지어 혁명 정부의 수장 격인 국민공의회 의장까지 맡았을 정도로 혁명에 깊숙이 관여한 인물이다. 폭군을 증오했고 귀족들을 강하게 비난했던 그가 나폴레옹 황제의 궁정화가로 황제의 영웅화에 앞장섰다는 건 아이러니하다.


지금 정치 논법이라면 자크루이 다비드는 프랑스혁명의 배신자며 나폴레옹 황제 장기집권을 도운 부역자인 셈이다.


혁명의 불쏘시개였던 그의 그림 '마라트의 죽음'


마라트의 죽음

"마라트가 죽었다! 마라트가 암살당했다!"

혁명 지도자의 죽음은 순식간에 파리 전역을 뒤흔들었다. 사람들은 분노와 슬픔, 그리고 두려움에 휩싸였다. 며칠 후, 자코뱅파는 긴급회의를 소집했고 지도부는 마라트의 죽음이 혁명에 미칠 영향을 논의했다. 이때 회의장에 그림 한 장을 들고 누군가 들어온다. 자크루이 다비드다.

"동지 여러분, 제가 마라트의 마지막 모습을 그렸습니다."

그가 그림을 펼치자 회의장은 잠시 침묵이 흐르다. 그림 속 마라트는 욕조에 누워있었고, 그의 손에는 펜과 편지가 쥐어져 있다. 피 묻은 상처는 그의 안타까운 죽음을 강조했고, 평화로운 표정은 그를 순교자처럼 보이게 했다.

누군가 외쳤다.

"이것이야말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오. 마라트의 죽음을 혁명의 상징으로 만듭시다."

다음 날, '마라트의 죽음'이라 이름 붙여진 이 그림은 파리 곳곳에 전시됐다. 사람들은 그림 앞에 모여들어 눈물을 흘리고, 복수를 맹세했다. 자코뱅파는 이 그림을 혁명의 깃발로 삼아 대중을 끌어모으고 세력을 키웠다.


장 폴 마라트는 프랑스혁명 당시 급진파인 자코뱅파를 이끌던 핵심 인물이다. 온건파인 지롱드파 지지자였던 샤를로트 코르테라는 여성에게 1973년 7월 살해당한다. 지금으로 치면 당 대표급 유력 정치인이 상대당 지지자에게 살해당한 사건이다. 사건 자체만으로도 군중들을 자극하기 충분한데, 자크루이 다비드의 그림은 살해 현장 사진이 대중에게 공개된 것과 같은 파장을 일으켰다. 더구나 세밀한 묘사의 끝판 왕인 자크루이 다비드의 손을 거치며 대중들을 자극할 요소들이 이 그림엔 추가됐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를 연상케 하는 구도에 온화한 표정으로 죽어있는 마라트는 순교자처럼 묘사됐고, 힘없이 떨궈진 한 손엔 펜이 다른 손엔 편지가 그려졌다. 살해 현장에 없던 편지다. 마라트와 일면식도 없었던 샤를로트 코르테는 지롱드파 망명자 명단이 있다며 마라트에게 접근했고 첫 만남 자리에서 그를 살해했다. 그림 속 편지는 이런 온건파의 기만적 배신을 강조하는 도구였다.


샤를로트 코르테는 자코뱅파의 과격한 정책에 반대해 온건파인 지롱드파를 보호하고자 마라트를 살해했다. 그녀는 이를 통해 프랑스가 내전에 이르는 걸 막을 수 있다고 믿었다. 하지만 마라트의 죽음은 자코뱅파의 결집을 더 강화했고 그들의 정치적 자본으로 활용됐다. 결국 자코뱅파의 공포정치의 기반이 된다.


극도의 혼란이 극복되기까지

프랑스혁명으로 왕정은 무너졌지만 공화정이 자리 잡기까지 극도의 사회혼란은 한동안 지속됐다. 대중들은 믿었던 민중의 대표들이 행하는 공포정치를 경험했고, 나폴레옹이라는 1인 리더십에 기대 황제의 시대를 보냈다. 황제가 몰락하자 다시 브루봉 왕조가 정권을 잡는 왕정복고의 시대가 시작됐다. 이렇게 가다 서다 아니 뒷걸음질 치다 보니 진정환 공화정의 시대를 맞이했다. 자크루이 다비드는 나폴레옹 황제 시대가 몰락하며 프랑스에서 추방당한다. 브뤼셀에서 망명생활을 하던 그에게 다시 정권을 잡은 부르봉 왕조의 루이 18세가 러브콜을 보냈다. 사면조치와 함께 다시 궁정화가로 복귀하라는 제안이었다. 하지만 그는 응하지 않았고 브뤼셀에서 생을 마쳤다.


테니스코트의 서약

자크루이 다비드가 그린 또 하나의 역사적 장면은 테니스코트의 서약이다. 루이 16세는 프랑스혁명 초기 혼란을 수습하기 위해 삼부회를 소집한다. 하지만 1 신분인 성직자와 2 신분인 귀족들은 3 신분 평민들의 인구비례 투표방식을 반대했다. 3 신분이 따로 회의를 열려하자 회의장마저 폐쇄했고, 그래서 3 신분이 모인 곳이 바로 테니스코트다. 그들은 바로 이곳에서 국민회의를 결성하고 헌법 제정을 맹세한다.

테니스코트의 서약

혼란은 불안하고 불편하다. 하지만 사회적 갈등과 혼란은 어떻게 수습하느냐에 따라 변화의 큰 동력이자 성장의 발판이 된다. 프랑스혁명은 세계사에서 왕정 시대를 마감하고 공화정 시대를 연 역사적 사건이며 테니스코트의 선언은 이런 큰 변화의 근간이자 기반이다. 혼란스러웠지만 이들은 자신들이 믿었던 가치(헌법)를 놓지 않았고 잃어버리지 않았다.


자크루이 다비드는 루이 18세의 사면과 함께 궁중화가 자리를 다시 제안했을 때 왜 거절했을까?

그는 혁명의 배신자인가? 아니면 단지 자신의 미술적 재능을 맘껏 펼치고자 했던 생존형 카멜레온 이었던 사람인가?



그림출처

알프스를 넘는 나폴레옹(Napoleon at the Great St. Bernard)

https://artsandculture.google.com/asset/napoleon-at-the-great-st-bernard-0003/pQEGuRLRGyr2kA?hl=ko

나폴레옹과 조세핀의 대관식(The Coronation of the Emperor and Empress)

https://artsandculture.google.com/asset/the-coronation-of-the-emperor-and-empress-0000/CgGNKJXj3VeimA?hl=ko

마라트의 죽음(Marat Assassinated)

https://artsandculture.google.com/asset/marat-assassinated-0002/7QGjl9R141MCBw?hl=ko

테니스코트의 서약(Tennis court oath)

https://collections.chateauversailles.fr?queryid=6005f6e1-17b0-4495-88bb-c22dec0104f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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