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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비곰 Dec 29. 2020

<혹시 내게 무슨일이 생기면>남은 자들의 무게-넷플릭스

[넷플릭스를 훔치다-단편 애니메이션] 

혹시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혹시 무슨 일이 생긴다면...사랑해요' 영화는 그렇게 시작된다. 애잔한 음악이 흐른다. 날카로움이 느껴지는 펜 선이 화면을 채운다. 때론 선들의 집합체인 그림자가 자리하다 사라진다. 12분. 남겨진 자들의 이야기다. 




영화는 총기사고로 아이를 잃은 부모가 느끼는 삶의 무게를 보여준다. 전형적인 비극이다. 화목한 가정의 아이가 교통사고나 총기사고로 사망하고, 그들의 부모가 슬퍼하고 멀어지는 내용 말이다. 


클리셰=진부한 표현이나 고정관념을 뜻하는 프랑스어로, 영화의 경우 진부한 장면이나 상투적인 줄거리 그리고 판에 박힌 대화나 전형적인 수법·표현을 지칭한다.


클리셰가 남발되면 작품이 진부하거나 지루해질 수 있다. 반면 클리셰는 익숙한 내용으로 친근감을 줄 수 있고, 사회 통념이 반영돼 심리적 거부감을 줄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영화는 한 가족의 행복과 절망을 보여줌과 동시에 '총기사고'라는 익숙한 명제를 던진다. 특히 중산층. 단층 주택. 텃밭. 너무도 한갓진 보통 사람의 이야기로 대변한다.


여자아이가 축구 경기를 하며 뛰노는 모습은 차별 없이 선택의 자유가 보장된 '자유 민주주의'라는 환경을 대변할지도 모른다. 약자이거나 차별받을 수 있는 여자 아이의 선택이 주는 이미지는 의미를 더 강하게 부여한다.


결과적으로, 작품은 '어디서나 일어날 수 있고, 너희 또는 우리 가족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라는 전형적 얘기로 더 큰 경고를 보낸다. 그리고 남은 이의 삶의 무게를 얹었다.


답답할 수 있다는 이유로, 이야기가 탄탄해야 할 '무언극'이다. 단편 애니메이션이 가져야 할 서사는 충분하다.잠시 딴짓하는 순간 극 전체를 이해할 수 없을 정도의 장면 전환마저도. 




표현을 보자. 날카로운 선은 적절한 거리 두기 효과를 지닌다. 감정에 매몰되기보다 떨어져 냉정히 볼 수 있다. 이 점이 오히려 최종 목적지에 도착해 폭발할 수 있는 요소로 작용한다. 누군가는 '담백하다' 평가할 수 있다. 


이야기는 하나의 실타래처럼 '풀어졌다 뭉쳤다'를 반복한다. 극에 등장하는 그림자는 인물의 과거 행동이나 현재의 심리를 투영해 만든 또 다른 자아다. 때론 숨겨진 진심이기도 하다. 


인상적인 색 구성. 자식을 잃은 부모와 그 환경을 '상실'의 의미로, 채색을 최소화한다. 딸과의 추억이나 의미를 되새길 오브제는 '채움'의 의미로 밝은 색상으로 채색한다. 


채색을 뺀 그림이 주는 감정은 메마름이자 차가운 것으로 앞선 거리 두기 작용을 충분히 이끈다. 채색이 주는 행복하고 아름다움을 더 자극하기에도 충분하다. 이들은 서로 상호 자극제로 작용한다. 


다만 색 입은 성조기는 또 다른 의미다. 화면에 가득한 성조기와 뒤로 들리는 총소리는 현재 미국의 모습을 보여준다. 끊임없는 '총기사고'와 그로 인한 규제의 필요성. 그 색 입은 밝음이 반어법처럼 다가온다.




영화에 나온 부부를 들여다본다. 나의 뇌피셜이다. 삶의 중심이던 아이를 잃고 난 뒤 그들은 무너져 내린다. 서로 얼굴만 봐도 아이가 생각나 고통스럽다. 지옥과 같은 하루하루. 남겨진 자의 무게다.


흘러가는 빗방울처럼 슬픈 마음과 함께 서로를 향해 등 돌린다. '내가 그날 학교를 보내지 않았으면. 조금 더 조심했으면.' 불가능에 가까운 주문을 외우며 스스로를 옭아맨다. 


자신에게 겨눴던 총부리가 어느샌가 서로를 겨눈다. '네가 조금 더 신경 썼으면. 애초에 다른 학교를 보냈어야지. 네가 이곳에서 살자고 했지.' 관계의 문이 닫히기 시작한다. 


이유 모를 짜증과 더 이상 참지 않는 그들. '사실 진심이 아니었어' 말하고 싶지만 입 밖으로 나오지 않는다. 놓친 타이밍. 대화가 사라져 멀어진다. 


주변을 둘러본다. 온통 아이의 흔적이 남아있다. 밝은 미소의 사진. 낡은 티셔츠. 집 벽면의 낯선 페인트칠.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다. 무너진다. 


누군가에게 위로받고 싶다는 생각에 되살아 난 기억. 예쁜 여자아이. 미트볼 파스타를 먹고, 축구를 좋아했던. 힘껏 찬 공에 생긴 벽면의 흠집을 페인트칠하며 웃던 아이. 고백을 받고 좋아함을 알기 시작한 아이.  


자신을 묶고 있던 기억에서 조금 더 자유로워진다. 부부는 아이와 여행했던 시절을 떠올리며 관계의 회복에 나선다. '이제 괜찮아? 힘들었지?' 서로를 안으며 단단해진다. 


아이가 원하는 건 무엇일까? '사랑해요' 아이가 남긴 마지막 메시지. "(내가 무슨 일이 생겨도) 나는 사랑받았고 사랑했다. 슬퍼하지 마라.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사랑하고 행복해라." 남겨진 이들에 대한 부탁이 담겼다.


뻔했지만 좋았다. 짧았지만 충실했다. 그리고 단단했다. 다만 아쉬웠다. 한계점이 너무 명확해 보였다. 클리셰에 대한 저항감으로 호불호가 말이다.



p.s


유서를 써 본 적 있는가. 영화의 도입부는 유서보다 그 의미에 더 초점을 맞춰야 하지만 제목을 본 뒤 첫 물음이다. '혹시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수많은 물음과 답이 오간다. 물음은 또 물음을 만들고 또 생산된다. 


'혹시'라는 가정과 '무슨'이라는 의문이 주는 의미는 상당하다. 혹시 길 건널 땐. 혹시 밥 먹을 땐. 혹시 데이트할 땐. 무슨 일. 무슨 행동. 어떤 맛. 영화가 끝날 때까지 제목이 주는 여운은 가시지 않는다. 




<넷플릭스 단편 애니메이션> 

제목 - '혹시 내게 무슨 일이 생기면'

감독·각본 - 윌 맥코맥·마이클 고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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