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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결 Dec 21. 2022

직원 할인의 늪

개미지옥 탈출 자신 있습니까


"트레이더스에서 번 돈, 트레이더스에서 다 쓴다."


이곳 여사님들 세계에선 공공연한 말이다. 어차피 장은 봐야 하고 일하는 곳은 마트이니 출퇴근과 동시에 장보기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렇다. 돈 쓰기 딱 좋은 시스템. 틈틈이 스캔을 한다. 이번 주 대박 할인템이 무엇인지, 직원들 사이의 추천템은 무엇인지, 새로 나온 물건은 얼마나 쌈박한지, 물 좋은 생선, 때깔 끝내주는 고기는 없는지. 입을 맞춘 적은 없지만 '어머 이건 사야 해' 하는 것이 있다면, 주변 여사님들께 정보를 건네기도 한다.  



내가 있는 곳은 축산. 여기가 어떤 곳인가. 마트의 중심, 마트의 심장, 마트의 클라이막스, 구매 유혹의 끝판왕이다. "캬 오늘 등심 쥑이네, 이그 봐라 소주가 술술 넘어 가게 안 생깄나."

유난히 빛깔 좋은 고기가 들어온 날은 작업 내내 비싼 소고기를 모른 척할 수 없게 꼬셔댄다. 나 식욕물욕 넘치는 아줌마, 이 일을 시작하며 다짐한 것이 있었으니. 계획된 금액에서 벗어난 소비는 허락지 말자. 쉬이 꼬임에 넘어가지 않겠노라 다짐하며 시작하지 않았겠나. 허나 이번 주 할인 상품에 때깔까지 곱다면? 고뇌의 순간이 왔다. 질 좋은 고기를 싸게 구매하는 뿌듯함을 얻을 것이냐, 고깃값으로 일주일치 장 볼 돈을 날리지 않는 안도감을 얻을 것이냐. 뿌듯함이냐, 안도감이냐, 선택은 요?

그래 맞다. 나에겐 플러스알파, 직원 할인이 있지 않는가.


 '이번 주 할인 + 최상품+ 직원 할인', 이것은 쓰리콤보.

트레이더스 여사님이 누릴 수 있는 특급 혜택인 것이다.





일주일에 한 번 직원 쇼핑의 날이 있다. 상품성이 떨어진 찌그락빠그락 된 것들을 직원들에게 파격적인 가격에 판매하는 날이다. 오늘은 어떤 물건이 나와있을지 기대 반 셀렘반으로 그곳을 향해 질주한다. 역시나 이미 줄을 서서 기다리는 직원들로 가득 차 있다. 한 발 늦었다. 오매불망 기다렸던 손님 방문 시 꼭 필요한 아이템, 토퍼 매트리스를 눈앞에서 놓친 것이다. 바닥이 까지다 못해 끈끈해진 10년 넘은 알집매트를 청산하고 싶었건만, 꼼짝없이 그대로 방 한편에 세워 놓아야 한다. 그렇다고 이대로 포기할 순 없지. 미처 발견 못한 숨겨진 아이가 있는지 샅샅이 뒤져 본다. 초집중의 레이더를 세워야 한다. 까딱하다가는 옆의 가재눈 여사님에게 득템의 기회를 빼앗길 수 있다. 지금 필요한 건 손보다 빠른 눈놀림. 다들 한 무더기씩 골라 놓은 걸 보고 있자니 애가 탄다. 여기서 무너지면 안 된다. 빈 손으로 터덜터덜 허무함을 끌어안은 채 점심을 먹으러 간들, 그 허기를  채울 수는 없다. 뭐라도 집어야만 한다. 저기 쭈글스러운 박스는 무엇이지. 가만 보니 청소할 때 과일 세척할 때도 늘 함께 하는 살림친구, 베이킹소다 아니겠는가. '기다렸더냐, 아무도 너를 겟하지 않았다니 나에겐 행운이구나', '하나 뜯으면 멈출 수 없는 몰랑몰랑 향 좋고 맛 좋은 망고 젤리야, 너도 같이 가자꾸나', '어쩌다 그리 찌그러진 것이니 유동골뱅이 이 녀석, 비빔면과 함께 라면 더할 나위 없지, 내가 구해주마.'  


파손 할인 더하기 직원 할인(실은 카드 청구할인까지).

흥이 난 축산 여사 개이득 쾌재를 부르며 직원 식당으로 향한다.

밥맛은 말해 뭐 해.


 






왜 때문인지 스타벅스에 연연하는 그런 뭔가가 있다. 잠재된 속물근성인지, 그리움 때문인 건지(3년 정도 일했음), 분위기, 커피맛 확실한 답을 낼 수는 없겠다. 이런 나에게 스타벅스 직원 할인이란(스타벅스 트레이더스 다 신세계 계열사), 물 만난 물고기 되시겠다. 한동안 종잣돈 모으겠다고 지인들 만날 때 말고는 커피는 집에서만 내려 마셨다. 그랬더라도 직원 할인 30%(음료만)를 모른 척한다는 건 이건 예의(?)가 아닌 거다. 별도의 할인이 없는 곳에서 30% 할인은, 연예인 디씨를 받는 듯한 우쭐한 느낌을 준다. '직원 기분 작렬'




몰랐다. 이렇게 돈이 새어나가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결의로 무장한 취업이었기에 지킬 수 있을 줄 알았다. 번 돈을 계산된 곳에만 사용하고 얼마 안 되겠지만 나머지는 고스란히 종잣돈으로 차곡차곡 모아 나갈 생각이었다. 할인이라는 명목 아래 신나게 써재끼는 이 꼬라지는 예상치 못한 부분이었다. 번 곳에서 번 거 다 쓰는 상황에 기가 찼다.


언제나 그랬듯 되돌릴 수 있는 건 없다. 오랜만의 사회생활에 잠깐 정신을 놨었노라,

겪어 봐야 보이는 것이라, 일련의 과정이라 눈 감아 본다.


모순덩어리 같은 인생사,

낙담치 말기를,

책망치 말기를,

그렇게 살아가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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