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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볼리 Feb 17. 2021

내가 몰랐던 나를 알아가는 중

나는 거절을 잘 못하는 사람이었어요.

오랜만에 쓰는 글이다. 글을 쓰지 않는 동안 나는 이제껏 몰랐던 '나'에 대해 알게 되면서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그런 나를 인정하게 되면서 내가 갖고 있는 저마다의 인간관계 바운더리가 좀 더 명확해졌다. 그렇게 마음이 떠난 무리도 생기고, 그렇게 마음이 더 애틋해진 무리도 생겼다.



내가 몰랐던 나,

나는 거절을 잘 못하는 사람이었다!


매번 서점에 가도 '거절 잘하는 법, 거절이 어려운 사람들이 읽는' 책들에 눈길을 준 적이 1도 없었다. 거절이 무슨 어려운 일이라고, 난 거절 잘해!라는 생각으로 30여 년을 살아가고 있었는데.. 아 니 었 다.


오래된 일임에도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중학교 때의 한 사건이 있다. 어떤 남자애가 빼빼로데이에 빼빼로를 선물하며 나에게 고백을 했다. 나는 어찌나 부끄럽던지 화장실에 들어가서 숨어있다가 그 남자애를 요리조리 피해 다녔다. 생각지도 못한 고백이었지만 나는 상대방과 같은 마음이 아니었고. 그래서 거절하기 미안한 마음에 부끄러움을 방패 삼아 답장 주는 걸 피했다.


지금 생각하면 난 거절을 어려워하며 살았는데, 왜 몰랐을까? 바로 얼마 전까지 몰랐으니 그럼 내가 살아온 인생 내내 나는 나를 어떤 사람으로 알고 산건가. 지금까지 나 자신을 오해하며 잘 못 알고 살았다는 건데, 대체 왜?



가만히 곱씹어보니 나의 말투가 한몫했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1. 나는 내가 옳다고 여기는 것이 있으면 확신에 가득 차 옳다고 말한다. 맞는 건 맞고, 아닌 건 아니니까. 누군가에게 (특히 가족에게) 조언을 해줄 때는 더 칼같이 이야기한다. 내가 또 목소리가 커서 이런 상황에서의 내 말투는 유독 더 땍땍거리며 차갑고 어느 땐 무심하게까지 들린다.


그런 내 말투 때문에 착각했다. 보통 거절 잘 못하는 사람들의 말투가 어떨까 상상하면 우물쭈물하며 끝은 들릴락 말락 하며 잘 들리지 않는, 그런 모습이 뻔하지 않는가! 그런데 나는 (거절의 상황에서는 아니지만) 할 말은 또박또박 거침없이 하니까 나는 내가 거절의 상황에서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 줄 알았다.


++ 그리고 본능적으로 거절의 상황을 내가 피해 다녔을 수도 있다. 그래서 더 거절을 못 한다는 사실을 몰랐을 지도.



2. 누군가에게 부탁을 할 땐 정확하게 한다. 나는 이게 내가 정확한 걸 좋아해서 그러는 줄 알았다. 그런데 거절을 어려워하는 내 성격도 일부 반영되어 있었다. 어떤 느낌인지 좀 더 쉽게 이해할 수 있게 일화를 적어 봤다.


동생 집에 놀러 갔는데, 엄마한테 영통이 왔다. 


- 내일 뭐해? 스케줄 좀 말해죠.

- 운동해요. 왜요?

- 몇 시에 가는데?

- 왜요!

- 언제 가는데? 알아두려고 그러지.


엄마가 자꾸 나의 내일 스케줄을 물으셨다. 분명 의도가 있었다. 내 스케줄을 아는 동생이 대신 대답했다. 곧바로 대화 주제가 바뀌었다.


- 엄마, 내일 나 약속 있는데 우리 집에 올 거죠?

- 내일 말고 내일모레 가려고 해.


그리고 이어진 침묵...

(부가설명을 하자면 동생은 아이가 있어서 엄마에게 맡기고 약속을 갈 생각이었다. 그리고 나는 동생집과 가까운 곳에서 살고 있다.)


결단을 내려야 할 사람은 나였다. 그 누구도 내게 부탁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 누가 봐도 나는 그 부탁을 들어줘야 했다. 이게 더 싫다. 차라리 부탁을 했으면 (물론 거절하기 어려웠겠지만 이건 둘째 치고) 마음이 더 편했을 거다. 거절을 못해서 억지로 하는 거라고 해도, 내가 하겠다고 선택한 거니까 내가 감당해야 하는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나에게 왜 시켰다고 따질 수 없다. 


하지만 엄마와 동생은 정식적으로 부탁을 한 적이 없다. 그러니까 그들은 고수인 거다. 굳이 미안해하며 부탁을 하지 않고도 본인들의 목적을 달성했다. 반면 나는 상황으로만 놓고 보면 그 누구도 강요하지 않았지만 내가 눈치 보다가 그 눈치에 못 이겨 스스로 한다고 한 거다.


그러니 명확하게 부탁을 해주는 편이 더 낫다, 나에게는.


그래서 나는 두리뭉실하게 이야기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두리뭉실한 상황 속에서 누가 봐도 답은 나일 때, 나는 그 상황에서 거절하기가 쉽지 않다.



MBTI나 심리 테스트, 한때 내가 푹 빠져 있었다.


막연히 안다고 자부한 '나'를 명확히 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보면 나라는 사람이 왜 이런지에 대한 자기 합리화 수단으로 아주 유용하게 쓰려고 그랬던 것도 같다. '아, 나는 이런 사람이었지. 여러분, 저는 이런 사람이에요.' 그렇게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재확인하며 이상한 안도감도 느꼈다.


그런데 요즘은 직접 부딪히며 깨닫는 중이다. 사실 좀 부끄럽기도 하다. 이제껏 허투루 산 것 같기도 하고, 30대가 된 지금에서야 하나씩 알아간다는 게 너무 늦은 것도 같고. 그러다가도 이게 진짜 30대가 아닌가 싶기도 하다.


어쨌든 나는 요즘 내가 몰랐던 나를 알아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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