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출된 커리어 우먼
얼음 가득 물 적게
벤티 사이즈 아이스 아메리카노.
사이렌 오더 후 출발. 나름의 상냥한 미소로 커피를 건네받고 유유히 퇴장.
그렇게나 하고 싶었던,
"퇴근 후"
드라이브 스루 스타벅스 커피.
전업맘 시절, 회사원에 대한 조금은 오버스러운 로망이 있었다. 무심히 두른 사원증 목걸이가 어찌나 있어 보이던지. 어쩌면 족쇄 같을 물건이 값비싼 목걸이보다 탐이 났었다. 일에 파묻혀 흐트러진 모습은 또 어떠한가. 육아를 핑계 삼아 며칠째 감지 않은 떡진 머리와는 차원이 달랐다. '향기 난다'와 '냄새난다'의 차이라고나 할까. 나에게 있어 향기로운 그대들은 이 세상의 주인공이다.
밥 짓고 청소하고 아이에게 버럭 거리는 게 일인 나.
'만년 따까리 조연'
주연 같은 조연도 있고 역할을 다채롭게 해 보면 좀 더 풍요로운 삶이 되지 않겠냐고?
모르겠고, 주연 좀 맡아봤으면. 역할이 시답잖아도 띠꺼워 죽겠어도 별 수 없었다.
어찌해볼 깜냥도 용기도 없었기에.
비극에 예고가 있었다면 대비할 수 있었을까. 코로나가 쏘아 올린 직격탄이 우리 집에도 떨어졌다. 일자리가 필요했다. 지금 당장 일을 할 수 있는 곳. 나를 받아줄 수 있는 곳. '애만 키우고 살던 40대 아줌마를 받아줄 곳이 있을까' 갑작스레 벌어진 상황에 자존감마저 바닥에 처박혀 버렸다. 하지만 그런 서글픈 마음을 위로해 줄 틈은 없었다. 그렇게 구인구직 앱을 뒤지며 맞지 않는 나의 조건들에 낙담하던 중 문득 트레이더스에서 봤던 스태프 채용공고가 떠올랐다. 마트는 '왠지'
아줌마에게 호의적일 거 같은 느낌적인 느낌.
다행히 내 예상은 맞았다.
화장을 할까 말까. 염색을 좀 해볼까. 마스크 위생모 뒤집어쓰고 일하는데 그럴 필요가 있을까. 그래도 이게 얼마만의 사회생활이던가. 이번 달 생활비 교육비에 쫄려 있는 주부 알바생이지만 출근 기분은 내고 싶었다. 근근이 살아있는 몇 안 되는 화장품의 도움을 받고 그나마 출근룩처럼 보이는 옷을 골라 입었다. 텀블러에 커피도 챙겨 놓았다.
'아니 이거 이거,
바삐 출근 준비를 하는 일하는 여성의 모습이 아니던가.'
단순한 인간. 기분이 좀 설렜다. 그토록 원했던 주인공이다. 내가 그리던 모습의 주연은 아니지만 비슷하게 흉내 내 볼 기회가 온 것이다. 트레이닝복을 입고 다니든 슬리퍼를 끌고 다니든 세수를 안 하든 뭐랄 사람 하나 없는데 아이템을 추가해가며 회사원 놀이에 빠져 들었다. 흉내내기는 현타의 싸함이 동반됐다. 그 감정에 휘말리고 싶진 않았다. 생계를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만 사회인이 된 설렘을 좀 더 즐기고 싶었다. 비록 반쪽짜리라도 말이다. 슬슬 전과는 다른 생기가 돌았다. 나 좀 예뻐진 거 같고 어떤 회사를 다니는지 궁금해할 거 같고(아무도 안 물어봤다) 들떴는데 왜 때문인지는 모르겠고 요상하지만 파헤쳐 보고 싶지 않은 주부 알바생.
부스스한 머리에 무릎 발사 츄리닝, 유물 같은 검은색 점퍼를 교복처럼 입고 다녔던 아줌마. 그 아줌마는 차림새를 갖춘 출근, 퇴근 후 마시는 스타벅스 커피에서 갖지 못한 세상에 대리 만족을 느꼈다. 어울리지 않는 커리어 우먼 컨셉이라도 붙잡고 볼품없는 지금을 헤쳐 나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밀려오는 서러움을 뿌리칠 생각은 없었다. 다만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 빨려 들어가지 않을 정신줄이 필요했다.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을 알아주는 걸까. 가슴팍을 내리꽂는 문장이 떠올랐다. '돈이 없지 꿈이 없냐' 그랬다. 내 꿈을 듣게 된다면 무모한 망상에 가깝다 여길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런 꿈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에너지가 차오르고 어둡게 내리 깔린 감정을 일으켜 세울 수가 있다. 이것을 잊지 않으면 된다. 잊지 않고 나아가면 되는 것이다.
정신줄이 마련되었다 .
이제 다시, 기꺼이, 즐겨주리라.
'세상에서 가장 멋진 트데이더스 여사님이 되어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