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lights, here and there and everywhere!
나는 정원을 주제로 한 책들을 사랑한다. 감사하게도 어릴 때 도시에 살면서도 수풀 속에서 뒹구는 조금 특별한 경험을 하며 자라서 일까, 자연을 가꾸며 그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그때의 풀 비린내 나는 향수를 불러일으키며 나를 매료시킨다.
정원에 관한 책이라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정원이 배경이 되는 <비밀의 화원>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등장인물의 이름과 구체적인 줄거리는 몰라도 비밀에 싸인 정원의 존재는 한 번쯤 들어보았을 정도로 유명한 이 책과 나의 인연은 중학교 무렵으로 거슬러 올라가 시작된다.
중학교 때 만난 영어 선생님은 ‘읽기’의 중요성을 굉장히 강조하시던 분으로, 단순히 이론 상의 가르침에 그치지 않고 영어 교무실 옆의 방치된 교실 하나를 얻어내어 학교에 퍼져있는 원서를 긁어 모아 작은 도서관을 만들었다. 언젠가 발그레 상기된 얼굴로 앞장서서 안내한 교실에서 바람을 타고 풍겨 나왔던 먼지 쌓인 갱지와 책 곰팡이의 냄새를 기억한다.
(여담으로, 본인이 사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에 더 신이 난 듯한 선생님께서는 처음엔 책상과 의자 한 벌로 시작하여 점점 살림살이가 쌓여가더니 나중에는 교무실이 아닌 이 교실로 가야만 선생님을 만나 뵐 수 있는 정도에 이르렀었다.)
책을 한 권씩(그 어떤 책도 상관이 없었지만 해리포터 시리즈만은 예외적으로 금지됐다) 골라 매 수업시간 전반부에 독서 시간을 가졌고 책을 읽고 난 후에는 옆 짝꿍에게 그날 읽은 부분을 다시 ‘paraphrase’하여 들려주는 과정을 거쳤다. 나는 그 시간을 무척 좋아했는데 ‘Frances Hodgson Burnett’의 <The Secret Garden> 역시 그런 기회로 읽게 된 책들 중 하나였다.
당시 책을 읽으며 너무 좋아서 따로 적어두기까지 했던 문장 하나가 있었다. 아무리 책을 훑어보아도 기억 속의 그 문장을 발견하지 못해서 ‘처음부터 끝까지 음미하다 보면 찾게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그렇게 이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인물들의 감정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줄글을 따라 읽어 내려갔던 초등학생 때보다 성숙해지고 중학생 때와는 달리, 이제는 자막 없이도 할리우드 영화를 볼 수 있게 된 지금의 나는 시간도 충분하겠다, 비밀의 화원 속 한 마리의 작은 새가 되어 천천히 이야기 속에 빠져들었다.
‘The rainstorm had ended and the gray mist and clouds had been swept away in the night by the wind. The wind itself had ceased and a brilliant, deep blue sky arched high over the moorland.
Never, never had Mary dreamed of a sky so blue. In India skies were hot and blazing; this was of a deep cool blue which almost seemed to sparkle like the waters of some lovely bottomless lake, and here and there, high, high in the arched blueness floated small clouds of snow-white fleece. The far-reaching world of the moor itself looked softly blue instead of gloomy purple-black or awful dreary gray.’
Mary가 인도에서 영국으로 향하는 긴 여정을 끝에 도착한 곳은 moorland, 습지이다. 거대한 고택만이 우뚝 솟은 황량한 습지에 영국 특유의 희뿌연 날들만 이어지니, 가뜩이나 낯선 환경에 날을 세우고 있던 Mary는 그곳이 마음에 들지 않을 밖에. 차가운 비가 동산을 적시고 Mary가 차츰 새로운 곳에 마음을 열기 시작하자 습지는 마침내 아름다운 하늘을 기꺼이 열어준다.
문학에서 하늘에 대한 묘사는 수없이 다루어지곤 하지만 호수처럼 반짝이는 푸르름과 새하얀 양털구름이 떠다니는 하늘이라니, 이토록 발을 담그고 싶을 만큼 청량한 하늘을 마주하는 것으로 시작한 Mary의 하루는 어땠을까.
“Mother says he made 'em that color with always lookin' up at th' birds an' th' clouds.
But he has got a big mouth, hasn't he, now?”
그토록 찾아 헤맨 문장이자, 내가 비밀의 화원에서 가장 좋아하는 문장이다. Dickon의 눈이 맑고 푸른 것은 그가 언제나 하늘을 올려다보기 때문이라는, 너무 예쁜 이야기.
‘And over walls and earth and trees and swinging sprays and tendrils the fair green veil of tender little leaves had crept, and in the grass under the trees and the gray urns in the alcoves and here and there everywhere were touches or splashes of gold and purple and white and the trees were showing pink and snow above his head and there were fluttering of wings and faint sweet pipes and humming and scents and scents. And the sun fell warm upon his face like a hand with a lovely touch.’
이 문장을 한 번 소리 내어 읽어보자. 쉴 새 없이 이어지는 단어들을 내뱉는 소리 하나하나가 꽃망울을 터뜨리고 푸른 잎들을 늘어뜨리고, 그렇게 단어들이 쌓아 올린 정원에서 아찔한 꽃내음이 뿜어져 나오는 듯한 경험을 할 수 있다.
어릴 때 읽었던 책을 성인이 되어 다시 펼치면 같은 내용도 다른 모습으로 다가온다는 말이 있다. 그런 책으로 사람들은 보통 <어린 왕자>나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를 꼽고는 하는데, 신비롭게 들리는 이 말에 다시 읽은 두 책에서 큰 감흥을 느끼지 못해 실망한 경험이 있다. 그러나 당시 나에게 맞는 책을 찾지 못했던 것뿐, 분명 그런 책이 존재한다. 어렸을 때 번역본으로 처음 읽을 때에도, 원서로 다시 읽었을 때에도, ‘난 이 책이 정말 좋아!’라고 할 정도로 애정을 가져 본 적 없는 책인데, 세 번째 완독에 이르러서야 <비밀의 화원>이 머금고 있는 사랑스러움을 알아보았다.
식물 테라피라는 말이 있지 않은가. 녹음을 바라보며 분노를 느끼거나 불편한 마음이 드는 사람은 거의 없을 것이다. 연약한 연둣빛 잎들이 오밀조밀 모여 이룬 군상을 바라보며 대개의 인간은 치유받는다.
자취를 하며 여러 화분을 키워보았다. 방에 그 작은 화분 몇 개를 들여놓았을 뿐인데, 바람에 살랑이는 가지를 보면 괜스레 웃음이 나고 새로 난 아기 잎새에 온 신경을 몰두하게 된다.
그렇게 애지중지 키워온 화분에 물을 주곤 사정이 생겨 어두운 화장실에 방치한 채 몇 주를 들여다보지 못했다. 아이비는 워낙 갈증에도 강한 식물이라 나의 잘못을 책망하지 않고 여전히 파릇한 모습이었지만 햇살이 잎새를 어루만지지 않는 틈을 타 찾아온 수많은 응애들로 뒤덮여 있었다. 너무 놀라고 속상한 마음에 화분을 안고 가까운 화분 가게를 찾아갔다. 때마침 떨어진 살충제에 사장님께서는 안타까워하며 모기약을 물에 희석시켜 뿌려보라는 조언을 해주셨지만 이미 큰 일을 겪은 아이비에게 차마 또 그런 고초를 겪게 할 수는 없었다. 대신 집으로 돌아와 응애에게 강력한 물고문을 선사하고 따가운 햇살을 쪼이며 지켜보는 중이다.
식물을 말을 할 수 없기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잎과 흙의 상태를 꾸준히 관찰해야만 힘들 때 바람결에 살랑이며 말을 걸어오는 멋진 초록 친구를 곁에 둘 수 있다.
작은 아이비 두 그루를 키우는 데에도 이렇게 많은 난관들을 맞닥뜨리는데 하물며 손길을 바라는 식물들이 지천인 정원사들이 예민한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