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혼자 사는 거라던데
서점에 동화책 구경하러 나왔다. 동화도 글은 글인가 봐. 몇 시간째 글자만 읽어내니 슬슬 눈이 감긴다. 낮에 먹은 처방약 탓이겠지? 뻐근한 목을 돌려가며 책을 읽던 중 묵직한 쿵 소리가 들렸다. 웅성웅성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걱정스러운 표정도 말투도 모여들었다. 기분이 좋지 않다. 갑자기 졸리지도 않다. 나도 덩달아 움직였다.
머리가 다 벗어진 할아버지가 묻어나는 피를 훤히 보이며 앉아 있었다. 어떡해. 어떡하지. 난 뭘 할 수 있지. 누군가는 휴지를 챙겨 왔고, 누군가는 지혈을 해주었고, 누군가는 신고를 했고, 몇몇은 신고가 겹치지 않게 상황을 공유하고 있었다. 더 필요한 게 없네. 내가 나서도 할 게 없구나. 가만히 있어야겠다. 같은 공간에 있다는 책임감으로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지만 현재로서는 부족한 게 없었다. 머뭇거리던 내 움직임은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다.
먹먹한 기분이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약해진 누군가를 잘 도왔다. 다수의 무리 속에서 책임감이 분산된다는 얘기는 이제 철 지난 교육인가. 요즘 세상은 생각보다 따뜻해진 걸까. 아님 내가 너무 비판적인 시각만 키웠던 걸까. 어떤 이유든 결과적으로 다행이다. 참 다행인데 눈물이 나려 한다.
순식간에 도움의 손길에 휩싸인 저 할아버지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마냥 감사하기만 했을까. 오늘 처음 마주친, 자신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이들의 도움을 받았다. 그간 자신을 알고 지낸 곁의 사람들에겐 어떤 도움을 주고받아왔을까. 오늘의 따뜻한 세상이 역설적으로 외로움을 느끼게 하진 않았을까. 한번 스치고 지나갈 사람들의 온정은 할아버지의 오늘에서만 숨 쉬다 지날 뿐이다. 오늘도 아니지. 이 일기를 쓰는 동안 할아버지는 서점에서 사라졌고, 이곳은 다시 조용해졌다. 아까 주변에서 기웃대며 걱정하던 몇 명도 다시 갈 길을 갔다. 변화라고 해봤자 나는 책 읽는 것을 중단하고 일기를 쓸 뿐이다. 허무하다. 당연한 순서의 모습인 걸 안다. 그럼에도 허무하다. 할아버지가 도움받는 순간에 나는 따스함보다 고독함을 느꼈다. 순식간에 다시 혼자가 될 모습. 실은 내 상상과 다르게 엄청난 탄탄대로의 인생살이 중일 수도 있지만, 내 공상 속에선 그렇다. 그게 더 내 마음을 울리고 슬프고 공감되게 한다.
머리를 꿰매 치료받아야 한다는 말에 할아버지는 대꾸하지 않았다. 의식이 제대로 없었는지 제정신이었는지 알 길은 없다. 다만 내가 그 상황에서 맨 정신이었다면 똑같이 입을 열지 못했을 거다. 내 몸 하나 책임진다는 게 ‘그쯤이야’ 싶을 때가 있었지만 요즘은 울적해질 때가 많거든. 당장의 생계를 유지하던 계획에 차질이 생긴다면 더더욱. 엄마도 그랬겠지. 엄마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