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서브스턴스>
[소설가의 콘텐츠 읽기] 아름다움의 역함에 대하여
영화 <서브스턴스>
*이 글은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더 나은 나를 원하는가.
이 질문에 ‘아니요’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과연 존재하기는 할까. 많은 이들이 말한다. 행복한 삶을 위해선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고. 애석하게도 ‘만족’은 누구나 누릴 수 있는 감정이 아니다. ‘만족’은 저절로 생겨나는 것이 아닌 성취의 영역이니까. 성과에 따라 당연한 듯 따라오는 것도 아니고, 이룬 게 없다고 가질 수 없는 것도 아니다. 이 뻔한 진리를 깨닫지 못하면 마음은 필연적으로 고달파질 수밖에 없다. 왜 이토록 처음부터 고루한 이야기를 하느냐. <서브스턴스>가 고루한 교훈을 주는 영화인 거냐 묻는다면 단연코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오히려 <서브스턴스>는 지금의 ‘만족’ 따위엔 전혀 관심이 없어 보인다. 질문을 던질 뿐이다. 더 나은 나를 원치 않을 수 있겠냐고. 더 나은 나를 원하느냐는 질문으로 말이다. 그렇게 <서브스턴스>는 시대가 바뀌어도 변치 않는, 쉽사리 버리려야 버릴 수 없는 일차원 적 욕망을 노골적으로 꼬집는다.
<서브스턴스>는 한때 아카데미상을 타며 명예의 거리까지 입성했던 대스타 엘리자베스의 씁쓸한 현실과 함께 시작된다. 과거의 영광을 뒤로한 채 TV 에어로빅 쇼의 진행자로 살고 있는 엘리자베스는 50살 생일, 더는 젊지도 아름답지도 않다는 이유로 해고된다. 오십 살이 되면 “끝”이라는 말과 함께. 마치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돌아오는 길에 교통사고를 당하는 엘리자베스. 다친 데가 하나도 없으니 다행이라는 의사의 말에 결국 울음이 터지는데, 그때 젊고 매력적인 간호사로부터 ‘서브스턴스’라는 의문의 약물을 권유받는다. 그날 밤 엘리자베스는 서브스턴스를 통해 ‘젊고 아름다운’ 더 나은 나 ‘수’를 탄생시킨다. 두 사람이 된 한 사람이 지켜야 할 예외 없는 규칙, 7일이라는 완벽한 균형을 지킬 것.
균형이 깨진 세계
<서브스턴스>는 노골적으로 불쾌한 영화다. 신체가 분리되고 찢겨 나오는 등의 고어적인 장면 때문만은 아니다. 진짜 불쾌함은 이 영화가 아무렇지 않게 처음부터 툭 던지는 그 메시지에 있다. ‘더 나은 나를 원하는가.’ 그렇다면 더 나은 나는 어떤 나인가. 내가 될 수 있는 가장 베스트의 나는 어떤 모습일까. <서브스턴스>는 고민조차 하지 않고 말한다. "젊고 아름다운 나" 극 중에서 주인공 엘리자베스는 서브스턴스 약물을 사용하며, 쳐진 피부는 탄력과 함께 성적 매력을 되찾는다. 젊은 나는 늙은 내가 잃어버린 자리를 별다른 노력 없이 한 방에 차지한다. 마치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젊은 나 ‘수’의 시간은 오로지 몸매와 미소를 과시하는 데 쓰인다. 마찬가지로 늙은 나의 시간 역시 나의 늙음, 잃어버린 것을 체크하는 데에만 쓰일 뿐이다. 그렇다. 이 영화는 처음부터 균형이 깨진 세계다. 오로지 외적 아름다움에 치중된 세계. 내면의 아름다움은커녕 삶의 다른 그 어떤 것도 말하지 않는 세계. 균형만 깨지지 않으면 괜찮을 거라는 영화 속 또 다른 메시지는 이미 균형이 깨진 세계 속에서 절대 괜찮을 리가 없다고 선언하는 것과 다름없다.
이는 영화 밖으로 한 걸음만 빠져나오면 더욱 명확하게 느껴진다. 상대적으로 외적 매력에 집착할 수밖에 없는 엔터테인먼트의 세계를 다룬다고 할지라도, 어째서 엘리자베스는 그 세계에서 밀려났을 때, 또 다른 세계를 만나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을까. ‘수’를 만들어낸 후에도 왜 다른 시간을 보내지 못하는 걸까. 오직 젊음에만 집착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잠시나마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 위해 데이트를 시도하지만, 그 데이트가 성립되기도 전에 쓰러져 있는 ‘수’의 얼굴에 분노만 폭발시키는 이유는 무엇일까. 어째서 그 흔한 대화의 기쁨을 누려볼 생각조차 하지 않는 걸까. 답은 간단하다. 그 모든 것이 의미 없는 세계니까. 오직 내가 잃은 것만 보이는 세계니까. 이는 영화 속에서 요리를 하는 '엘리자베스'의 모습을 통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수’ 때문에 할머니가 되어버린 엘리자베스는 방송국 대표가 놀리듯 건넸던 선물, 프랑스 요리책을 보며 시간을 보낸다. 당연히 이 이야기는 인생의 또 다른 재미를 찾아가는 이야기가 아니다. 요리 과정은 역겨워 보일 정도고, 그 과정 내내 엘리자베스는 ‘수’가 나오는 TV쇼를 보며 자신의 삶을 빼앗겼다고 분노를 쏟아낸다. 외모의 아름다움만이 유일 가치가 되어 버린 세계 속에서, 그 아름다움은 또 다른 역겨움을 만들어 낼 뿐이다. 동시에 그 아름다움 역시 결코 아름답게 느껴지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역할 뿐이다.
기억하라, 당신은 하나다.
‘서브스턴스’라는 정체불명의 존재는 또 다른 나 ‘수’가 7일을 지켜야 한다는 규칙을 어긴다고 제지를 해달라는 ‘엘리자베스’의 말에도, 하는 일이라곤 TV를 보며 먹는 것밖에 없다고 시간이 부족하다고 투정을 부리는 ‘수’의 말에도 한 마디를 던질 뿐이다.
기억하라, 당신은 하나라고.
당연하게도 의문은 따라온다. 엘리자베스를 통해 존재하게 된 수이지만, 두 사람은 나이 생김새는 차치하고, 시간도 기억도 공유하지 않는다. 한 명이 움직일 땐 한 명은 기절 상태이고(잠이라고도 할 수 없다), 서로가 보낸 시간을 깨어난 후에 추측할 수 있을 뿐이다. 두 사람이 연결되었다는 것은 ‘수’가 시간을 늘리기 위해 ‘엘리자베스’를 좀먹고 있다는 사실에서만 드러난다. 균형을 깨뜨리는 순간 서로의 생명을 갉아먹는다. 그렇게 내가 나만 지키려는 그 이기적인 욕심이 나를 죽게 만드는 결과를 낳는다. 여기서 따져 보아야 한다. 끊임없이 하나라 말하면서도 전혀 다른 나를 보여주는 이유는 무엇일까. 늙어가는 나를 받아들이고, ‘러브 마이셀프’를 실천하라는 걸까. 그럴 리가. 지금껏 쭉 말해온 것과 같이 <서브스턴스>는 이제껏 우리가 수없이 들어온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게 아니다.
전혀 다른 두 사람이 ‘하나’라는 것을 명확하게 보여주는 건 두 사람에게 주어진 한정된 시간이 아니다. 그 시간 속에 숨겨진 ‘욕망’이다.
모두가 너를 사랑할 거야.
영화의 시작점인 균형을 깨뜨리면 안 된다는 7일의 규칙이 등장하는 순간부터 파국은 예정된 것이었다. 규칙은 어기기 마련이고, 감당할 수 없는 시련은 찾아오고, 뒤늦게 깨달음의 순간이 온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가능하기 위해선 우리가 살고 있는 세계, 그리고 자신을 제대로 바라볼 수 있을 때이다. 이 지점에서 <서브스턴스>는 또 다른 태도를 취한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서브스턴스’가 어디에서 온 것인지, 어떻게 생겨났는지, 왜 하필 ‘엘리자베스’를 택한 것인지 우리는 알 수 없다. 엘리자베스조차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엘리자베스’는 자신을 이렇게 만든 ‘수’를 원망하면서도, 원흉의 시작인 ‘서브스턴스’에 대해선 전혀 궁금해하지 않는다. 자신에게 주어진 세계를 조금도 깨고 나가지 못한다. 그저 그 세계 속에서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을 지만 찾을 뿐이다. 애석하게도 세계를 깨고 나오지 못한 자에게 평온은 오지 않는다.
죽음에 가까워졌을 정도로 흉측한 몰골을 하게 된 ‘엘리자베스’는 ‘수’를 멈추기 위해 ‘서브스턴스’에 전화를 건다. 이젠 모든 걸 끝내겠다고. 정해진 규칙에 따라 지난 시간을 되돌릴 순 없지만 ‘지금’에서 멈출 순 있다. 그렇게 ‘수’를 삭제할 수 있었다. 하지만 끝끝내, 엘리자베스는 ‘수’를 잃지 못한다. 마지막 순간 눈에 들어온 “모두가 너를 사랑할 거야”라는 수에게 온 카드 하나 때문에.
지금 자신의 모습으로는 더는 사랑받을 수 없을 거라는 것을 알고 있는 엘리자베스는 또 다른 나인 ‘수’를 차마 죽이지 못한다. 비록 내가 누리지 못할지라도 사랑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니까. 그 순간마저 빼앗을 수는 없으니까. 그렇게 마지막 순간 엘리자베스는 자신이 아닌 사랑받기를 택하고 만다. 그 순간 우리는 새삼 느끼게 된다. 아름다움에 대한 끝없는 욕망은 사랑받고자 하는 욕망과 동일하다는 것을. 그 욕망이 충족되지 못하는 순간 스스로에게 기꺼이 폭력을 휘두르고 마는 것을. <서브스턴스>는 그 삐뚤어진 욕망을 노골적인 은유로 보여주는 영화다. “예쁜 여자는 항상 웃어야 돼.”라는 잔혹한 말과 함께. 당연하게도 그들이 쫓던 아름다움은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다. 그렇게 아름다움이 사라진 세계 속에서, 다시 물을 수밖에 없다. '서브스턴스'는 어디에서 온 것일까. 어떤 '더 나은 나'를 택할 것인가.