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얽히고설킨 글로벌 공급망

피터 브뤼헬의 '맹인을 이끄는 맹인'

by 김큐



그들을 그대로 두어라

그들은 눈먼 이들의 눈먼 인도자다.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면 둘 다 구덩이에 빠질 것이다.


- 마태오복음 15장 14절


'맹인을 이끄는 맹인'

피터 브뤼헬 '맹인을 이끄는 맹인'

여섯 명의 맹인이 한 줄로 길을 걷고 있다. 길을 잃을까 앞사람 어깨에 손을 올리고 지팡이 앞뒤를 나눠 쥐고 걷는 모습이 위태해 보인다. 선두에 선 맹인은 이미 넘어져 도랑에 빠졌고, 그에 의지해 뒤따르던 두 번째 맹인과 그 뒤 세 번째 맹인도 위험해 보인다. 16세기 브라반트 공국에서 이름을 날린 피터 브뤼헬의 '맹인을 이끄는 맹인'이라는 작품이다.


피터 브뤼헬은 르네상스 시대 북유럽을 대표하는 화가 중 한 명이다. 속담 같은 것들을 주제로 풍자화를 많이 그렸는데, 종종 성경 속 이야기를 그림의 주제로 삼기도 했다. 이 그림도 예수가 제자들에게 했던 눈먼 이가 눈먼 이를 인도하는 어리석은 상황에 대한 성경 구절을 그림으로 옮긴 것이다. 예수는 당시 종교 지도자들인 바리사이인들과 율법학자들을 '눈먼 자들'로 비유해 하느님의 뜻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영적으로 눈먼 지도자들이라고 꼬집었다. 또 이런 눈먼 자들을 무작정 따르면 결국 모두가 파멸(구덩이)에 이른다는 경고도 이 말씀에 담았다.

위험에 처한 맹인을 방관하는 교회

맹인들 배경엔 평화로운 교회가

흥미로운 건 브뤼헬이 여섯 명의 맹인 뒤편에 교회를 그려 넣었다는 사실이다. 교회 앞에는 이들을 지켜보는 사람도 그려져 있는데, 바라만 볼 뿐 위험에 빠진 이들을 위해 그 어떤 행동도 하지 않는다. 이는 당시 여러 사회 문제에 눈을 감은 교회의 방관자적 자세를 작가가 비판하고자 했음을 표현했다고 해석된다.


이 그림에 사용된 색도 전반적으로 어둡다. 이 또한 작가의 의도가 들어있다고 해석하는데, 혼란스러운 사회상을 그림의 톤으로 표현했다는 풀이다. 실제 16세기 브라반트 공국(지금으로 치면 네덜란드와 벨기에)을 비롯한 유럽은 격동의 시기였다. 상업화가 진행되며 돈을 번 중산층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이들은 정치적 영향력을 키웠다. 이는 봉건적 지배 질서를 흔드는 요소였고 종교개혁으로까지 이어졌다. 종교개혁의 물결이 유럽을 흔들며 가톨릭과 신교의 갈등도 심화하던 시기이다. 그림 전면에 배치된 여섯 명의 맹인과 보이지 않으니 갈 곳을 잃어 각기 흩어져 버린 그들의 시선은 그래서 당시의 사회적 혼란을 보여주는 또 하나의 장치이다.


얽히고설킨 공급망

1995년 WTO(세계무역기구)가 출범하며 전 세계는 본격적인 자유무역 시대로 들어섰다. 서로의 장벽을 최대한 낮추는 것이 서로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믿음이 바탕이다. 이런 믿음은 18세기 중후반 '국부론'에서 자유무역이 국가 전체의 부를 증대시킨다고 말한 애덤 스미스의 주장 위에 서 있고, 데이비드 리카도가 펼친 '비교우위론'의 든든한 지지를 받는다. WTO 체제 30년은 실제 전 세계 무역량을 크게 증가시켰고 그만큼 국가 간 상호 의존성은 높아졌다. 무역을 통한 국가 간 상호 의존성을 나타내는 글로벌 가치사슬(GVC, Global Value Chain) 참여도가 이를 극명히 보여주는데, WTO체제 이전 5%에도 못 미치던 게 2000년대에 들어 30%를 넘더니 지금은 40%를 웃돈다. GVC참여도가 40%를 넘는다는 건 어떤 물건을 만드는데 10개의 부품이 사용된다면 이 중 4개 이상이 교역을 통해 조달됐다는 의미다. 또 우리가 교역하는 물건 10개 중 4개 이상은 최종 생산품이 아니라 원자재 혹은 중간재 성격의 부품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좋든 싫든 각 나라가 얽히고설켜있다 게 현실이다. 맹인들이 서로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지팡이를 나눠 쥐고 길을 걷는 모습처럼 말이다.


"미국 외 지역에서 생산한 아이폰에 25% 관세"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최근 애플을 공개적으로 압박하고 있다. 아이폰과 같은 애플의 주요 제품을 미국에서 생산하라는 요구이다. 그는 트루스소셜에 "나는 미국에서 판매되는 아이폰이 인도 혹은 다른 나라가 아닌 미국에서 제조되기를 바란다"며 "그렇지 않으면 애플은 최소 25%의 관세를 내야 할 것"이라고 썼다.

아이폰 부품 공급사 자료: 이베스트증권

애플은 그럼 아이폰을 미국에서 생산하는 게 가능한가? 안타깝게도 불가능에 가깝다. 애플은 제품 개발과 기획 그리고 유통 등은 자신들이 하지만 제조는 전적으로 외주를 통해 해결하는 대표적인 브랜드 오너(Brand Owner) 기업이다. 애플의 아이폰 한 대에는 약 2700개의 부품이 들어가는데, 28개국의 190여 개 부품업체가 이를 맡고 있다. 미국 내 생산 부품 비중은 5%도 안된다.


당장 다음 달부터 관세를 부과하겠다니 답이 없는 상황이다. 설령 트럼프의 관세 정책을 고려해 일부 부품과 제조라인을 미국으로 가져온다 하더라도 엄청난 비용 부담을 감내해야 한다. 댄 아이브스 웨이드 부시증권 글로벌 기술 리서치 책임자는 "복잡하게 형성된 애플의 생산 생태계를 미국으로 옮겨오려면 엄청난 대가를 치러야 하고 이는 1,000달러 정도인 아이폰의 가격을 3,500달러로 오르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눈 먼이에게 손목 잡혀 끌려가는 세계 경제

미국 연방법원이 트럼프 대통령의 상호관세 부과에 제동을 걸었다. 헌법은 대통령이 아니라 의회에 과세 권한을 부여하고 있는데, 국제비상경제권한법(IEEPA)을 근거로 의회를 거치지 않고 관세 정책을 시행한 게 위법하다는 판결이다. 재판부는 트럼프 행정부가 발표한 상호관세 시행을 영구적으로 금지한다고 판시했다. 백악관은 이날 바로 항소장을 제출했고 뉴욕타임스는 2심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이 사건이 연방대법원까지 갈 것으로 예측했다. 실제 항소법원은 바로 다음날 상호관세 무효 판결 효력을 2심 결과가 나올 때까지 정지시켰다. 하지만 이번 소송 외에도 미국 내에서 상호관세와 관련해 제기된 소송이 최소 7건이 더 있다.


TACO(Trump Always Chikens Out)

Taco 팩터를 언급한 파이낸셜타임스

미국 내부는 물론 전 세계 많은 나라들이 트럼프 대통령의 예측 불가능한 행보에 우려와 조롱의 시선을 동시에 보내고 있다. 최근 미국 주류 언론들은 TACO라는 신조어를 만들어 쓰기 시작했는데, 'Trump Always Chikens Out' 트럼프는 항상 내뺀다는 의미의 줄임말이다. 폭탄 같은 정책과 말들을 쏟아내지만 결과물은 별볼 일 없다는건데, 대표적인 예가 145%에 달하던 중국에 대한 초고율 관세가 갑자기 30%(펜타닐 관세를 제외하면 사실상 10%)로 합의된 것들이다. 트럼프는 이런 언론들을 향해 내뺀 게 아니라 전략이라고 빨끈했지만 그의 변덕을 보는 시선은 눈먼 이에게 글로벌 경제의 핸들을 맡긴 것 같은 불안함이 녹아있다.



<참고자료>

맹인을 이끄는 맹인, 피터 브뤼헬

https://artsandculture.google.com/asset/the-blind-leading-the-blind-circa1568-0008/RgFXg8XpefQoCA?hl=ko

https://youtu.be/iz4MX4E7ai4?si=y_yUQwbDlPF98IZ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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