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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월클 Dec 15. 2021

건축학개론 of the 오페라

이탈리아 오페라극장의 탄생과 진화 ①



'오페라(Opera)'는 원래 'Opus'(라틴어로 '작품'이라는 의미)의 복수형으로, 초기에는 'dramma in musica(음악극)'로, 이후에는 'opera in musica(음악작품)'로 부르다가 줄여 오페라가 된 것이다. 오페라는 16세기 말에 르네상스 운동과 맞물려 이탈리아에서 시작됐다. 당시 르네상스 운동의 중심지인 피렌체에서는 고대 그리스와 로마에 대한 소재를 바탕으로 한 시나 극이 추세였는데, 그리스 극에서 음악이 차지했던 역할을 발전시켜서 극 전체의 가사를 모두 노래로 바꿔 편집했다. 이것이 당시 이탈리아 '카메라타(Camerata)' 멤버들에게 전해졌으며, 바로크 시대 오페라의 시발점이 됐다.


그 후에 오페라는 베네치아에 보급돼 번창했다. 베네치아 악파의 작곡가 몬테베르디(Claudio Monteverdi)는 오페라 <오르페오(Orfeo)>(1607)를 작곡했다. 오르페오는 오페라라는 이름이 붙은 세계 최초의 작품으로 오페라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와 역할을 하는 작품이다. 17세기 후기부터 오페라는 이탈리아 전역을 거쳐서 유럽 각국으로 퍼졌다. 이후 각국에서 자신의 언어와 방식으로 오페라를 작곡하고 새로운 양식을 시도했으나 일반적으로 이탈리아 오페라의 지배를 받았다. 


1637년, 베네치아에 최초의 오페라극장인 '산 카시아노 극장(Tratro San Cassiano)'이 개관된 이후, 이탈리아의 많은 도시에 오페라를 공연하기 위한 극장이 세워졌다. 17세기 말에는 오페라극장 수가 15개에 달했으니 그 인기를 실감할 만하다. 오페라는 극의 모든 대사와 스토리를 노래의 선율에 따라 부르며 진행되기 때문에 악기를 중심으로 하는 기악곡과는 달리 노래 가사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에 이전의 음악당보다 선명하고 깨끗한 음향이 필요했다. 또한 기악곡은 청각 정보가 중요하지만, 오페라는 극장 내의 모든 관객이 배우의 표정과 연기를 볼 수 있어야만 하기에 기존의 음악당과는 다른 환경을 갖출 필요가 있었다. 






건축학개론 시즌 1

극장의 전형을 만든 폰타나


당시에 이탈리아에 있던 극장은 1628년에 지어진 파르네세 극장(Teatro Farnese)처럼 소리굽쇠 같은 평면을 가지고 있었다. 당시의 오페라가 그리스 연극에서 출발한 관계로 오페라가 시작된 이후의 극장은 그리스의 야외극장의 형태를 띠었다. 이전의 연극 중심의 극장에서 노래와 연주가 병행되는 오페라를 수용하기 위해 그리스 야외극장을 기반으로 하는 형태의 극장이 나타났다. 베네치아의 산티 조반니 에 파올로 극장(Teatro Santi Giovanni e Paolo)SS극장(Teatro SS)이라고도 불린다. 1654년에 카를로 폰타나(Carlo Fontana, 1634-1714)에 의해 일반 극장에서 오페라극장으로 리모델링된 이곳은 이탈리아 바로크 오페라를 수용하기 위해 지어진 최초의 오페라극장이다. 여전히 객석의 평면이 파르마 극장처럼 U자형을 나타내고 있으나, 모든 주벽을 따라서 박스(Box)들이 생겨나고 객석과 무대 사이에 악단이 자리하고 있다.

(좌) 파르네세 극장(Teatro Farnese) / (우) 베네치아의 산티 조반니 에 파올로 극장(Teatro Santi Giovanni e Paolo)


이후 1670년에 카를로 폰타나의 설계로 만들어진 로마의 토르디노라 극장(Teatro Tordinora)을 보면 객석의 평면이 말발굽 모양으로 변형된 것을 알 수 있다. 극장의 중앙선상에 있는 무대 뒤의 한 점에서 작도한 선이 극장의 측벽 라인을 형성하고 있으며, 완만한 곡선을 그리면서 객석을 에워싸는 형태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형태는 많은 수의 관객이 무대를 바라보면서 가깝게 배치할 수 있을 뿐 아니라 여러 층의 갤러리와 발코니로 둘러싸인 공간은 작정한 체적을 유지하여 노래와 기악에 맞는 약 1.2-1.4초의 잔향시간을 가지게 된다. 3차원적인 형태로는 실린더의 모양을 하고 있어서 가수의 음향 에너지가 콤팩트하게 갇힌 체적의 공기를 충분히 가진시킬 수 있는 조건을 제공함으로써 모든 관객이 다이내믹한 육성의 노래를 들을 수 있게 된다. 이러한 양식은 그 이후에 이탈리아 전역으로 퍼져 18세기 후반까지 오페라극장의 전형으로 굳어졌다.


토르디노라 극장(Teatro Tordinora)






건축학개론 시즌 2

3대의 명성갈리  비비에나


카를로 폰타나가 타원형의 평면과 말발굽 모양의 오페라극장 형태를 완성함으로써 오페라극장의 형성기가 무르익을 즈음 이탈리아에는 오페라극장 건축 분야에서 떠오르는 가문이 있었다. 그들은 갈리(Galli) 가문의 사람들이었는데, 그들의 고향 지명을 따서 '갈리 다 비비에나(Galli da Bibiena)' 혹은 줄여서 '비비에나'라고 불렸다. 그들은 한 세기 동안 3세대를 거쳐서 많은 오페라극장을 건축하고 새로운 양식을 도입했다. 그들은 비엔나에서 시작해 오페라극장 전문 건축가이자 극장 디자이너 및 오페라 무대 설계자로 전 유럽에서 명성을 떨쳤다. 그들을 대표하는 특징은 종 모양이나 트럼펫 모양의 평면이다. 기존의 말발굽 모양은 무대 가까운 박스에서는 무대가 다 보이지 않을뿐더러 가수의 노래가 사면으로 들리는 단점이 있었지만, 다물어진 끝을 벌어진 종처럼 벌리게 되면 이러한 문제를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었다. 이것 역시 오페라를 잘 전달하기 위한 음향적인 관점에서의 시도였다. 


비비에나 가문의 첫 건축가는 페르디난도(Ferdinando, 1657-1743)와 프란체스코(Francesco, 1659-1739) 형제였다. 페르디난도는 파르마 지방의 명문가인 파르네제(Farnese)가에서 수석 건축가로 28년간 근무한 후, 1708년 오스트리아의 왕실 가문인 합스부르크(Habsburg)가의 수석 건축가로 임명됐다. 그는 예각으로 보이는 무대 디자인을 제시해 무대를 더 잘 보이게 함으로써 혁명적인 바로크식 무대 효과를 창출했다. 페르디난도의 동생 프란체스코는 훌륭한 오페라극장을 많이 설계했다. 그의 첫 작품은 1706년부터 2년간 비엔나에 건축한 리트플라츠 오페라극장(Teatro de Opera de Rietplatz)이다. 이 극장은 1666년 비엔나에 지어진 최초의 오페라극장이었는데, 화재로 소실된 이후 재건한 것이다. 프란체스코는 두 개의 극장을 이곳에 지었는데, 큰 극장은 축제용 오페라를 위한 무대였고, 작은 극장은 음악희극(Musical Comedy)이나 연극을 위한 공연장이었다. 현대의 많은 문화공간이 대극장과 소극장으로 분리해 다양한 공연을 수용하는 행태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고 볼 수 있다. 프란체스코는 그 이후 낸시 오페라 하우스(Nancy Opera House), 로마의 알리베르티 극장(Teatro Aliberti), 베로나 필하모닉 극장(Teatro Filarmonico) 등을 지었는데, 베로나 필하모닉 극장은 모든 박스를 계단식으로 배치해 무대가 잘 보이는 시각 선(Sight lines)을 주도록 설계했다. 이 극장은 1749년에 화재로 소실됐다가 1754년 재건됐으며, 1770년에는 모차르트가 이곳에서 첫 이탈리아 순회 연주회를 열기도 했다.                                                    


베로나 필하모닉 극장(Teatro Filarmonico)


페르디난도에게는 4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모두 오페라극장 건축가가 됐다. 그중 가장 뛰어난 업적을 쌓은 사람은 셋째인 쥐세페(Giuseppe, 1696-1757)와 넷째인 안토니오(Antonio, 1700-1774)다. 쥐세페는 당시 유럽에서 가장 유명한 건축가로, 화려하고 효율적인 무대 설비로 이름을 날렸다. 그는 1723년에 아버지 페르디난도의 사무실을 이어받아 1740년까지 대표 건축가로 일했다. 그는 비엔나에서 시작해 드레스덴, 뮌헨, 프라하, 베니스, 베를린의 극장을 두루 설계했고, 합스부르크를 비롯한 유럽의 왕가와 대귀족들을 위해 극장을 짓는 일을 많이 했다. 그의 작품 중의 백미는 말년에 건축한 독일 바이로이트(Bayreuth)의 마르크그라프 오페라하우스(Markgrafliches Opernhaus)이다.     


마르크그라프 오페라하우스(Markgrafliches Opernhaus)


이 오페라극장은 프레드리히 황제의 누이이자 빌헬름 바이로이트 공작의 아내인 마르그라피네 빌헬미네를 위해 지어진 오페라극장인데, 그녀는 아마추어 오페라 가수이자 오페라 극작가이며 오페라 애호가였다. 건물의 외관은 건축가 생 피에르(Saint-Pierre)가, 내부는 쥐세페가 담당했다. 독일 전체에서 가장 화려하고 눈부신 내부를 자랑하며 바로크식 예술의 진수를 보여주는 이 극장은 1935년에 중건돼 지금까지 사용되고 있다. 전형적인 종형(Bell-shape) 평면에 450석 규모의 4층 객석으로 구성돼 있으며, 평평한 1층은 때로 사교장으로 사용되곤 했다. 이 극장의 내부는 모두 얇은 목재판으로 마감됐으며, 정성 들인 도장과 금박으로 마무리됐다. 수백 개의 초를 밝혀 내부를 조명할 때 금박으로 치장된 표면들이 모두 빛을 내며 반짝이는 게 압권이다. 주목할 점은 오래된 극장의 내부 장식과 치장들이 음향학적으로 매우 유용하다는 것이다. 돌출된 기둥, 조각된 부조, 장식적인 몰딩과 음각 등은 소리가 표면에 닿았을 때 여러 방향으로 확산시켜주는 역할을 한다. 오늘날 공연장에 벽면을 가르거나 거칠고 울퉁불퉁하게 표면으로 마감하는 것은 이러한 효과를 얻기 위한 것이다. 확산은 모든 객석에서 고른 음향을 얻게 하는 데 매우 중요한 요소이다. 쥐세페가 떠난 후, 아들 카를로(Carlo, 1725-1787)가 바이로이트 극장의 무대 디자인을 위해 10년간 일했다. 


마르크그라프 오페라하우스(Markgrafliches Opernhaus)의 현재 모습


막내인 안토니오는 주로 이탈리아에서 일했다. 볼로냐에서 건축공부를 마치고 1716년 비엔나로 건너가 형 쥐세페의 사무실에서 일하다가 쥐세페가 바이로이트로 떠난 이후에는 가문의 사무실을 맡았다. 그가 이탈리아로 돌아와서 맡은 볼로냐 시립극장(Teatro Communale Bologna)은 그의 대표작이다. 이 극장은 화재로 소실된 말베치 극장(Teatro Malvezzi)을 대체하기 위해 지어졌는데, 재정적인 문제로 수년을 지체하다가 1763년에 개관됐다. 이 극장은 고전적이고 건축학적으로 의미 있는 프로젝트였는데 실내가 마치 고대 건축물의 외관 같았다. 초승달 모양의 둥근 천장에 맞닿은 아치와 기둥 사이로 박스들이 배치됐으며, 이전의 건물들이 화재로 소실됐기 때문에 불에 타지 않는 석재로 지어졌다. 그러나 이전의 오페라극장들이 얇은 목재로 마감해 소리를 어느 정도 흡음한 데 비해 이 극장은 소리를 반사하는 석재로 지어져서 음향이 매우 나쁘다는 혹평에 오랫동안 시달렸다. 1818부터 1821년 사이에 대대적으로 개수됐으나 외관은 더 나빠졌다는 평을 받았다. 


볼로냐 시립극장(Teatro Communale Bologna)



>> 이탈리아 오페라극장 이야기는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한찬훈 (충북대학교 건축공학과 교수)

건축학 박사이자 충북대학교 건축공학과 교수. 전 한국음향학회 회장을 지냈으며 아태지역 국제음향학회(WESPAC) 회장을 거쳤다. 안산 문화예술의 전당, 부산 국립국악당, 광주 아시아 문화예술의 전당, 인천국제공항 등 100여 프로젝트의 건축음향 작업에 참여했으며 모두가 사랑해마지않는 서초 예술의전당 음악당을 비롯한 오페라극장, 리사이틀홀도 그의 손 끝에서 탄생했다. 어쩌면 우리가 듣는 첫 음은 그가 그리는 종이 위에서 시작된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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